통영의 무인도인 납도 또한 그러합니다. 2019년 1월 5일(토)-6(일)일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는 <새해특집>, 제78강으로 통영의 무인도인 납도를 탐사하러 갑니다. 또 통영에 정박하여 통영 맛기행도 함께 할 예정입니다. 겨울통영은 어느 때보다 맛있습니다. 본래 겨울 해산물이 맛있지만 겨울통영은 풍성하기까지 합니다. 섬학교 첫 무인도 탐사와 통영 맛기행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선박 정원 제한으로 우선 19명만 선착순으로 모십니다. 신청자가 35명 이상이 되면 배를 한 대 더 띄울 수도 있습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무인도 납도와 겨울통영 맛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섬학교 첫 무인도 기행-동백섬 납도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우장춘 박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가 통영의 섬에 밀감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56년 우장춘 박사는 남해안 섬 지역의 새로운 소득원 창출을 위해 밀감나무를 시험 재배했는데 그 섬이 바로 통영시 욕지면 납도였다. 1966년 1월 6일자 동아일보에는 우장춘 박사의 노력으로 섬에 심었던 밀감나무에서 첫 수확을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충무 통영항에서 발동선을 타고 5시간(현재는 약 30분 소요) 남짓 남쪽으로 내려가면 납도에 닿는다. 이따금 폭풍에 쫓긴 고깃배들이 찾아들 뿐 오가는 이 드문 이 섬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섬. 섬 사람들은 이제 10년 전에 심은 밀감나무가 자라 올 들어 처음 대량 생산에 성공했고 ‘제주 밀감보다 맛이 좋다’ 하여 제2의 밀감센터로 크게 번창할 꿈에 부풀어 있다.
10년 전 동백나무가 빽빽이 섬 둘레를 병풍처럼 감싸 방풍림이 돼 있는데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가 알맞다는 말을 당시 우리나라 농학계의 권위자인 고 우장춘 박사가 전해 듣고 현지를 답사, ‘제주도보다 천연조건이 더 좋다’고 결론을 내리자 섬 주민들은 앞을 다투어 밀감의 묘목 4백 그루를 심었던 것인데 올해 그 첫 결실을 보게 된 것.
이 섬에서 처음으로 밀감 묘목을 심었던 박종식(42) 씨는 올 들어 처음으로 수확, 15만원을 벌었고, 뒤이어 묘목을 심었던 섬사람들도 내년부턴 돈벌이를 할 수 있다고 벅찬 꿈에 잠겨 있다. 납도의 경작 면적은 3만 평, 현재 수확이 가능한 밀감 묘목은 5백여 그루에 지나지 않지만 수천 그루의 묘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머지않아 한국 제2의 밀감센터가 될 것이라고 섬사람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납도 시험 재배에 성공한 밀감은 이후 욕지도, 두미도 등의 인근 섬에도 심어졌다. 1970년대 욕지도에는 전체 주민들의 절반 정도인 500여 농가에서, 120여ha나 밀감을 심었다. 소득이 좋아 유자나무와 함께 자식 대학 등록금을 대 준다 해서 대학나무로도 불리던 밀감 나무. 하지만 몇 해 후 이상 한파에 많은 밀감 나무들이 동사했고 1980년대 초에는 밀감이 과잉 생산 되기까지 하며서 가격이 폭락하자 납도 사람들도 밀감 농사를 포기하고 하나 둘 섬을 떠나버렸다. 그래서 아직도 납도에는 야생화된 밀감 나무들이 더러 남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섬들은 그 형상에 따라 이름이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소처럼 생긴 우도, 곰처럼 생긴 웅도, 납작한 섬은 평도, 납도 역시 모양이 납작해서 납도라 했다고 전한다. 0.3㎢의 면적에, 섬 둘레도 2.2km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납도는 140년 전, 고성에서 동래정씨가 뗏목에 떠밀려 이곳에 정착하면서 사람살이가 시작됐다고 한다. 내무부의 도서지에 따르면 1973년에 이 섬에는 16가구 81명이 살았고, 학생도 13명이나 됐다. 1999년까지도 8가구가 살았다. 하지만 지금 섬은 다시 무인도가 됐다.
사람들이 떠나간 섬은 적막하나 섬은 더없이 평화롭다. 최고점이 35m에 불과한 낮은 섬. 납도는 놀랍게도 온통 수백 년 된 동백나무 고목 군락지다. 거제의 지심도 못지않은 동백섬이다. 이 섬의 숲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이 섬의 생태계에는 축복이었던 셈이다. 둘레를 도는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섬은 작지만 섬의 숲은 떠나기 싫을 정도로 아름답다.
