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굳이 5월 16일을 기억하고 기리겠는가? 민주공화국의 앞길을 밝힐 등불로서 5월 18일을 기념하기에도 벅찬 우리에게 어느덧 16일은 잊고 지나가도 좋을 날이 되었다. 아니, 애초에 이 날짜와 결부된 역사적 사건은 그런 대접이 마땅하다.
그런데 올해는 5. 16을 그렇게 그냥 흘려버리기가 어려웠다. 유독 착잡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윤석열이 기도한 친위쿠데타 때문이었다.
작년 12월 3일 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느닷없이 TV 화면에 난입해 "비상계엄, 비상계엄"을 내뱉는 광경을 보며 떠올린 것은 1972년 10월 17일 저녁에 윤석열과 마찬가지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일으킨 또 다른 친위쿠데타였다. 이날 박정희가 선포한 비상계엄령에 의해 제3공화국이 돌연 운명을 마감하고 유신 독재(제4공화국)가 시작됐다.
이후 신군부 독재(제5공화국)를 거쳐 1987년 15년만에 대통령을 다시 직접선거로 선출하게 됐다. 우리는 이를 '민주화'라 부르고, 그때부터 지금에 이르는 헌정 질서를 '제6공화국'이라 칭한다. 그런데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으로 소극으로 반복된다"는 상투어구마냥, 직접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다시 한 번 친위쿠데타에 나섰던 것이다.
이 광경 앞에서, 우리가 '제6공화국'을 살고 있다지만 실은 '제3공화국'의 반복을 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다시 돌아보면, 1987년 '민주화'도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15년간의 노골적 독재를 끝내고 그 전의 체제, 그러니까 대통령을 직접선거로 선출하던 제3공화국 시절로 돌아간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상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시작된 제3공화국의 기나긴 연장, 즉 '장기 제3공화국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씁쓸한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비록 실패했을망정 다시 한 번 친위쿠데타를 겪고 난 지금, 반드시 곱씹어봐야 할 깨달음이기도 하다. 내란을 진압하고 되찾았다는 '민주주의'가 결국은 한국 시민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대통령선거의 반복으로만 나타나는 현실 역시 이런 생각이 더욱 굳어지게 만든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답을 선취했던 제2공화국 헌법
'장기 제3공화국 시대'란 말이 머리를 맴돌수록 이와 함께 계속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제3공화국 이전의 헌정 질서, 5.16 쿠데타가 무너뜨린 그 질서는 도대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오늘날 대다수 시민에게 그 시절은 대통령(윤보선)과 총리(장면)가 정쟁을 일삼고 거리에서는 데모가 끊이지 않으며 급기야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같은 과격한 구호까지 등장하는 통에 군부 쿠데타를 불러오고 만 무능과 혼란의 1년으로만 기억된다.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일단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짜여 있다.
그러나 정말 그렇기만 했을까? '촛불혁명'이나 '빛의 혁명' 같은 공허한 수사 말고 진짜 혁명의 파도가 한국 사회를 덮쳤던 시절, 전쟁과 학살을 겪은 지 10여 년도 안 돼 '혁명'이라는 말이 국가의 공식 신화로 당당히 복권됐던 그 묘한 시절이 과연 '무능과 혼란'의 세월이기만 했을까? 대한민국 역사상 예외적으로 의회제(내각제) 정부를 구성, 운영했던 그 1년간의 산물이 정말 고작 윤석열(1960년 12월 생이니, 한국 인구에서 극소수인 '제2공화국의 자식'인 셈이다)뿐일까?
