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인문사회 없이 'AI 3대 강국'도 '소버린 AI'도 불가능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인문사회 없이 'AI 3대 강국'도 '소버린 AI'도 불가능하다

[대학문제연구소 논평] 고등교육 정책의 전환을 이끌 기폭제를 만들자

지난 11일 한국연구재단이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A, B형의 예비선정 결과를 발표하자 인문사회 연구자들 사이에서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앞서 김강기명 교수는 인문사회 학술예산의 상대적 위축 탓에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이하 '학술연구교수')의 선정률이 고작 20% 정도임을 지적하며, 인문사회 예산은 정체되어 있는데 지원사업 항목이 늘어나 선정률이 10% 미만으로 떨어지는 사업들도 있다고 말한다. 그가 꼬집고 있듯이 "열 편 중 아홉 편을 떨어뜨려야 하는 심사는 (중략) 우수한 연구계획서 사이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연구계획서 다수를 어떤 식으로든 탈락시켜야 하는" 끔찍한 작업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당장 추가경정예산이라도 100~200억을 편성해 올해의 학술연구교수 선정률을 최소 30%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문사회 학술연구자의 심각한 위기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국가재정법 51조 2항의 2('해당 회계연도 중 시급하게 지출할 필요성이 있을 것')를 적용해 정부 예산의 예비비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예비비 지출이 추경보다 차라리 더 용이하고 타당하다고 믿지만, 관건은 정부와 청와대의 정책 의지다.

탄생 1년이 코앞인 지금 국민주권정부는 교육 분야에서 국민이 믿고 지지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가 군사정권의 학교 문화 일신, GNP 5%의 교육재정 확보 등의 획기적 목표를 설정했던 1995년의 '5·31 교육개혁' 후 30년 넘도록 변화한 현실을 따라갈 새 교육개혁의 청사진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유·초·중등교육에서 대학교육과 평생교육에 이르기까지 우리 교육은 지난 수십년 동안 누적된 폐단들을 어느 것 하나 손쉽게 해결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해 있다. 문재인 정부 막바지에 사회적 합의기구로서 '국가교육위원회'를 신설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지만, 윤석열 정부가 등장해서야 출범한 1기 국가교육위원회는 3년 동안 시간만 허비했다.

'5·31 교육개혁'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지만, 적어도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시장만능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대학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이 정책 방향은 역대 정부에서 의미있는 전환을 이룬 적이 없다. 지난 4월 교육부가 발표한 주요한 고등교육 정책 두 가지는 그 방향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잘 보여준다. 윤석열 정부의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약칭 라이즈)의 문제를 개선했다는 '지역성장 인재양성체계'(약칭 앵커)와 대선 공약이었던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구체화시켰다는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은 명칭부터가 서로 헛갈릴 정도로 '성장'과 '인재'에 관한 일방적인 방향 설정에 기울어져 있다. 기초학문으로서의 인문사회 분야는 구색맞추기로 언급될망정 기본적으로 정부 정책의 지원 대상이 아니라는 의심마저 든다.

'앵커'는 국정과제 55-2항의 '지역산업과 국립대-사립대 동반성장을 위한 RISE체계 재구조화'를 실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학들이 지역 산업과 지방자치단체장의 요구에 쉽게 휘둘리게 될 위험한 시스템을 내장하고 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사업이라는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은 9개 거점국립대 중에 올해 3개 대학만 선정하여 집중지원하는 방식 자체가 거점국립대가 국립대로서 지녀야 할 공공성과 자율성에 대한 고민은 도외시한 채 성과주의, 경쟁주의의 틀을 강화하고 있다.

교육부의 발표자료에서 '학부과정 대학-기업 일체화 운영 혁신 해외사례'로서 소규모 기업대학인 영국의 '다이슨 공과대학'과 '롤스 로이스 학위도제제도'를 언급하는 것을 보며 나는 분노 이전에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벌써 거점국립대들 사이에서는 올해 뽑는 3개 대학에 선정되기 위해 교수들에게 무리한 연구실적 강화만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 시절에 요란했던 영어 강의 비율 늘리기까지 운운한다는 풍문이 들린다. 이 사업들은 '5극 3특'이라는 국토균형발전 정책에 부응하는 외관을 띠면서도 실제 내용은 기업과 산업, 성장과 성과, 인재와 취업 같은 어휘에만 매몰된 근시안적인 정책이다.

