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을 연재 하고 있는 자칭·타칭 '철도 덕후' 사회공공연구원 박흥수 철도 전문위원은 지난 1월 말에서 2월 초까지 태국 철도 답사를 다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철도 노선으로 불렸던 시암 – 버마 철도 구간 중 현재 남아 있는 방콕 – 남톡 구간을 달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 공영이라는 미명 아래 벌어진 역사의 한 부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동아공영권의 울타리를 철도로 달린 그 이야기를 <도쿄 야스쿠니에서 칸차나부리 죽음의 철도까지>라는 부제로 몇 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
헬파이어 패스를 둘러보고 난 뒤 기념관을 품고 있는 군부대를 나와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정오가 살짝 지난 시간이라 태양은 작정하고 대지를 데웠다. 버스 정류장 안으로 들어가 해를 피했다. 국도변 태국의 버스 정류장이 그늘을 제공했다. 네 개의 기둥이 4각 처마와 그 위로 솟은 맛배 지붕을 지탱한다. 그늘 안 나무 의자 위에 쌓인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엉덩이를 붙였다.
이제 남톡으로 가야 한다. 현존하는 시암-버마 철도 노선이 끊긴 곳이다. 이곳에서 열차를 타고 칸차나부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배차 간격이 2시간이라지만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한참 기다리니 칸차나부리에서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외국인 커플이 버스 정류장으로 왔다. 커플은 독일에서 왔다고 했다. 더위에 지쳐 버스를 기다리던 손님들은 갑자기 등장한 이동식 아이스크림통을 둘러쌌다. 아이스크림 통이 연결된 오토바이를 타고 중년 남성과 할머니 한 분이 나타나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주는 대신 바트화를 수거해갔다.
곧이어 진짜 구원이 일어났다. 독일 아저씨가 달려오는 차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는데 다가오던 차가 끼익 브레이크 소리를 내면서 우리를 조금 지나쳐 섰다. 몇 번이나 차를 세우려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차들은 쌔앵 소리를 내며 지나가 인내심의 잔고를 바닥낼 뿐이었다. 기대를 저버리고 있을 때 기적처럼 등장한 차는 마침 픽업트럭이라 짐칸에 6명이나 되는 이방인들을 다 태울 수 있었다. 적재함에 자리를 잡자 빨간 트럭은 속도를 높였다.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자 골격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숨겨진 또 다른 얼굴들이 드러났다.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하는 길을 15분 만에 도착했다. 극구 사양하는 운전자에게 오전에 산 과일 봉지를 전달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붉은 트럭은 칸차나부리까지 간다는 독일인들을 실은 채 떠났다. 독일인 커플은 짐칸에서 열심히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남톡 국도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점심을 먹은 뒤 성태우를 타고 남톡역으로 갔다. 걸어갈 만한 거리였지만 무더위 속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좋은 핑계가 기꺼이 돈을 내게 했다.
남톡 역은 태국-버마 철도 노선의 중간 지점에 약간 못 미치지만 현재는 방콕발 열차의 종착역이다. 버마로 가는 철길은 남톡 역에서부터 북쪽을 향해 1.5KM 정도 올라가다 끊겨 있다. 태국 서북철도 노선의 마지막 역인 남톡 역은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남톡발 열차는 하루에 세 편 있다. 오전 5시 20분과 오후 1시에 출발하는 열차는 방콕 톤부리까지 가고 3시 30분에 출발하는 막차는 칸차나부리가 종착역이다.
빛바랜 붉은색 슬레이트가 기와처럼 얹힌 지붕에 노란색 페인트로 치장된 역사는 옛 일본식 역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면 승객들의 대기 공간과 매표구가 보인다. 경의선 신촌역의 옛 모습과 닮아있다. 철도로 동아시아를 정복했던 일본이었기에 곳곳에 일본풍의 역사가 남아 있다. 아직 출발 시간이 임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표 창구는 닫혀있었다. 더위도 피할 겸 역 앞의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설탕물이 나왔다. 태국 시골 마을에서 커피를 시킬 때는 반드시 노 슈가!!를 말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듬뿍 친 시럽 덕에 커피 맛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다.
