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이 회수를 지나 탱자가 되고(橘化爲枳) 만 것일까. <인사이드경제>는 처음 ‘광주형 일자리’ 문제를 접했을 때 만만치 않은 고민이 녹아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밀실 교섭의 내용들이 양파 껍질처럼 한 겹 두 겹 벗겨지기 시작하자 언급하기 민망한 속살들이 드러나고 있다.
꽁꽁 숨겨 왔던 ‘1차 제시안’
광주형 일자리의 민낯은, 정부와 광주시가 애초 협상시한으로 정했던 11월 15일을 넘긴 직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협상에 임한 당사자, 즉 광주시와 현대차가 서로 협상 결렬의 책임을 상대편에게 넘기기 위해 그동안 숨겨 왔던 협상과정과 내용을 은밀하게 언론에 풀게 된 것이다.
(관련기사 ☞ : 광주형 일자리, 결국 KDB자동차?)
특히 그 과정에서 광주시가 현대차 투자 유치를 위해 최초로 제안했던 '1차 제시안'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올해 지자체 선거가 한창 진행되던 6월 7일, 현대차는 광주형 일자리 관련 투자 의향서를 광주시에 보내게 된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투자에 난색을 표했던 현대차 자본이 처음으로 긍정적 신호를 보인 것이다.
6.13 지자체 선거에서 당선된 신임 이용섭 시장 체제는 곧바로 협약 체결로 직행하려 했다. 현대차와의 협의는 물론이고 청와대에도 연락해서 6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는 투자 협약식까지 기획했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하루 전에 행사 자체가 엎어져 버렸다.
그 뒤로도 잡음은 끊이지 않았다. 애초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에 따르면, 광주형 일자리와 같은 기획은 지역 노·사·민·정 논의와 합의를 통해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는 노동계도, 시민단체도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현대차와의 밀실 교섭을 이어갔다.
민주노총은 애초부터 노사민정 협의에 불참 방침이었다지만, 광주시는 협의에 참여할 의향이 있었던 한국노총까지 배제했다. 현대차와 광주시 사이의 ‘묻지마 협상’이 지속되자 시민사회단체들도 뿔이 났다. 곳곳에서 기자회견과 성명이 발표되고 반발이 시작된다.
결국 8월 말경 광주시는 한국노총 측에 그동안 현대차와의 협상 내용을 공개하고 성실하게 협의를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내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9월에 한국노총이 협상장을 박차고 나오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대체 무슨 얘기가 오가고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현대차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투자 의향서를 제출하고, 잘 가는 것처럼 보이다가 대통령이 행사 참석 일정을 하루 전에 취소하고, 한국노총과도 삐걱거리던 관계를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파탄 일보직전까지 벌어지데 된다니 말이다.
사상 전례 없는 '자본 천국' 만들어주기
그 답은 1차 제시안에 있다. 현대차의 투자 의향서가 제출되던 시기쯤 만들어진 광주시의 협상안 말이다. 대통령 참석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이 내용을 확인한 청와대가 화들짝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너무 황당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어서 광주시는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에 공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용을 확인한 한국노총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파탄에 이른 협상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10월에 광주시와 한국노총, 시민단체, 전문가그룹이 모여 ‘원탁회의’를 구성하고서야 한국노총은 협상장에 복귀한다. 그 과정에서 ‘1차 제시안’을 일부 수정한 ‘2차 제시안’이 합의되기에 이른다. 광주시는 이 안을 들고 현대차와 협상에 나섰으나 현대차는 애초 1차 제시안에서 너무 후퇴했다며 합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럼 1, 2차 제시안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담겼던 것일까? 11월 15일, 자신들끼리 일방적으로 정한 시한을 넘기자 일부 언론들이 이 내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제시안을 문서로 공개한 언론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인사이드경제>는 언론 보도 내용을 종합하여 아래와 같은 표를 작성해 보았다. (주로 아래 3개의 언론 기사들을 참조하였음)
데드라인 넘긴 광주 공장..졸속행정·노노갈등 한계 노출 (뉴스1, 11.15)
평행선 달리는 '광주형 일자리' … 내달 초까지 협상 (머니투데이, 11.18)
애초 최저임금 이하 제안했다 … 광주가 그르친 광주형 일자리 (중앙일보, 11.20)
ILO 협약 비준한다던 그 정부 맞나
11월 15일자 기사를 확인했을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18일자 기사와 20일자 심층취재 기사를 접하면서는 분노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주시는 군사독재 시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자본천국 노동지옥 공장’을 현대차에게 약속하려 했단 말인가? 전두환의 살인적인 독재체제에 목숨을 걸고 맞섰던 그 빛고을에서?
우선 <인사이드경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임금·단체협약 협상을 5년간 유예한다”는 1차 제시안 내용이다. 3개의 기사 모두 1차 제시안에 이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도하고 있고, 광주시가 특별히 반박하고 있지도 않기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는 점은 사실로 보인다.
