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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부모 앞 "그래도 가족만한 게 없다"는 말, 언제까지 유효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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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부모 앞 "그래도 가족만한 게 없다"는 말, 언제까지 유효할까

[서리풀연구通] 부모가 아플 때 가족의 결속에 대한 연구

'그래도 가족만한 게 없다.'

부모가 아프기 시작하면 자주 들리는 말이다. 정부 정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설이 모자라는 곳에서, 자식들은 모여 어떻게든 해낸다. 더 흥미로운 풍경은 외부 자원이 작동하는 자리에서도 펼쳐진다. 요양보호사가 매일 들르고 시설에 부모를 모시는 상황에서도 "그래도 자식이 직접 챙겨야지"라는 말은 어김없이 따라붙는다. 외부의 손길은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 돌봄의 중심에는 늘 가족이 있고, 또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감각. 이것이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돌봄의 풍경이다.

가족사회학자들은 이 풍경에 이름을 붙였다. 부모의 건강이 무너질 때 가족이라는 체계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는 능력을 가족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자녀들은 역할을 재분담하고, 자원을 다시 모으고, 관계를 다시 짠다. 위기 앞에서 가족은 적응하는 체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풍경의 정체를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질문이 떠오른다. 가족이 위기를 극복한다고 할 때, 그 극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모든 종류의 아픔에 가족은 똑같이 움직이는가. 오늘 소개할 논문은 이 두 질문을 정밀하게 추적했다(☞논문 바로가기: 전략적 가족 회복탄력성: 노부모의 건강 악화와 다자녀 중국 가족의 세대 간 관계 변화). 그리고 우리는 그 답을 따라가며 논문이 답하지 못하는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더 마주하게 된다. 자녀가 줄어드는 시대, 이 회복은 언제까지 가능할까.

무엇을 '가까운 관계'라 부를 것인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매주 전화하지만 마음 속 이야기는 하지 않는 자녀, 일 년에 두어 번 보지만 만나면 서로의 모든 것을 아는 자녀, 매달 생활비를 부치지만 정작 마주 앉으면 어색한 자녀…. 자주 만나는 자녀가 가장 가까운 자녀라고 단정할 수 없고, 돈을 가장 많이 보내는 자녀가 부모를 가장 사랑하는 자녀라고도 할 수 없다.

학계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여러 차원의 결합물로 본다. 얼마나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지(교류), 정서적으로 얼마나 가까운지(친밀감), 돈과 돌봄을 얼마나 주고받는지(기능적 교환) 같은 차원들이다. 문제는 이 차원들이 늘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송금이 잦다고 정서적으로 가까운 것은 아니며, 많은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오히려 더 큰 긴장과 부담을 낳기도 한다. 자녀가 여럿일 때는 더 복잡하다. 어떤 자녀와는 가깝고, 어떤 자녀와는 멀고, 어떤 자녀에게는 돈을 보내고, 어떤 자녀에게는 받는다.

연구진은 중국 노화사회 종단조사(China Longitudinal Aging Social Survey)의 4개 연도(2014, 2016, 2018, 2020) 자료를 활용해, 자녀가 둘 이상인 가족의 50세 이상 노인 5281명을 추적했다. 관계를 측정할 때는 앞서 언급한 친밀감, 기능적 교환, 교류라는 세 차원을 모두 포착하기 위해 총 아홉 개의 지표를 사용했다. 이를 군집 분석을 통해 다섯 가지 관계 유형으로 분류했다. 거의 모든 차원에서 낮은 '소원형', 도움은 오가지만 정서적으로 차가운 '갈등형', 정서적으로 가깝지만 실질적 교환은 적은 '독립형', 도움과 만남이 활발한 '호혜형', 그리고 모든 차원에서 높은 '긴밀형'이다.

이 틀 속에서 연구진은 부모의 건강이 무너진 뒤, 자녀들 중 가장 가까운 자녀와의 관계, 가장 소원한 자녀와의 관계, 그리고 그 자녀들 사이의 격차가 각각 어떻게 변하는지 함께 살폈다.

가까워졌다, 그러나 마음이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부모의 신체 건강이나 인지 기능이 나빠진 뒤, 자녀들 중 부모와 가장 가까운 자녀는 더 긴밀해지는 경향이 뚜렷했다. 아프기 전의 관계가 어떤 관계 유형이든, 부모의 건강이 무너진 뒤에는 절반에 가까운 사례에서 '긴밀형'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같은 시기, 자녀들 사이 관계 유형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가장 가까운 자녀와 가장 소원한 자녀 사이의 거리가 더 멀어진 것이다. 가족 전체가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한쪽에서는 다가가는 자녀가 생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거리를 두는 자녀가 생기면서 자녀 사이의 분화가 커졌다. '가족이 위기에 단단해진다'는 풍경은 들여다보면 자녀 사이의 역할 분담이 선명해지는 풍경인 것이다. 논문은 이를 가족이 위기 앞에서 펼치는 '전략적'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더 인상적인 발견은 그 안을 들여다볼 때 드러난다. 관계가 '긴밀형'으로 옮겨갔다고 했지만, 그 변화를 차원별로 뜯어보면 정서적 친밀감은 거의 늘지 않았다. 늘어난 것은 자녀가 부모에게 보내는 송금, 도와주는 가사 빈도, 직접 만나는 횟수, 전화나 메신저로 연락하는 빈도였다. 부모와 자녀가 마음으로 더 가까워졌다기보다는, 자녀가 더 자주 돈을 부치고 더 자주 들리고 더 자주 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소원한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송금과 만남은 늘었지만, 정서적 거리는 오히려 더 멀어졌다. 가족은 분명히 위기 앞에서 다시 묶였지만, 그 묶임을 만든 것은 마음이 아니라 손과 돈이었다.