오후 3시 30분, 남톡발 마지막 열차는 기적을 몇 번 크게 울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가 속도를 올리자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객실을 휘돌며 더운 열기를 가져갔다. 객차의 맨 뒤 칸으로 가 멀어지는 선로를 보았다. 흐르는 자갈 위로 선로가 춤을 추며 뒤로 물러났다. 뼈만 남은 여윈 몸으로 하체만 겨우 가린 채 개미처럼 일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선로변으로 스쳐 지나는 듯했다. 그리고 이들을 감시하는 낯익은 얼굴의 청년들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연합군 포로로 태국 – 버마 철도를 경험했던 생존자들의 책들을 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Korean Guard, 조선인 감시병이었다. 태국 – 버마 철도 전 구간에 걸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는 실무는 모두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제가 소속된 제4분소에는 총 11,000명 가량의 포로가 있었고요, 포로 관리는 일본인 하사관 17명, 조선인 포로 감시원 130명이 했어요."(조선인 감시병 출신 이학래)
전날 죽음의 철도 박물관에서 산 책은 순전히 표지 그림에 이끌려 지갑을 열게 했던 그림책이었다. 표지에는 절벽에 붙은 목조 다리 위에서 공사에 나선 포로들을 감시하는 감시병의 뒷모습이 보이는데 손에는 짱돌이 들려있다. 손에든 돌은 포로를 향해 날아갈 것만 같아 보인다. 그림책은 <버마철도 – 시각적 회상; BURMA RAILWAY a Visual Recollection>이란 제목으로 네덜란드군 소속으로 포로 생활을 경험한 오토 크리프트(Otto Kreefft)의 작품이다. 정글 속에서 철도를 건설하는 모습이 저자의 기억의 강을 따라 그림으로 재생된다. 끔찍한 노동 현장, 비참한 병동의 환자들 모습, 장례를 치르는 장면들과 설명이 붙어 있다. 그중에는 교량을 어떻게 건설했는지 기술적인 설명도 들어있다.
내가 놀란 것은 표지에 쓰인 그림이 본문에 등장할 때 나타난 설명문인 'The Korean' 이었다. 한국인 - 철도의 완성된 구간 어딘가에서 네덜란드 포로들이 침목 아래에 밸러스트를 채우고 있다. 다들 빨리 일해야 한다. 감히 허리를 펴고 잠시라도 일을 멈춘다면 한국 경비병이 커다란 돌을 머리에 던진다. 이 경비병은 매일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부상을 입힌다. 돌을 던질 이유가 없음에도 이 잔인하고 부당한 폭력을 포로들은 참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는 자의 얼굴을 마음속에 새기고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가 죗값을 치르는 날이 올 것이다.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샀는데 그 그림 속 주인공은 나와 같은 한국인이었다.
히로무라, 도마뱀, 이학래
칸차나부리와 헬파이어 패스가 있는 힌똑에서 포로들의 정신적 안식처였던 에드워드 던롭 중령은 일기를 썼다. 이 일기는 던롭의 전쟁일기(THE WAR DIARIES OF WEARY DUNLOP)라는 제목으로 1986년 출판됐고 2010년 판도 출간됐다. 2010판의 종이책은 절판됐지만 다행히 아마존에서 전자책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아마존 계정이 한국 주소로 되어 있으면 전자책 구매가 불가능하다. 구글 지도로 검색해 뉴욕의 한인 성당을 주소로 넣은 끝에야 카드 결제창을 채울 수 있었다. 던롭의 전쟁일기에는 매일 벌어졌던 사건들과 그때그때 보유한 약품의 종류, 증상별 환자 수는 물론 소금이나 설탕, 채소 보유량까지 깨알같이 적혀있다. 그중에서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도마뱀'이었다.
1943년 3월 17일
이 캠프의 2인자는 모든 걸 되갚아 주는 도마뱀으로 진짜 개새끼다. 1인자는 합리적인 이등병이다.
1943년 3월 20일
나는 마지 못해 공사장으로 12명을 보내기로 하고 '도마뱀'을 보자 화난 목소리로 20명은 밖에 나가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그는 순순하게 "알았어, 알았어!"라고 말했다.
1943년 3월 22일
도마뱀과 나는 그때 정말 싫어했고 통역 올리버를 통해 그 준비상황에 대해 정확히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했다. 도마뱀은 군인들을 보고는 그들이 일하기 적합하며 내일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1943년 4월 5일
지난 밤사이 병원에 늘어난 환자 수를 보고는 도마뱀은 분노했다. 그는 환자 수를 줄이기 위해 검사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1943년 4월 13일
도마뱀은 가벼운 작업을 위해 병원에서 25명을 차출하라고 했다. 코렛 소령은 오직 7명만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그만큼만 내보내라고 지시했고 이제 싸움은 시작됐다.
도마뱀은 조선인 감시병의 별명이었다. 포로들은 조선인 감시병을 별명으로 불렀다. 어쿼트의 책에는 무쏘라는 조선인 감시병이 등장하는데 이탈리아 독재자 무솔리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미친개, 도마뱀, 무쏘 등 갖가지 별명을 가진 조선인 감시병은 어디에서 왔을까?
