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시인은 지난 17일 서울중앙지법에 최영미 시인과 박진성 시인, 언론사 등을 상대로 10억7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중략) 최 시인은 직접 방송 뉴스에 출연해 원로 시인의 성추행이 상습적이었다고 밝혔고, 한 일간지에는 그가 술집에서 바지 지퍼를 열고 신체 특정 부위를 만져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한 원로 문인의 성추행 파문과, 고발자에 대한 그의 손해배상 소송을 다룬 기사의 일부다. 그런데 기사 중에 나온 '고은 시인은…', '최 시인은…'이라는 표현, 어색하지 않은지? 그나마 고은을 '고 시인'이라고 쓰지 않는 이유는 '고은'이 본명이 아니라 필명이기 때문이겠지만(그의 본명은 고은태다), '최 시인'이든 '고은 시인'이든 이상한 것은 매한가지다.
국립국어원이 정리한 <표준 언어 예절>(2011)은 호칭에 대해 "성(姓), 이름, 성명 뒤에", "직함을 붙여" 부르고 가리킬 수 있다고 권한다. 직함이 없는 경우에는 이름이나 성 뒤에 '선생님', '-씨' 등을 붙일 수 있다고 국어원은 가르친다. 다만 이는 기본적으로 일상 생활에서, 음성 언어를 통해 이뤄지는 의사소통에 대한 조언이다. 말 그대로, 대상자가 눈 앞에 있을 때 그를 '부르는 말(호칭·呼稱)'인 것이다.
문자 언어에서의 제3자 지칭은? 개인적으로 주고받는 편지 따위 사신(私信)은 음성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학계에서 쓰는 학술적인 글에서는 대개 어떤 직함도 없이 이름만 쓴다. 당대의 석학이든, 필자의 지도교수든 논문에서 그의 저술을 인용할 때는 그저 "홍길동, 1999. '논문 제목' <(있다면) 수록 단행본이나 학술지 이름>"과 같이 쓰는 것이다.
법원 판결문도 마찬가지로 이름만 쓴다. 모두가 아는, 아주 유명한 예문을 떠올려 보자. "주문. 피청구인 박근혜를 파면한다." 공공기관의 공문서, 즉 공문에서도 비슷하다. 자기 조직 내의 사람은 보통 직책만 쓰고, 민원인 등 외부 인사는 이름만 쓰는 경우가 많다. 공문은 보통 줄글이 아니라 개조식 문서로 작성되기에 호칭이나 직함이 없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기도 하다.
문제는 언론이다. 언론 기사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표기법은 딱히 확립된 규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최영미 시인", "김영하 소설가", "이강인 선수" 같은 표현을 마치 직함처럼 쓰고, 같은 기사에서 이 인물들이 두 번째 나올 때부터는 아예 '최 시인', '김 소설가', '이 선수'라고 쓴다. '고은 시인은'이라고 쓴 본새대로라면 '도끼 래퍼는'이라고 쓸 수도 있겠고, '최영미 시인은', '최 시인은'이라고 쓴다면 '황치열 가수는', '황 가수는'이라고 쓴 기사도 나오지 말란 법이 없겠다.
'그게 왜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문재인 대통령', '심상정 의원', '김선수 대법관', '김진 변호사'는 괜찮고 시인·소설가·가수·배우·운동선수는 이름(성씨) 뒤에 붙여 부르면 안 된다면 권위주의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다. 그런 문제의식이 의미를 갖는 바도 있으나, 우선 이같은 의문에 대한 '기계적' 답은 정해져 있다. '직업'과 '직함'의 차이다.
직업은 그가 하는 일을 가리킨다. 직함은 그가 처한 위치를 나타낸다. 이를테면, 최근 인기 드라마 속 인물들인 이영준의 직업은 기업집단의 최고경영자(CEO)이고 고귀남의 직업은 회사원이다. 그렇다고 '이 CEO', '고 회사원'이라고는 쓰지도 부르지도 않는다. 직함(직급)대로 '이 부회장', '고 대리'라고 한다.
'권위주의 아니냐'고? 적어도 이런 맥락에서는 아니다. '금태섭 정치인', '금 정치인'이 아니라 '금 의원'이고, '이석구 중장'이지 '이 군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우 공무원', '한태주 경찰관'이라고 하지 않고 '이 사무관', 한 경위'로 쓰는 것과 같다. '김현경 인류학자는', '정희진 여성학자는' 등도 어색하다. '□□학자 아무개 씨'라고 쓰거나, '씨'를 붙이기가 굳이 황송하다면 맞는 직함(박사, 연구원 등)을 찾아 쓸 일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생 김지영 씨', '중학생 심미선 양'이지 '김 대학생', '심 학생'이 아니다.