섬에서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삶의 흔적은 뚜렷하다. 마치 잠깐 집을 비워 두고 모든 섬사람들이 함께 여행이라도 떠난 것인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다. 건물들이 모두 숲에 둘러쌓여 있어서 보존이 잘 된 까닭이다. 숲 길가 분교 건물 초입 작은 돌판에는 원량국민학교 납도분교의 교목과 교화를 설명해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교목 팔손이나무, 교화 동백꽃. 동백섬 납도 아이들, 그 삶의 온기가 느껴져 문득 반갑다. 숲길을 걸으며 나그네는 어째서 사람이 사는 세계에는 파라다이스가 없는지를 또 한 번 깨닫는다. 어떤 파라다이스도 사람의 발길이 닿는 순간 더 이상 파라다이스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납도는 사람이 떠나간 뒤 스스로 파라다이스가 됐다. 나그네는 또 겨울이 가기 전에 그 파라다이스 같은 동백의 섬으로 갈 것이다. 도착하는 순간 파라다이스가 사라질 지라도 이상향을 향한 여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겨울통영 맛기행-통영은 맛있다!
과거 통영은 500여 척의 전함과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다. 사람들은 통영이 본래부터 경상도인 줄 알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1603년,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한미(寒微)한 포구였던 경상도 고성현 두룡포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 곧 통영이다. 경상도 땅에 건설됐지만 통영의 수령인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이었고,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독자적으로 통영과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수군 주둔지들을 다스렸다. 통영은 3도에서 온 군사들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모여 이룬 융합도시였다.
이들이 경상도와는 별도로 3백여 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다.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다.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다.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이다.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는 경상도에서 통영이 유독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통영이 경상도를 넘어 ‘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던 데서 유래한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곳이라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풍요로워야 맛이 개선될 여지가 생기는 법이다. 과거 통영은 풍요로운 땅이었다.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 정조 때는 통영에 주전소까지 있을 정도였다. 통영에 엄청난 부가 집중됐었다는 뜻이다.
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은 인근에 김제만경 평야라는 큰 들녘과 풍요로운 갯벌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다.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이다. 봄이면 주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이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주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하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이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이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온다.
전주의 막걸리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다. 대신 술값이 좀 비싸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다.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대부분 기본요금을 받는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긴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다.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른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원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다.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국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난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다. 동해에서는 곰치, 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 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 물잠뱅이 등으로 칭한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른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온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이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 대부분 산란 후 죽는다.
<자산어보>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한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 정약전 <자산어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다.
늦가을부터 통영은 물메기국 끓이는 철이 시작된다.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곰이라고도 하는 물메기. 곰치국이든 물메기국이든 해장국으로 그보다 더 시원한 음식은 드물 것이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국을 따라가기 힘들다. 지방이 아주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난다. 통영에서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다.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라 한다.
물메기국은 맑게 끓여야 제 맛이다. 너무 매운 ‘땡초’(고추)도 넣지 말아야 한다. 팔팔 끓는 물에 무를 썰어 넣고 소금 간을 한 뒤 무가 익을 즈음에 손질해둔 메기를 넣고 익힌다. 살이 무른 생선이니 너무 끓이지 않고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인다.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국을 낼 때 대파를 얹는다. 그래야 맑고 시원한 메기국이 된다. 양파 등 다른 채소를 넣지 않는 것도 물메기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함이다. 통영에서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의 속을 물메기국이 달래준다. 술병도 곧잘 고쳐주는 물메기국의 유혹을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을까.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 같은 건물이다. 진정한 랜드마크다. 통영 답사에서 언제난 빼놓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다.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이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이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다.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이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섬학교 제78강 <무인도 납도와 겨울통영 맛기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019년 1월 5일(토)>
07:00 서울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8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통영백반)
-중화항 출항(30분 소요)
-납도 도착
-납도 둘레길 트레킹
-납도 출항(30분 소요)
-중화항 도착
-달아공원 일몰 감상
-저녁 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월 6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통영 유명 물메기탕)
-세병관 탐방
-미륵산 정상 탐방(케이블카)
-미래사 편백숲과 미륵산 둘레길 걷기
-점심식사(통영식 한정식)
-서호시장 장보기
14:30 서울 향발. 제78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장갑,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1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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