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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나"…삶의 끝에서 건넨 홍세화의 단어는 "겸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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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나"…삶의 끝에서 건넨 홍세화의 단어는 "겸손"이었다

[기고] 수줍고 겸손했던 어른, 홍세화 선생님을 추모하며

홍세화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아버지의 서재에서였다. 나의 아버지는 퇴근하고 나면 자신의 방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언젠가 그의 책상 위에서 그가 읽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을 보았고, 몇 페이지 읽다가 곧 그만두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생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 사람 훌륭한 사람이야."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제대로 된 기억 속엔 없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가 쓴 <대리사회>라는 책에 추천사를 써 주었다. 파리에 망명한 그가 찾은 직업이 택시기사였고, 대학에서 나와 내가 찾은 일이 대리기사였으니까, 서로의 삶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제법 어울렸던 것 같다. 그는 나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와의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내가 고기를 들고 친구들과 찾아가면 함께 구워 먹었다. 가끔 좋은 와인이 있다며 내어 오기도 했고,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었고, 음식을 다 먹고 나면 항상 직접 설거지를 하려 해서 우리가 제발 저희가 하겠다고 잡아끌어야 했다. 그는 나이와 관계없이 그 공간의 모두를 존중했다.

▲ 홍세화 선생님의 자택에서. 2017. 1. 15. ⓒ김민섭

삼겹살을 들고 처음 일산의 자택에 있는 그를 찾았을 때, 대한민국의 광장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른바 국정농단, 촛불시위, 대통령탄핵.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고 입이 있는 모두가 그에 대해 한 마디를 보탰다. 우리도 출간에 대한 축하와 이런저런 농담들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거기로 화제가 옮겨졌다. 그리고 함께 찾은 젊은 몇몇이 선생님의 말을 기대하며 그를 보던 그때, 그의 첫 마디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어요. 저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오늘 같은 날이 오게 된 거예요. 젊은 당신들에게 참 많이 미안해요." 그때 짧은 침묵이 내려앉고, 모두가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사과하지 마세요, 라는 말을 했으나, 곧 우리는 그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답했다. 대통령도 사과하지 않았고, 탄핵을 주도한 사람들도 사과하지 않았고, 그 어떤 어른도 우리에게 사과한 일이 없었다. 모두가 누군가를 찾아 악마화하고 비난하기에 바빴던 그때 그는 내게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식사 자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말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수줍게 웃고 있는 일이 많았다. 왜 그런지, '수줍다'라는 표현이 그처럼 어울리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언제나 소년의 얼굴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을 잃어간다. 정치를 하든 사업을 하든, 소년의 얼굴로 시작한 이들이 왜 저런 얼굴을 하게 되었나, 하고 실망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홍세화 선생님은 그 얼굴을 지켜나갔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 선생님의 얼굴을 보는 나도 소년의 얼굴이 된다. 2020. 1. 10. ⓒ김민섭

지난주엔 병실에 있는 그를 만났다. 그가 암으로 투병한 지가 좀 되었다. 그를 간병하던 나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섭아, 선생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네가 와 주었으면 좋겠어. 친구를 만나 녹색병원 3층의 입원실로 갔을 때, 그는 화장실에 있었다. 주무시다가 깼고 간병하던 사람이 보이지 않아 혼자 화장실로 갔다고 했다. 나의 친구는 익숙하다는 듯 그가 입었던 옷을 세탁할 통에 넣고 새 옷을 내어주었다. 선생님의 첫 마디는 흉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요, 라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냉장고를 가리키며 사과 주스를 하나 먹으라고 말했다. 그가 병실의 쇼파에 앉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앉고 서는 것도 이미 힘겨워진 상태였다. 나는 그의 옆에 앉아 함께 작은 사과주스를 하나 꺼내어 먹었다. 그의 곁에 앉아 술을 마시던 게 불과 1년이 되지 않았다. 내가 강릉에 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에게 연락이 왔다. "김민섭 선생, 서점을 열었다는데 강릉에 축하하러 한 번 가고 싶어요."라고. 나는 그때 그의 건강이 일시적으로 나빠진 것이고 곧 회복하리라 믿었다. 나뿐 아니라 모두가, 그도 그렇게 믿지 않았을까. 그래서 오시는 김에 작은 북토크라도 함께해 주세요, 하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건강한 모습으로, 언제나의 수줍고 유쾌한 모습으로, 그날 행사에 온 사람들과 만났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강릉에 왔을지, 나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냥, 모시고 맛있는 음식이나 먹을걸.

▲ 북토크 전 서점을 찾아 주신 홍세화 선생님. 2023.4.15. ⓒ김민섭

사과주스를 다 마신 그는 이제 좀 누워야겠어, 라며 일어섰다. 잠시 앉아 있는 것도 그에겐 힘든 일이었다. 일부러 사과주스를 천천히 마시던 나는 일어나 그가 침대에 눕는 것을 도왔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왠지 그가 지금 잠들기 전 꼭 물어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살면서 누구에게도 이런 것을 물은 일이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 꼭 묻고 싶습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그냥 한 단어라도 좋습니다 선생님. 말씀해 주세요." 그는 길게 답하기 힘든 상태였지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정갈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나는, 겸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곁에서 눈을 오래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그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내게 건넨 단어는 '겸손'이었다. 내가 아는 그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이룰 수 있는 게 많이 있었겠으나, 그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방식과 태도를 지켜나갔다. 내가 알기로 그가 마지막까지 했던 일은 난민보호소의 인권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직접 찾아가 살피고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그걸, 누가 알아준다고. 그러니까 그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강릉에 그가 왔을 때, 지금 그를 간병하고 있는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아유 선생님 말씀 다 똑같은데 난 안 듣고 좀 나가 있을까 싶다. 내가 그에게 야, 이, 그러면 안 되지, 라고 하자, 그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민섭아, 저 사람은 변하지 않아,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 선생님이 변하지 않으리란 걸 믿기 때문에 우린 그 옆에 있는 거야.

나는 선생님의 앞에서 한참 눈을 감고 있었다. 친구가 나에게 "민섭이랑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라고 해서 밖으로 나갔다. 네가 울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어. 밖에서 울고, 다시 병실로 들어가서, 선생님 저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간신히 울음을 참고 말씀드리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선생님과 작별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는 똘레랑스, 정의, 인권, 연대, 그러한 게 아니라 겸손이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켜내고자 했던 삶의 태도.

수줍은 소년의 얼굴을 한, 단 한 순간도 변한 일이 없는, 내가 아는 가장 좋은 어른을 오늘 보낸다. 그와 함께 단 한 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는 이미 자신의 삶으로, 마지막까지 붙잡은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남겨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선생님, 정말 멋있었어요, 하고 웃으며 술 한 잔 나누고 싶은 것이다.

선생님을 뵙고 온 날, 친구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겸손이라는 단어가 자꾸 남아, 선생님께서 펜을 들 수 있을 때 겸손이라는 단어 하나만 직접 적어서 주실 수 있을까. 몇 시간 후 그에게 사진이 왔다. "겸손, 홍세화. 2024년 4월 15일." 그는 이 단어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 것인가.

▲ 홍세화 선생님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단어. 2024.4.15. ⓒ김민섭

겸손하게 살아가겠습니다. 다정이라는 단어 곁에 겸손이라는 단어를 함께 두겠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대하든,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가장 수줍고 겸손했던 어른, 홍세화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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