국민주권정부의 고등교육 정책은 전면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분명히 국정과제에는 'AI 인재 양성의 기반인 기초학문 및 인문학 교육 확대'(99-5)가 명시돼 있다. 지난달 22일 내가 사회자로 참여한 인문사회총연합회 주관의 국회 토론회가 '인문사회 강국 구현이 AI 강국의 지름길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진행된 이유 역시 정부 정책에 부응하며 올바른 방향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지역성장 인재양성체계'(앵커)와 '성장엔진 연계 지역인재 양성방안'(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주요 정책의 계획안에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진지한 육성 계획은 없다. 박정희 정권 이래 '과학(기술)입국'만 강조하면서 인문사회 분야의 균형발전은 외면했던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으며, 지역산업에 기여하는 인재양성이라는 단선적 비전에 눌려 앞의 국정과제 99-5항은 간단하게 무시되고 있다.

인문사회 강국 없이 정부의 가장 큰 국정 목표인 'AI 3대 강국'은 불가능하다. 또 인문사회 강국을 향한 정책 없이는 이른바 '소버린 AI' 구축도 어렵다.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낭떠러지에 몰려 한국어 학술 생태계가 위기에 빠진 탓에 인공지능이 학습할 질 높은 한국어 '데이터'와 '콘텐츠'가 원활하게 생산되지 않는데 대체 어떻게 내실있는 독자적 인공지능 개발이 가능할까. 더구나 서유럽 등의 학문 선진국과 달리 국가의 정책 기조로서 오픈액세스와 오픈사이언스 원칙을 소홀히 한 탓에 기존의 학술 정보와 성과에 대한 접근성 보장도 미미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인문학과 비판적 사회과학의 개입 없이는 AI 자율살상무기가 전장에서 무차별로 사용되는 것을 포함하여 기술 발전이 재앙이 될 위험이 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엊그제 교황 레오 14세가 AI를 '무장해제'해야 한다는 강한 표현을 쓰며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지 민감하게 대응할 실질적 역량을 길러야만 진정한 인문강국, 문화강국이 가능하다.

탄탄한 인문사회 학문에 기반한 AI 강국을 바라보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예비비를 쓰거나 2차 추경으로 올해의 학술연구교수 선정률을 높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최소한 100~200억원을 마련해 학술연구교수 B형(연 2천만원 지원)을 500~1,000명 정도 추가 선발해 올해 선정률을 30% 이상으로 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A형도 추가 선발하는 방안은 앞서 B형에 선정된 연구자들이 다시 A형에 신청해 선정될 경우 B형를 포기하는 복잡한 사례가 생기는 등 행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임시방편의 성격이 강한 이런 결정으로 한국연구재단의 행정력에 부하가 걸리고 내년 예산 증액과 신규사업 추진에도 혼선이 빚어질 위험이 없지 않다. 그러나 곧 5월 31일까지 각 중앙부처의 내년도 예산요구안이 계수 조정을 위해 기획예산처로 넘어갈 시점에서 교육부의 인문사회 예산안이 또다시 현재 수준이라면, 인문사회연구자들은 지체없이 한목소리로 나서서 내년도 예산 증액은 물론이고 올해도 예비비 사용 등 비상한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이런 움직임은 올 여름 동안 기획예산처의 예산 조정과정에서 인문사회 예산의 대폭 증액 필요성을 사회적·정치적으로 환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청와대의 사회수석과 교육비서관도 이 절박한 문제에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야 한다. 자연스럽게 학술연구교수 제도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전반의 대혁신으로 갈 주요 과제들도 동시에 부각됨으로써 고등교육 정책의 방향 전환을 이끌어 낼 효율적인 기폭제가 될 수 있다.

만약 이번 여름 동안의 정책 전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획예산처가 확정한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일정대로 오는 9월 2일에 국회로 넘어갈 때 여전히 인문사회 예산의 대폭 증액이 없거나 올해 학술연구교수의 선정률을 높일 재정 투입이 외면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강기명 교수의 말대로 인문사회 연구자들이 단결하여 물러서지 못할 싸움을 시작하는 길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글은 국가교육위원회의 공식 의견이 아니라 개인 의견임을 밝혀둡니다.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 더플라츠에서 열린 'AI콘텐츠 페스티벌'에서 참관객들이 AI 아티스트 커뮤니티 작품들을 관람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