나는 제2공화국의 맨 얼굴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찾아 읽은 게 1960년에 세 번째로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2공화국 헌법'이었다. '몇 번째' 공화국이라는 말 자체가 헌법의 대대적 개정을 기준으로 한 표현이니, 그 시절 헌법이야말로 제2공화국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 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불과 몇 분만에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전율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한낱 '과거'의 자취일 뿐이라 여겼던 문서에서 나는 이 나라의 '현재'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이상과 원칙의 선취와 마주쳤다. '미래'가 거기에 있었다. 논쟁적 주제인 의회제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대통령제냐 의회제냐는 쟁점이 아니더라도 제2공화국 헌법 속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가령 12. 3 친위쿠데타가 실패로 끝나고 나서도 시민들은 잇달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한덕수, 최상목 탓에 계속 분노와 우려에 휩싸여야만 했다. 국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됐으면, 그것으로 혼란이 진정됐어야 했다. 그러나 한덕수와 최상목은 헌법이 규정한 헌법재판관 임명 의무를 무시하는 위헌, 위법행위를 자행했다. 이런 꼴을 목격하고 대다수 시민은 이 나라 고위 관료층의 실상에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비선출직 관료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도록 규정한 현 헌법 제71조에 비로소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런데 제2공화국 헌법 안에 이미 그 답이 담겨 있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참의원의장, 민의원의장, 국무총리의 순위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제52조)고 정해놓고 있다. 민의원(하원), 참의원(상원)의 양원제를 취했던 제2공화국과 달리 단원제인 제6공화국 식으로 표현한다면,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는 뜻이다. 작년 12월 한덕수, 최상목의 위헌, 위법행위를 겪으며 많이 회자된 대안이 바로 국회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1순위 공직자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들 뒤늦게 현 헌법의 관련 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며 이 의견에 동의했다. 60년 전에 벌써 준비됐던 답을 한참 뒤에야 재발견한 꼴이다.
한덕수, 최상목이 저지른 위헌 행위의 핵심이었던 헌법재판관 임명 문제 관련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헌법재판소가 제6공화국 헌법을 통해 처음 도입된 줄 아는 사람이 많지만, 헌법재판소는 실은 제2공화국 헌법에 처음 등장한다. 이승만 정부의 헌법 유린을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4. 19 혁명 직후의 한국 사회는 당시에 서독 등에서도 시행된 지 10여 년밖에 안 된 헌법재판소 제도를 과감히 도입했다. 다만 헌법재판소를 채 설치하기도 전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실제 도입이 30여 년 뒤로 늦어졌을 뿐이다.

게다가 제2공화국 헌법은 헌법재판관 임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정리한다. "헌법재판소의 심판관은 9인으로 한다. 심판관은 대통령, 대법원, 참의원이 각 3인씩 선임한다."(제83조의4) 대통령, 국회(참의원), 대법원이 3인씩 선임하면 그것으로 임명 절차는 끝이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자"와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자"(현 헌법 제111조3)를 다시 "대통령이 임명"(현 헌법 제11조2)해야 한다고 하여 한덕수, 최상목 부류에게 빌미를 줄 만한 내용 따위는 없다. 대통령을 국회, 법원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보는 사이비 민주주의관(실은 '대통령주의')이 깔려 있지 않았기에 그런 군더더기 조항이 들어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 4월에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고 나서도 다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졌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이 구치소에서 풀려나도록 만듦으로써 이미 권위를 크게 상실한 사법부가 이번에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누가 봐도 '선거 개입' 혐의가 짙은 판결을 내놓았다. 내란이 깨끗하게 진압됐다 믿었던 많은 시민이 대법원의 이런 석연치 않은 행보에 분노해 다시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고, 그제야 사법부는 이상 행보를 멈췄다.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을 따지자면, 대법원장을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는 현 헌법 내용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대법원장의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다.(현 헌법 104조1)" 앞에 언급한 대통령주의의 사고방식이 여기에 다시 출현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대통령이 정파 논리에 따라 임명한 대법원장이 사법부를 정파적으로 이끄는, 몇 주 전에 겪은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대안으로 대법원장을 직접선거로 뽑자는 의견이 올라온다. 그러나 이게 과연 적절한 대안인지는 의문이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민주주의'와 등치하는 제6공화국식 민주주의관의 제한된 시각이 대법원장 직을 놓고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차라리 내 눈길을 붙드는 것은 제2공화국 헌법의 관련 내용이다. 제2공화국 헌법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써 조직되는 선거인단이 이를 선거하고 대통령이 확인한다"(제78조)고 규정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 개입 없이 사법부가 대법원장을 선출하게 한 것이다.
