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이 패배 후에 자주 하는 말이 질서 있는 수습이다. '질서 있는 수습'은 허구다. 멀쩡한 정당이 어쩔 수 없는 우연적 요인 때문에 패배했다면 질서 있는 수습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런데 최근의 우리 정치를 보면 질서 있는 수습을 택한 정당은 예외 없이 다시 패배했다. 1997년 당시 한나라당은 패배한 후에도 이회창을 중심으로 단결했으나 2002년 또 다시 패배했다. 2007년 패배한 민주당은 대대적인 혁신보다 안정을 선택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했다.
패배한 정당은 절치부심해야 한다. 이를 갈며 속을 썩이는 것이 절치부심이다. 민주당은 2007년과 2008년의 연이든 패배에도 절치부심하지 않았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있다. '와신'은 거북한 숲에 누워 자는 것이다. 중국의 춘추 시대에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섶에 누워 잠을 자며 복수를 꾀하여 월나라의 왕 구천(句踐)을 항복시킨 것에서 나왔다. '상담'은 쓸개를 맛본다는 뜻이다. 패배한 구천이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쓸개를 맛보며 복수를 꾀한 끝에 다시 부차를 패배시킨 고사에서 유래했다.
와신상담에 빗대 표현하면, 새누리당의 박근혜 당선자는 2007년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뒤 그야말로 와신했다. 복지를 수용하고, 2011년 말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하자 경제민주화 어젠더까지 끌어안았다. 당명, 당색도 바꿨다. 어떻게 해서든 이기겠다는 결기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어영부영했다. 2011년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혁신보다는 통합에 매진했다. 2012년 총선에서 허무하게 패했으나 새롭게 등장한 이해찬-박지원 체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와신을 이겨낸 상담의 절치부심은커녕 당과 후보에게 부담만 안겼다.
▲ 19일 대선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민주당. ⓒ프레시안(최형락) |
이해찬 전 대표는 전략가란 평가를 듣는다. 그런 그가 당 대표 취임 후에 한 것이라곤 안철수 전 후보를 공격하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유포한 게 전부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한 이유는 이슈, 특히 복지나 경제민주화로 표현되는 사회경제적 이슈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한 탓이다. 그렇다면 패배한 후에 민주당이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 새누리당과 다른 점을 쉽고 간명하게 보여주는 차별화였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어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고, 투표장에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는 이런 일에 무관심했고, 무능했다.
민주당이 2007년과 2008년의 패배에서 벗어나 기력을 회복한 동력은 복지 이슈였다.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무상급식 이슈를 잡아챘고, 이후 3+1의 무상 복지 시리즈로 흐름을 끌고 나갔다. 2010년 지방선거부터 2011년 10월의 서울시장 보궐선거까지는 민주당이 강세였는데, 그 이유는 어젠더 리더십(agenda leadership) 때문이었다. 그 어젠더 리더십이란 게 박근혜 전 대표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면 등장하면서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총선에서는 아예 상실돼버렸다. 즉, 새누리당과 민주당 간의 차별화가 사라지고 누가 더 잘할 것이냐의 인물대결의 구도 속에서 단일화에 매몰됨으로써 패배했다.
박지원 전 대표는 어떤가. 역시 무능했고, 당에 기여하기 보다는 부담을 줬다. 본인이 비리 의혹에 휩싸인 데다, 원내의 입법투쟁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총선 후 민생입법 경쟁에서도 밀렸고, 경제민주화 등에서 새누리당과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입법대결의 그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기득권 내려놓기 경쟁에서도 새누리당을 압도하는 모습을 연출하지 못했다. 이해찬-박지원 체제는 올드보이의 귀환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민주당의 실체를 매일 매일 생생하게 보여주는 라이브 쇼(live show)였다.