꼭 월급 받는 직업이 아니어도 그가 맡은 사회적 역할 역시 비슷하다. 예컨대 언론에서 어떤 노동조합의 파업을 다루는 경우, 그 노조의 위원장이야 '김○○ 노조위원장(김 위원장)'이라고 칭하면 될 일이지만 일반 조합원의 경우 '김○○ 조합원(김 조합원)'이라고 표기하면 어색해 보일 것이다. '조합원 김(○○)씨'라고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 소송에서 법률대리인을 맡은 이를 "김 대리인"이라고 쓰는 경우도 나왔는데 "법률대리인을 맡은 김평우 변호사"로 써야 어법에 맞을 것이다. 시민단체 활동가인데 별다른 직함이 없었는지 "김 활동가는", "박 활동가는"이라고 쓴 경우도 종종 있다. '활동가 아무개 씨'면 되지 않을까?
다만 한국의 언어 관행상, 교수·변호사·국회의원 등 일군의 직업에서는 직업 자체가 곧 직함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른바 '좋은 직업'이라고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예컨대 의사, '안중근 의사' 할 때의 의사(義士)말고, 병 고치는 의사(醫師)는 '김 의사', '박 의사' 하는 식으로 쓰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직업=직함'인 것은 주로 일정한 자격을 취득하는 전문직이나, 직책이 법규로 보장된 공직(선출직) 관련 직군에서 흔한 현상이다. 앞에서 '기계적'으로 미뤄뒀던 권의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유효할 수 있다. 왜 어떤 직업군에서만 '직업=직함'이 되는가 하는 의문이 나올 법하다.
매사가 딱 떨어지지 않듯, 좀 애매한 경우도 있다. '작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입말로 '유 공무원님', '고 회사원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우리이지만, '김 작가님' 같은 호칭은 이제 어느 정도 통용된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자신을 '작가'로 자처하면서 기사문에도 '유시민 작가는', '유 작가는'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이제는 딱히 틀렸다고 하기에도 주저된다. 주로 방송국에서 '작가'라는 지위가 직함처럼 통용된 영향일지 모르겠다.
이달 초 김복득 할머니 별세 당시 등 고령의 위안부 피해자 여성을 다룬 기사에서는 '김복득 할머니는', '김 할머니는' 등의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이는 좀 예외적인 경우다. '할머니'는 'halmoni'라는 철자로 <인디펜던트> 같은 외신에도 나왔고, 위키피디아 사전에도 실렸다. 그러나 '김 할아버지는', '김 아저씨는', '김 아주머니는' 같은 표현이 어색한 것을 보면, 이런 식의 표현이 원칙이 될 수는 없고 그야말로 예외라고나 할 것이다.
원칙을 정하기도 복잡하고, 자칫 권위주의적으로 보이기도 하니 아예 언론 기사에서 직함을 전부 없애자는 주장도 없지 않았다. 올해 6월 한국어문기자협회 주최 세미나에서도 '누구에게나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것으로 지칭어를 통일하자'는 안이 제시되기도 했다. (<한국일보> 2018.7.8. '우리말 톺아보기 - 호칭어와 지칭어')
하지만 지난해의 '김정숙 씨 논란'에서 보듯, '씨'라는 표현을 별반 높임말로 여기지 않는 정서가 널리 있기에 이는 쉽지 않을 터이다. 사실 '씨'라는 표현도 "공식적·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는 윗사람에게 써도 무방하다고 우리 국어사전은 정해두고 있다. 하지만 작년에 영부인을 '김 씨'라고 했다고 꽤 많은 이들이 화를 냈는데, 멀쩡한 직함을 두고 '대통령 문재인 씨(문 씨)'라는 표현이 기사문에 등장하는 일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없을 듯하다.
결론.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두 갈래다. 첫째,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에, 암묵적일지언정 구성원들의 합의가 없다면 기존의 원칙을 가급적 지키는 것이 옳다. 이 경우에라면, 직함이 있는 사람은 성명 또는 성씨 뒤에 직함을 붙이고, 별도의 직함이 없는 직업에 종사한다면 '시인(의사) 아무개 씨', 직업 자체가 없다면 그저 '아무개 씨'라고 쓰는 것이 다수 언중(言衆)에게 익숙한 안전한 표현일 것이다.
둘째, 그러나 언어는 "그 자체로 사회적 무의식"(손아람, 2017.8.30. <한겨레>)의 반영이고 우리의 생각을 담는 틀이기도 하다. 불평등 등의 구습이 반영된 언어 관습은 그래서 교정돼야 한다. 사회적 합의를 거치거나 그 이전 단계인 '운동'의 차원에서라도 직함을 없애는 새로운 법도를 만들거나, 직함이 없는 직업에도 적용할 수 있는 좋은 표현을 함께 만들고 찾아 보자고 감히 제안한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상반된 원칙들이다. '기레기'라는 욕을 먹거나 하기는 쉽겠지만,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기는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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