이 방법 역시 오늘날의 문제의식과 요구에 비춰보면,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법부의 독립성이라는 중대한 원칙만큼은 가장 확실하게 보장하는 방식이다. 만약 현대 민주주의의 요청에 맞게 변형한다면, 대법원장을 선출하는 선거인단을 법관 일부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일부, 추첨으로 뽑힌 시민배심 등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무튼 대법원장 직선제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의 실마리가 60여 년 전의 헌법, 제2공화국 헌법에 있다.
그밖에도, 제2공화국 헌법은 제헌국회가 치열한 논쟁 끝에 채택한, 진보적 경제 체제를 지향하는 제헌헌법 조항들을 충실히 이어받았다. 순수 자본주의보다는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경제 체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내용, 즉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는 조항(제84조)이 제2공화국 헌법에도 유지됐다. 주주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기업의 주인이라고 선포하는 이른바 '이익균점제', 즉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제18조)도 그대로 남았다.
이 모든 내용이 언제 다 사라져 버렸는가? 5. 16 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 군부 세력이 제3공화국 헌법을 기초하면서 모조리 삭제하고 말았다. 진보적 경제 체제를 지향한 제84조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맨 앞에 내세우는 내용으로 바뀌었고(제3공화국 헌법 제119조), 이익균점제 조항은 종적 없이 사라졌다.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을 공직자 1순위는 비선출직 국무총리로 바뀌었고(제71조), 헌법재판소는 설치도 되기 전에 폐기됐으며,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되었다(제104조).
헌법재판소의 부활 정도를 제외하면, 제3공화국 헌법을 통해 바뀐 이러한 내용들이 그대로 현 제6공화국 헌법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 모습을 제2공화국 헌법이라는 거울에 비춰볼수록 현재가 '장기 제3공화국 시대'의 한 자락임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제2공화국 헌법을 뒤늦게나마 읽음으로써 우리는 한 가지를 더 확인할 수 있다. '장기 제3공화국 시대'가 끝내버린 그 짧은 앞 시대가 결코 현대 한국인들에게 주입된 누군가의 평가처럼 '부끄러운' 과거는 아니었다는 진실이 그것이다. 오히려 이른바 '촛불혁명' 혹은 '빛의 혁명' 이후 시대가 따라가지 못할 만큼 민주주의의 이상과 원칙에 충실했던 시대였다. 그런 미래의 선취가 대한민국의 과거 속에 있었다.
시민 주도 개헌을 기대하며
한국 정치가 4. 19 혁명이 열어놓은 길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멀리 벗어났는지 확인하고 나니, 조기 대선에서 반복되는 제6공화국 정치의 익숙한 광경이 더욱더 식상하게 느껴진다. 언제까지 '민주주의'를 대통령 한 사람을 '직접 뽑는' 것과 동일시할 것인가? 권력은 집중되어야 하고 그 권력 중심이 대중과 직접 소통하는 게 민주주의라는 관념으로부터 언제쯤이나 완전히 해방될 텐가?
'내란 종식'을 위해 '압도적 승리'가 필요하다는 구호만 해도 그렇다. '내란 종식'의 염원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그 수단이 '압도적 승리'여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이 가지 않는다. '압도적 승리'에 어떤 양적 기준이 있다면, 아마도 50% 이상의 득표율일 것이다. '장기 제3공화국 시대'에 대선에서 결선투표도 없이 이런 득표율을 기록한 사람으로는 딱 두 명이 있다. 박정희(1967년, 1971년)와 박근혜(2012년). '내란 종식'을 위한 '압도적 승리'란 결국 '민주(혹은 중도보수)' 진영도 박 씨 가문의 기록을 넘어보자는 포부 외에 다른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생각보다는 그다지 장쾌할 것도 없는 목표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소식이 있다면, 탄핵 광장에 모인 기대와 열망을 반영하는 제6공화국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흐름이 대선 국면에서도 계속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18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차기 정부에서 개헌을 진지하게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정말 그러기를 바란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그랬듯이 시민들의 참여와 토론, 합의로 새 헌법을 만들어가는 역사를 반드시 열게 되길 고대한다. 더구나 대한민국 시민들에게는 이런 논의를 무에서 출발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는 '과거 속의 미래'가 이미 있지 않은가. 우리는 폭력에 의해 오랫동안 강제로 중단됐던 시민들의 대화를 거기에서부터,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제2공화국 헌법에서부터 다시 이어가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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