그럼에도 기회는 있었다. 9월 16일 당의 후보로 선출된 문재인이 강력한 혁신 드라이브를 걸었더라면 흐름은 달라졌을 것이다. 리더로서 박근혜가 일대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는 독함을 보였다면, 리더로서 문재인은 더불어서 함께 가는 착함을 보였다. 그런데 독한 리더는 구각을 깨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착한 리더는 기성에 짓눌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쪽은 강한 리더였고, 한쪽은 선한 후보였다. 이렇게 대비되는 리더십으로 정책쟁점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한 선거구도에서 야당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이번 선거의 패인은 간명하다.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고, 투표장으로 동원하는 데 앞섰기 때문이다. 출구조사의 데이터를 일단 신뢰한다면, 박 후보는 자신에게 몰표를 던질 50세 이상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고연령층의 투표율이 워낙 높기 때문에 이들의 투표율이 올라가봐야 한계가 있을 것이란 추측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50대의 89.9% 투표율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들의 높은 투표율 때문에 20~30대의 투표율 상승효과가 사라져버렸다.
민주당이 할 일은 대규모의 정밀한 사후조사(postmortem research)를 통해 민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집요하게, 정말 너무 과하게 파헤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기게 패인을 분석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에 따라 당의 노선과 전략을 재정비해야 한다. 이 작업은 당 내외의 인사로 별도의 팀을 구성해서 수행해야 한다. 충분한 예산을 투입해야 하고, 일체의 정파적 이해나 인간적 고려 없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객관적 분석과 대안이 모색될 수 있다. 지난 총선 패배 후처럼 제대로 된 패인분석도 없이 넘어가려고 하면 그건 재앙이다.
할 일은 또 있다. 이제 민주당은 전면적인 리더십 경쟁에 돌입해야 한다. 검증됐다는 미명 아래 식상하고 철지난 인물들이 당을 지배하고 이끄는 '2004년 체제'를 끝내야 한다. 민주당의 2004년 체제는 열린우리당 등장과 함께 지도부로 부상한 이들이 주도하고 끌고 온 낡은 체제다. 이 체제는 밑으로부터 치고 올라오는 새로운 인물에 의해 혁파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밑으로부터의 운동에 의해 리더십이 전면적으로 교체되어야 한다. 패한 정당이 태연하게 질서를 외치는 건 정파 프레임이다. 패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2선으로 물러나거나 정계를 은퇴해야 한다. 시니어 그룹의 전면적 퇴진 없이 민주당에게 허락된 미래는 없다.
이런 점에서 6개월 비대위 체제는 한가하고 한심한 발상이다. 폐허의 잔허 속에서, 패배의 상처가 쓰라릴 때 새로운 리더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무제한의 경쟁과 각축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 1979년 정권을 잃은 영국의 노동당이 무려 18년 만인 1997년에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젊고 역동적인 블레어를 당 대표로 선출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 검증을 이겨내는 리더의 등장 없이 선거 승리를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문재인 전 후보나 안철수 전 후보처럼 '불려나오는' 모양새로는 승리하기 어렵다. 이제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도전하고, 엄혹한 경쟁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살아남은 사람이 리더가 되고, 후보가 되어야 한다. 무릇 정치결사체인 정당이라면 리더십 경쟁은 상시적으로 무제한 허용되어야 한다. 민주당 내에서는 정치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특정 계파에게 이익이 되는 해괴한 명분으로 정치를 제약하거나 옥죄어서는 안 된다.
지금의 민주당으로는 앞으로서의 선거에서도 승리는 어렵다. 민주당은 더 크고 새로운 국민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민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해서 민주통합당의 출범 때처럼 현존하는 정치세력들이 지분을 나눠 갖는 형태의 통합은 적절치 않다. 새로운 리더십과 새로운 정책노선, 관행 등이 형성되는 혁신의 계기로서 통합이 추진되어야 한다. 통합 속에서 앞으로의 야권을 이끌어갈 새로운 리더와 그룹이 구축되어야 한다.
사실 총선 전에도, 대선에서도 민주당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는 적지 않았다. 듣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 속에 든 원숭이도 호랑이도 아니고 당나귀다." 템플의 이 경구가 이번만큼은 다시 생각나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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