현재의 노동관계법, 아니 현행 헌법 체계에서 어떻게 저런 발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헌법과 노동관계법을 죄다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임금·단체협약을 5년간 유예할 방법이 없다. 저 사업장에 노동조합이 조직된다면 단체교섭을 무슨 수로 유예한단 말인가?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했을 때 가능한 방법 한 가지는 ‘자본에게 충성하는 어용노조’가 들어서는 길이다. 그래서 임금·단체협약을 모조리 회사에 위임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라 하더라도 ‘5년’씩이나 유예할 수는 없다. 현행 노동조합법은 단체협약의 최장 유효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용자에게 충성하는 어용노조가 임·단협을 모조리 사용자에 위임해도, 2년 뒤에는 다시 단체교섭을 해야만 한다. 5년간 임·단협을 사용자에게 위임한다는 협약을 체결하더라도, 법이 정한 최장기간을 넘기 때문에 2년 이상은 당연 무효가 된다.
이런 내용은 군부독재 시절 수출자유지역에서도 구경한 적 없고, 경제개방의 물결 속에 만들어진 경제자유구역에서도 저런 독소조항을 발견할 수 없다. 게다가 신임 이용섭 광주시장은, ILO 협약 비준을 통해 노조 할 권리를 대폭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던 문재인 정부 1호 사업인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던 인물 아닌가!
최저임금 정도는 간단히 무시
기본급과 제수당, 시간외수당까지 포함해 연봉 3000만 원을 1차 제시안으로 내놓았다는데 이는 최저임금 턱걸이 수준이다. 내년 최저임금이 시간당 8350원, 월 환산액 174만5150원이며 이를 12개월로 곱해주면 2094만 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최저임금 턱걸이냐고?
우선 각종 수당과 시간외수당까지 포함하면 2500만 원까지 오르게 될 것인데, 문제는 저 임금은 광주형 일자리가 실제 자동차를 생산하게 될 2021년에나 적용되는 임금수준이라는 것이다. 3년 뒤의 최저임금은 더 올라갈 것이기에 연봉 3000만 원은 최저임금 턱걸이는 물론이고 최저임금 위반 소지까지 불러오게 될 것이다.
게다가 임금인상은 직전 3년간 물가인상률의 평균치로 한다는 내용까지 들어 있다. 최근 물가인상률이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최저임금이 물가인상률보다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임금인상은 결국 기본급을 최저임금 밑으로 떨어뜨리고 말 것이다.
제시안 내용 중에는 ‘주44시간’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이건 또다시 놀토·일토 시대로 돌아가자는 건가. 현행 근로기준법으로는 광주형 일자리처럼 1000인 사업장 규모에서 주44시간을 시행할 방법이 없다. 하기야 헌법도 무시하는데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인들 무섭겠는가.
문제는 현대차가 애초 1차 제시안을 고집하면서 2차 제시안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차는 과연 무슨 생각인 걸까? 헌법과 근로기준법·최저임금법·노동조합법 모두를 깡그리 무시하는 1차 제시안을 고집한다? 그렇다. 이건 명백히 ‘현대차 치외법권 지대’를 인정해 달라는 초헌법적인 요구이다.
그런데 청와대와 광주시는 이런 현대차의 요구를 공개하지도 못하고 비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노동계가 양보해야 한다며 연일 민주노총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참고로, 광주시 일자리 협상에 참여한 것은 민주노총이 아니라 한국노총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와 광주시 지방정부는 현대차에 뭘 더 퍼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청년에게 이 따위 일자리를 물려줄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청년 일자리 문제가 심각한데, 대기업노조와 민주노조운동도 이 지점을 고민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는 얘기다. <인사이드경제>도 광주형 일자리 협상내용을 비판하는 것에만 그쳐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광주형 일자리가 못났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럼 그럴 듯한 일자리 창출방안을 내놓아야 비판도 설득력을 얻지 않겠는가.
사실 그런 방안은 대선 시기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내놓은 바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면서 노동시간 단축만이 아니라 휴일할증 50%를 삭감해 버렸다. 오히려 자본가들에게 연장노동·휴일노동의 유인책을 늘려준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에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개악(기준 시간을 3개월에서 6개월 내지 1년으로 연장)을 밀어붙이고 있다. 휴일할증을 삭감하고 탄력근로제를 개악해 버리면, 노동시간 단축은 절대로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런 방식의 노동시간 단축은 오로지 자본가 호주머니 이윤만 늘려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 자신의 공약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지금 시간까지도 잔업과 휴일 특근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업장의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면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유력한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런 곳이 어디냐고? 현대차·기아차 각 공장에서 (생산라인마다 편차는 있지만) 여전히 휴일 특근이 진행되고 있다.
만일 휴일 특근을 제한 내지 중단할 수 있다면 부족한 생산물량을 뽑아내기 위해 새로운 공장 설립이 필요해진다. 현대차에 초법적인 치외법권 지역을 보장해주지 않아도 된다. 현대차는 광주형 일자리가 아니라 ‘현대차 광주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차 기존 단체협약이 보장될 것이기에 질 좋은 일자리가 될 것이다.
민주노조운동과 대기업노조가 이런 지점을 적극 고민한다면 오히려 방법이 나올 것이다. 잔업과 특근을 제한하는 것은 자본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결단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과감하게 단축하고 실제 청년들의 일자리를 양질의 일자리로 보장할 수 있다면?
저들의 말대로라면 이제 내일과 모레로 협상 마지노선이 다가온다. 괴물 같은 광주형 일자리의 탄생을 지켜볼 것인지, 아니면 청년들에게 진정으로 질 좋은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한 진지한 대안 모색을 위해 다시 한 번 사회적인 대토론과 고민을 시작할 것인지, 그야말로 '운명의 2~3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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