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에서 청년 세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선거에서 20~30대의 표심은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거론되고 정당마다 경쟁적으로 청년 공약을 내놓기도 했지만, 최근 지자체 선거에서 나타난 2030 세대의 투표 성향은 정치권에 작지 않은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집권 여당에서 청년 최고위원직을 비롯한 청년 대표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부상하고, 정부 차원에서도 전향적인 청년 정책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청년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논의는 청년을 일자리와 주거, 결혼과 출산, 복지정책의 대상자로 바라본다. 물론 지금의 청년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있음은 부정할 수 없고, 그만큼 정책적 배려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청년을 정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으로는 청년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적 주체이기도 함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 젊음이 가지는 역동성과 주체성은 항상 배후로 물러난다.
이 같은 한계는 청년 세대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에서도 확인된다. '이대남' 현상을 위시해 청년 남성의 우경화 혹은 탈정치화가 우려 내지 비판의 시각에서 거론되고, 세대 내부에 존재하는 '젠더갈등'이 이 세대의 성격을 규정하는 본질인 양 해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극우적 현상이 청년 전체의 정치적 성격으로 일반화되기도 한다.
이러한 접근이 2030과 관련된 현상의 일부를 반영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전부도 아니거니와, 기본적으로 오늘의 청년을 과거 산업화세대나 민주화세대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데 머물기 일쑤다. 2030을 하나의 세대로서 바라보자면, 그들이 함께 처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고 공통의 의식과 문화를 형성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축소사회에서 형성된 2030 세대
오늘의 2030은 어떤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 세대인가? 이들은 그 직전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민주화 세대와는 달리 한국 사회가 저성장과 저출산,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불평등의 심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 성장한 첫 세대이다. 성장기에 이들은 윗세대의 팽창기와는 딴판인 세상에서 미래가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근대적 낙관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오히려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사회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신자유주의적 경쟁체제는 이들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규정했다. 축소되는 기회구조 속에서 대학입시에서 취업까지, 승진에서 주거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과정이 경쟁으로 조직되었고, 실패는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됐다. 학벌과 스펙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협력과 공생보다 경쟁을 기본적인 삶의 방식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공정성에 대한 2030 세대의 민감성도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것이다. 능력주의를 신봉해서라기보다 기회가 줄어든 사회에서 최소한 경쟁의 규칙만은 공평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경쟁을 앞세우면서 역설적이게도 공정한 경쟁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출발선부터가 계층에 따라 다르고, 양극화는 심화하고 부는 세습되며, 교육기회는 불평등하게 배분된다. 대학 서열체제와 수도권 집중은 경쟁을 더욱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고 있다. 청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양극화가 심화되는 구조 속에서 공정은 실현될 수 없다.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청년들의 분노와 좌절은 이 모순에서 비롯한다.
대통령의 청년 인식과 역사적 주체로서의 2030
청년 문제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이들을 '구조의 희생자'로 지칭하는 이재명 대통령의 최근 발언들이 주목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최근 국무회의에서 이대통령은 반도체 산업 호황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그 성과에서 가장 소외된 계층이라고 언급한다. '안정적 일자리 부족'과 '자산 형성 기회의 상실'을 청년 세대의 핵심문제로 지적하면서 정부가 이를 뼈아프게 받아들이고, "청년의 삶 전 영역에서 기회의 사다리를 확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다른 자리에서는 청년들의 이같은 곤경이 "소위 능력주의의 착각이다. 사실 공평하지 않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불평등한 경쟁구조 자체를 문제 삼았다. 대통령의 시각은 문제를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존의 이념 잣대가 아니라 사회적 기회의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사줄 만하다.
그러나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가? 청년을 희생자로 규정하는 것은 절반의 진실에 머문다. 청년은 분명 구조적 희생자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온 정치적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2030 세대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촛불혁명이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교과서가 아니라 광장에서 배운 세대이다. 청년세대의 새로운 정치문화는 이명박 정부 시기 촛불집회에서 그 징후를 보였고 이후 두 번의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일어난 촛불혁명 및 빛의 혁명 현장의 중심에는 어김없이 2030 세대가 있었다.
특히 최근 내란 사태에 맞선 탄핵촉구 집회에서 응원봉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위 양식은 기존의 정치 문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실천하는 새 세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디지털 플랫폼과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한 자발적 조직화, 농민과 노동자 등 다양한 사회세력과의 자연스런 연대는 청년의 정치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표현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대한 역사적 국면에서 촛불혁명의 주체로서의 경험이야말로 오늘날 청년세대의 정치적 감수성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자산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일부의 극우화라든가 '젠더갈등'만을 근거로 청년 세대를 설명하는 것은 협소한 시각으로, 이들이 보여준 민주주의적 소양과 역량을 지워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내란으로 촉발된 민주주의의 위기 국면에서 헌정질서를 지키는 중요한 사회적 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청년들의 참여였다는 사실은 결코 일과성으로 볼 수 없는 중대한 시대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오늘의 2030 세대를 이해하는 방식은 '삼포세대'와 '촛불세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두 모습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세대가 지닌 이중적 성격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와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창조하는 정치적 주체다.
'젊음의 정치학'의 복원을 주창하며
최근 대학문제연구소는 '2030 세대, 젊음의 정치학과 대학문제'라는 제목의 연속포럼을 시작했다. 이 기획은 청년 정치나 청년 정책의 차원을 넘어서 청년 세대를 새 시대를 열어가는 역사적 주체로 호명하기 위한 시도다. 청년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청년을 정책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한, 청년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여건을 일부 개선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에게 잠재된 미래 전망과 사회 변혁의 가능성은 보지 못한다. '젊음의 정치학'은 청년을 사회변화의 주체로 다시 위치시켜 민주주의를 새롭게 실천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사적 역량에 주목하고자 한다.
청년들을 위해 기회의 사다리를 복원하고 일자리와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청년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민주주의적 경험이 대학과 지역사회, 일터와 일상 속에서 성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대학을 다시 공론장의 공간으로 복원하는 일을 비롯하여 극단적 경쟁 대신 협력과 연대를 학습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확대하고, 불평등한 구조를 개혁하여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희망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청년 정책이라고 할 것이다.
2030 세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단순히 한 세대를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청년을 정책의 대상으로만 보는 낡은 시각을 넘어, 구조적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품은 역사적 주체로 바라보는 새로운 세대 인식이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한국 사회가 요청하는 '젊음의 정치학'의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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