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는 이번 전시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반헌법행위자열전 발간을 기념하는 전시로 기획되었는데, 책 출간이 늦어져 ‘출간 예고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책 출간이 늦어진 탓에 전시 준비 과정에서 주용성 작가와 박만우 선생에게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사과하면서, “수십 번의 준비모임을 빼고도 매주 정례회의를 전시를 개막할 때까지 517차 가졌다”고 밝힌다. 이처럼 <반헌법행위자열전>은 10여 년에 걸친 집요한 조사와 토론,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 시민 후원자들의 인내 위에 세워진 결과물이다.
한 교수는 한국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피해자 중심으로만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원자료에 뻔히 이름이 나와있는데도 국가기관의 보고서에는 대부분 OOO으로 되어있습니다. 몰라도 OOO, 알아도 OOO입니다.” 가해자의 이름을 부르는 작업이야말로 진정한 위령과 애도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름이 지워진 진실은 불완전하며, 그 이름을 복원해야만 역사가 완성된다. 그는 “한국 현대사는 그들을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 못했지만, 이제 21세기의 민주시민들은 그들을 역사의 법정에는 반드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프로젝트가 ‘역사의 법정’에 가해자들을 세우려는 첫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국가폭력의 얼굴을 드러내다
주용성 작가는 이번 전시 기획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번 전시는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유린하고, 권력 유지와 체제 안정을 위해 이념을 무기화했던 국가 권력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간첩조작 사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그리고 일상에 스며든 반공교육을 모두 같은 폭력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본다. 국가는 ‘적’을 만들어내고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켰으며, 교육·언론·사법체계를 총동원해 국민을 길들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개인은 체제의 희생양이 되었고, 가족들은 수십 년간 침묵을 강요당했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서울 온수동의 작은 전시공간 ‘스페이스99’다.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가 20년 넘게 추진해온 과정에서 만들어낸 이 공간은 국가폭력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상설 전시공간으로서의 첫걸음이다.
한홍구 교수는 “평화박물관을 꿈 꿀 때에 비하면 이제는 평화의 수많은 영역 중 국가폭력 문제로 전시방향을 좁히게 되었다”고 밝히며, 앞으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공간으로 꾸려갈 계획임을 강조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국가폭력의 실체와 그로 인한 개인과 공동체의 상처를 보여주는 데에는 충분한 울림이 있다.
309명의 이름, 12권의 기록
<반헌법행위자열전>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헌법을 파괴하거나 유린한 공직자 309명의 행적을 12권에 걸쳐 기록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2015년 7월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2017년 405명 명단을 발표하고, 2018년 1차 보고회를 개최했다. 이후 코로나19와 재정난, 인력 부족 등을 겪으면서도 편찬위원회는 자료를 재검토하고 60여 명을 제외하는 대신 17명을 추가하여 최종 309명을 확정했다.
2025년에는 대통령 편 1권, 판사 편 1권, 검사 편 2권 등 4권을 출간하고, 2026년까지 12권 전권을 완간할 계획이다. 각 권은 750~800쪽 분량으로, 이승만 정권부터 노태우 정권까지 주요 국가폭력 사건의 수괴와 책임자들의 행적을 상세히 기록한다. 한홍구 교수는 “민간인학살 희생자가 최소 30만 명임을 고려하면, 우리가 이름을 부른 60여 명은 5천 명당 1명꼴”이라며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전시 공간에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당시의 사진, 뒤늦은 유해발굴 장면, 간첩조작 사건 기록, 1960~80년대 반공교육 자료 등이 전시된다. 화려한 국풍81, 서울올림픽 등의 국가 주도 행사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권력이 폭력과 모순을 은폐하기 위해 어떻게 ‘국가적 축제’를 동원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며 열화된 기록사진은 권력의 연출이 결국 허상이었음을 드러낸다. 한 장의 사진은 피해자의 공포와 침묵을 동시에 증언하며, 관람객에게 과거를 직시할 용기를 요구한다.
역사의 법정에서 시민이 판사다
한홍구 교수는 한국 현대사의 복원력에 감탄하면서도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과거사가 정리되고, 한국사회는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게 되었는지요? 오히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이 ‘역사전쟁’이라는 또 다른 2차 가해를 자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가해자들의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시민들이 역사의 법정에서 그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그 법정에 제출된 공소장과 같다. 이번 전시와 책 출간은 “이제 판단은 시민들의 몫”이라는 선언이다.
주용성 작가는 “이번 전시는 단순한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우리가 오늘 반드시 직면해야 할 질문”이라고 말한다. 전시는 과거의 폭력이 어떻게 사회를 길들였는지, 우리가 그 구조를 여전히 재생산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그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법과 정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싸우고 있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전시를 관람하고, 이름이 불린 300인을 기억하고, 그들이 저지른 반헌법행위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이다. 평화박물관이 마련한 작은 공간은 시작일 뿐이며, 이 작업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시민의 참여와 후원이 필요하다. 역사의 법정에서 판사는 시민이다. 이제 그 이름들 앞에서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지, 우리 모두가 답해야 한다.
전시 관람 안내
이번 전시는 서울 온수동 ‘스페이스99’에서 상설로 진행되며, 평화박물관 소장 국가폭력 자료와 새롭게 발굴된 사진, 영상자료를 함께 볼 수 있다. 관람은 사전 예약 없이 무료로 가능하며, 단체 관람 시에는 평화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문의할 수 있다. 전시 기간 동안 작가와 연구자들의 특별 강연과 해설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관람객이 보다 깊이 있는 이해를 얻을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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