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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와 핸들이 바꾼 역사: 힌츠페터와 김사복, 두 남자의 광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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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와 핸들이 바꾼 역사: 힌츠페터와 김사복, 두 남자의 광주행

[기고] 총성 앞에서 카메라를 든 독일인, 봉쇄선을 뚫고 핸들을 잡은 실향민

1980년 5월의 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6년 5월 12일 밤, 국회의원회관 대강당에 사람들이 모였다. 제4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 다큐멘터리 상영회였다. 스크린에는 46년 전의 광주가 흘렀다. 누군가는 눈물을 닦았고, 누군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관람객 가운데는 계엄군 특전사 출신도 있었다. 평생 가슴에 돌을 안고 살다가 광주단체에 사죄하러 온 분들이었다. 역사란 이렇게, 오래도록 산 자들의 몸속에서 계속 살아 숨 쉰다.

그날 상영된 것은 《5.18 힌츠페터 스토리》. 두 남자의 이야기다. 한 명은 독일 공영방송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1937~2016), 또 한 명은 서울의 호텔 택시 기사 김사복(1932~1984). 영화 〈택시운전사〉(2017)의 실제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영화보다 실제가 더 극적이고, 실제보다 현재가 더 아프다.

푸른 눈이 본 것, 한국 눈은 보지 못한 것

위르겐 힌츠페터는 193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의사를 꿈꿨으나 결국 카메라를 들었다. 1963년 독일 제1공영방송 함부르크 지국에 들어가 일본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80년 5월 어느 날 동아시아 선교사 파울 슈나이스 목사로부터 짧은 소식을 들었다. "광주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언론은 아무것도 전하지 않고 있었다.

정상적인 취재허가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그는 관광객으로 위장해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잠입했다. 봉쇄된 도시 안에서 그가 본 것은, 총에 맞아 쓰러진 젊은이들, 피를 흘리며 복도에 누운 부상자들, 자식을 잃은 부모들.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눈물이 나서 몇 번이나 촬영을 멈춰야 했다고 나중에 증언했다.

5월 23일, 철수하면서 그는 필름 캔을 고급 과자통 안에 숨겼다. 검문을 통과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일본사로 영상을 보냈다. 독일 제1공영방송은 즉각 방영했고, 세계 각국 언론이 이를 받아 보도했다. 1980년 5월, 한국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지구 반대편에서 광주의 진실이 울려 퍼졌다.

그해 9월 그는 김대중 사형판결에 항의하는 의미로 《기로에 선 한국》이라는 45분짜리 기록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상은 훗날 1980년대 중반 전국 성당과 대학가에서 비밀리에 상영되며 1987년 6월 항쟁의 불씨 중 하나가 됐다. 한 외국인 기자의 필름이 한국 민주주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아이러니인지, 당연한 귀결인지.

힌츠페터는 1986년 광화문 시위취재 중 사복경찰에게 맞아 목과 척추를 크게 다쳤다. 그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취재하다가 그 나라 경찰한테 얻어터진 것이다. 1995년 은퇴 후 독일에서 지내다가 2016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8세. 그의 유언은 "광주에 묻어달라"였다. 광주시는 관련 조례를 고쳐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담은 추모비석을 5.18 망월동 구묘지에 안장했다. 죽어서야 광주 시민이 된 독일인 기자.

고급 세단으로 봉쇄선을 뚫은 실향민 사내

김사복은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홀로 월남한 뒤, 배에 탄 부모님은 사고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고아가 된 그는 부산에서 고모 슬하에 자라 서울로 올라와 호텔 택시 기사가 됐다. 외국어를 즐겨 배웠고, 함석헌·장준하 같은 재야인사들과도 교류했으며 '사상계'를 즐겨 읽는 사람이었다. 그냥 기사가 아니었다.

1980년 5월, 그는 힌츠페터를 만났다. 광주 봉쇄 소식을 들은 힌츠페터가 택시를 잡아탄 것이다. 거짓말이 필요했다. "독일사업가인데, 광주에 있는 동료를 데리러 가야 한다." 계엄군 검문소에서 이 말이 먹혔다. 고급 세단 차량이라 함부로 수색하기도 어려웠다.

총성이 울리는 도시 안으로 그는 핸들을 돌렸다. 거창한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아들 김승필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나중에야 "눈앞의 사람이 가야 한다고 하니 데려다 줬을 뿐"이라고 했다. 영웅을 자처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김사복은 1984년 12월 19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 광주 동행 사실을 군부독재 시절 아들에게 몇 번 이야기했지만, 세상은 아직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힌츠페터는 한국에 올 때마다 그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못 만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 두 사람은 2016년과 2024년에야 각각 5.18 묘역에서 이웃이 됐다. 생전에는 이루지 못한 재회를, 죽어서야 이뤘다.

필름 캔 하나, 핸들 하나, 그리고 지금

1980년의 광주를 세상에 알린 것은 거대권력이 아니었다. 한 명의 외국인 기자와, 한 명의 택시 기사였다. 카메라 하나, 고급 세단 한 대, 그리고 총성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은 두 사람의 판단.

지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2025년 12월 3일 밤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이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국회에서는 '힌츠페터법', 5.18 진실 규명에 기여한 외국인 기자·보도자에 대한 예우를 담은 법안이 소위원회에 올라가 있다. 발포명령의 실체와 책임구조는 46년이 지난 지금도 "규명 불능"으로 남아 있다.

총이 아니라 정보왜곡으로, 권력이 아니라 침묵으로 진실을 억누르는 방식은 시대를 바꿔가며 이어진다. 일부세력은 여전히 5.18을 폄훼하거나 아예 없었던 일인 양 부정하려 든다. 2024년 계엄사태를 경험한 뒤 우리는 알았다. 민주주의는 한 번 얻으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힌츠페터는 카메라를 들었고, 김사복은 핸들을 잡았다. 그들이 그날 선택한 것은 개인의 목숨보다 눈앞의 진실이었다. 우리에게는 오늘의 선택이 있다. 침묵하는 것도 선택이고, 말하는 것도 선택이다. 외면하는 것도 태도이고, 기억하는 것도 태도이다.

광주의 진실은 46년이 지나도록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필름 캔 하나를 과자통 안에 숨겨 국경을 넘긴 한 독일인의 기자 정신과, 봉쇄된 도시를 향해 핸들을 꺾은 한 실향민 기사의 인간적 결단 덕분에, 우리는 최소한 묻고 또 물을 수 있게 됐다.

역사는 영웅이 만드는 게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물러서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다. 힌츠페터와 김사복이 그 증거다. 그들이 남긴 질문이 오늘도 살아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힌츠페터 스토리> 영화 포스터의 일부 ⓒ 힌츠페터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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