전남 보성군 산골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학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여수항에서 잡일을 하거나 제재 공장에서 일을 하는 등 어린 나이 때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17살이 되던 어느 날 고향 선배가 면사무소에서 남방 포로 감시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전하며 응모를 권유했다. 세상은 전시 분위기로 진입하고 있었고 조선에서 징병제 시행도 결정되었다. 이학래는 2년 전에 이웃집 동급생이 홋카이도 탄광에 강제로 끌려가는 것도 보았다. 어차피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갈 운명인데 차라리 50엔의 월급을 준다는 포로 감시병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모집 요강에는 20세 이상 청년을 뽑았으나 면사무소에서는 할당 인원을 채우기 위해 이학래를 포함시켰다. 이학래는 다른 3,224명의 동료들과 함께 부산 노구치 부대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두 달 동안 이어진 훈련소 생활은 끔찍했다. "「군인칙유」와 「전진훈」은 빨리 외우라고 닦달을 받았어요. 저는 암기에 익숙했기 때문에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그러나 구타당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소리가 작다', '자세가 나쁘다'는 핑계를 내세워 뺨을 때리고, '군화의 손질 상태가 불량하다', '총의 손질 상태가 불량하다'고 지적하면서 뺨을 때리고, 당당한 일본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며 또 뺨을 때렸어요…가장 끔찍했던 것이 '마주보고 뺨 때리기'였어요. 서로 마주서서 뺨 때리기 경쟁을 시키는 거예요. 서로 간에 증오 따위가 있을리 만무하기에…오랜 시간 '받들어 총'자세를 취하게 하거나, 신발을 핥게 하기도 했어요.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선악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는 거였지요. '말 안듣는 놈', '이 밉살스러운 조선놈'이라는 기세로 온 힘을 다해 뺨을 때렸어요. 동료 사이에서는 '전방에 가면 두고 보자, 뒤에서 쏘아 죽여 버리고 말테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
훈련소를 나온 이학래는 일본군 군속, 오늘날로 치면 군무원으로 임용된다. 포로감시원은 군무원 중 가장 말단 직위인 하급 용인으로 일본군 이등병보다 낮은 계급이었다. 이학래는 1942년 8월 19일 아홉 척으로 꾸려진 선단에 올라 동료들과 함께 남방으로 향한 끝에 칸차나부리를 거쳐 헬파이어 패스가 있는 힌똑까지 가게 된다.
"9월 9일 무렵이었다고 기억하는데요, 논 플라독에서 연합국 포로를 처음 만났어요. 잡힌지 얼마 안 된 포로들은 체격도 좋고, 우리 감시원들이 올려다 볼 만큼 키가 컸어요. 더구나 천 몇백 명이나 되는 인원은 수적인 면에서 우리를 압도했어요.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무시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내심 다짐 했어요. 포로들을 불쌍히 여기는 인지상정보다는 전진훈에서 배운 군인 정신 같은 것에 비추어 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인 청년들을 포로 감시원으로 두고 악역을 전담케 했다. 포로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경우 일본군 상관들은 조선 청년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일본군의 압박과 포로들의 분노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학래는 일본군으로부터는 창씨개명 이름인 히로무라로 포로들로부터는 도마뱀으로 불렸다. 히로무라와 도마뱀 사이에서 이름을 잃은 조선 청년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꿈이었다.
1944년 6월이 되면서 계약된 기간 2년이 지났지만 일본군은 귀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조선인 군무원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1945년 1월에는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조선인 군무원들이 반란을 조직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들 조선 청년들은 고려독립청년단을 조직해 일본군과 싸웠다. 이로 인해 남방 전선 일대에는 조선인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퍼지고 각 부대에 헌병대가 배치됐다. 조선인들이 소지한 무기도 회수했다. 이즈음부터 일본군 상관은 툭하면 '조선인 군무원 주제에'라며 모멸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포로와 이야기를 나누기라도 하면 바로 질책과 조사가 이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1945년 8월 16일, 방콕의 태국 포로수용소 본소로 파견 나와 있던 히로무라에게 패전 소식이 전해졌다. 고향을 떠난 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이학래는 이제 해방된 조국에서 부모님과 남동생, 여동생을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남쪽으로 달리던 열차가 탐크라세 역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탔다. 새로 합류한 승객들은 저마다 오른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열차는 탐크라세 역부터 다음 역인 럼섬 역 구간에 죽음의 철도 상징적 구간인 암벽에 붙은 목조 철교 위를 달리게 된다. 1일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여행사 가이드들이나 택시 기사들은 이 탐크라세 역에 관광객들을 내려놓은 뒤 차를 몰고 다음 역에서 기다렸다가 죽음의 철교를 건너온 사람들을 태우고 칸차나부리나 방콕으로 간다.
열차가 탐크라세 역 승강장을 벗어나자 바로 목조 철교 위로 들어섰다.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이고 오른쪽에는 쾌노이 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열차는 얼키설키 이은 나무들이 지탱하는 다리 위를 낮은 속도로 달렸다. 관광객들의 탄성 속에 열차의 바퀴와 선로가 만들어 내는 마찰음이 뒤 섞였다. 철길 위에서 나는 쇳소리는 이곳에서 일한 사람들의 비명일지도 모른다. 열차 맨 뒤 칸에서 선로를 내려다보았다. 오토 크리프트가 그린 철길이 눈앞에 보였다.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반강제로 끌려온 노동자들과 포로들과 조선인 감시병이 서 있던 비극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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