연구진은 자녀의 성별 격차에 대한 잠정적인 답을 제시한다. 같은 분석을 딸이 있는 가족과 아들만 있는 가족으로 나눠보면, 변화는 딸이 있는 가족에서 훨씬 뚜렷했다. 부모의 신체나 인지 기능이 무너졌을 때 가장 가까운 자녀가 '긴밀형'으로 옮겨갈 확률은 딸이 있는 가족에서 절반을 훌쩍 넘었지만, 아들만 있는 가족에서는 눈에 띄게 낮았다. 가족이 위기를 극복했다고 할 때 그 극복은 결국 딸이 있는 가족에서, 그리고 대개 딸들의 손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마음이 무너질 때, 가족은 움직이지 않는다

이 회복탄력성에는 또 다른 사각지대가 있다. 부모의 어떤 아픔 앞에서는, 딸이 있는 가족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그 사각지대는 정신건강이다. 앞서 본 모든 변화는 부모의 신체 건강이나 인지 기능이 나빠졌을 때의 이야기였다. 부모가 우울증을 앓거나 정서적으로 무너진 경우 자녀와의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자녀의 관계 유형은 그대로였고, 자녀 사이의 격차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차원별로 뜯어봐도 비슷했다. 정서적 친밀감은 오히려 줄었고, 송금은 미세하게 감소했으며, 연락 빈도만 살짝 늘었다. 가족은 부모의 우울 앞에서 좀처럼 다시 묶이지 않았다.

더 인상적인 것은 반응의 임계점이다. 신체나 인지 기능은 사소한 악화에도 관계 유형이 바뀌었지만, 정신 건강은 심각한 수준으로 무너져야만 관계가 겨우 움직였다. 부모의 몸이 조금만 약해져도 가족은 즉각 움직이는데, 부모의 마음은 한참을 무너져 내려야 비로소 가족의 시야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논문은 이 차이를 유교문화권의 정신건강 낙인으로 설명한다. 정신건강 문제는 가족 전체의 도덕적 결함이나 유전적 결함으로 여겨지기 쉽고,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말하지 못하고 자녀는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전문적 도움을 청할 자원도 부족하다. 결국 부모의 우울은 가족 안에서도, 가족 밖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 머문다.

한국의 풍경도 다르지 않다. OECD 노인 자살률 1위라는 통계 뒤에는 보이지 않는 우울이 있다. "그 나이엔 다 그렇지"라는 말이 노인의 정서적 고통을 정상화하고, 노인 정신건강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낮다. 가족 회복탄력성이 작동하는 영역과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은, 곧 사회가 어떤 아픔을 돌봄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어떤 아픔을 외면해왔는지를 그대로 비춘다.

이 풍경조차 사라지고 있다

이 논문이 분석한 가족은 모두 자녀가 둘 이상이었다. 자녀가 여럿이니 누군가는 돈을, 누군가는 가사를, 누군가는 만남을 나눠 맡을 수 있었다. 딸이 있다면 그 분담은 더 잘 작동했다는 것 역시 보였다. 그러나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 중국도 1명 아래로 떨어진 지 오래다. 외동 자녀에게는 분담할 형제가 없고, 비혼이거나 무자녀인 노인에게는 자녀 자체가 없다. '전략'이 가능한 가족의 형태 자체가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노인들은 누구의 사적 안전망 위에 놓이게 될까. 최근에는 혈연을 넘어선 돌봄 네트워크에 대한 논의도 늘고 있다. 비혼 여성 간의 상호 돌봄, 친구 돌봄, 지역 공동체 같은 형태들이다. 의미 있는 시도지만, 이 흐름들이 공적 돌봄을 확장하는 대신 그 빈자리를 메우는 대안으로 호명되는 일이 반복된다.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이 떠맡아온 책임이, 친구나 이웃이라는 또 다른 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뿐이다. 책임을 지는 사람이 바뀌었지만, 그 책임이 여전히 사적인 관계망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바뀌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줄어드는 사적 안전망을 공적 안전망이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송금도, 가사도, 잦은 방문도, 마음의 무너짐을 알아차리는 일도, 그동안 사적 관계망 안에서 처리되어야 한다고 여겨졌던 그 모든 일이 정말 가족과 사적 관계망의 몫이어야 했는가다. 부모가 아플 때 누군가의 손과 돈으로 가족이 다시 묶이는 풍경은, 사실 사회가 비워두었던 자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서지정보

Zhang, Y., Gong, J., Tang, T., & Li, T. (2025). Strategic family resilience: health declines and intergenerational relationships in multi-child Chinese families. Social Forces, soaf214. https://doi.org/10.1093/sf/soaf214

▲지난 8일 서울 동대문구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열린 어버이날 잔치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어르신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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