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구호단체 활동가 사망을 계기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분노"를 표현하며 비난 수위를 높였지만 무기 지원 제한 등 실질적 조치는 취하지 않으며 대선 경선에서 확산 중인 가자지구 정책 항의 표심을 의식한 수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이하 현지시간) 국제구호단체 월드센트럴키친 창립자이자 유명 요리사인 호세 안드레스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가자지구에 대한) 인도주의적 활동을 위해 해군 및 군대를 파견할 예정이지만 동시에 미국이 제공한 무기가 민간인을 죽이고 있다"며 "이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 전쟁을 지금 끝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1일 영국인 3명, 미국과 캐나다 이중 국적자 1명 등 주로 서방 국적자들로 이뤄진 월드센트럴키친 구호 활동가 7명이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사망하자 2일 바이든 대통령은 "분노"를 표명하고 "이스라엘이 구호 활동가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난했지만 무기 지원 제한 등 이스라엘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카린 장피에르 미 백악관 대변인은 3일 언론 브리핑에서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 변화가 예상되냐는 질문을 받고 "우리는 민간인과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보호를 보장받고자 한다"면서도 가자지구 정책 관련해선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답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내부 역학 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익명을 요구한 백악관 고문들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최고 보좌관들은 이스라엘의 전쟁 수행 방식에 대해 대단히 좌절했음에도 무기 판매에 조건을 달거나 중지하는 등의 징벌적 조치를 이스라엘에 부과할 의향이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바이든 정부는 피난민 140만 명 이상이 몰려 있는 가자지구 최남단 라파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면 지상 공격 계획을 말리면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전투기 판매는 승인할 것으로 보인다. 1일 미 CNN 방송은 이 문제에 정통한 3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바이든 정부의 이스라엘 대한 F-15 전투기 50대 판매 승인이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다만 F-15 전투기는 새로 제작돼야 해 승인되더라도 5년 안엔 인도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방송은 또 소식통에 따르면 바이든 정부는 지난주 이스라엘에 F-35 전투기 판매도 조용히 승인했다고 전했다. 2일 <뉴욕타임스>(NYT)는 미 당국자를 인용해 이스라엘 당국자들이 곧 F-35 전투기를 새로 주문할 예정임을 미국에 말했다고 덧붙였다.
백악관은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사망을 포함해 가자지구 전쟁에서 구호 활동가 200명 이상이 숨지고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가자지구 주민이 3만3000명 가까이 숨졌음에도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위반한 바가 없다고 밝히며 이스라엘에 조치를 취할 근거를 축소하고 있다.
2일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언론 브리핑에서 지난 5~6달간 이스라엘이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적이 없냐는 질문을 받고 "국무부가 과거에 발생한 사건을 검토했지만 아직 어떤 사건도 국제인도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커비 보좌관은 월드센트럴키친 활동가 사망 사건에 관해서도 이스라엘 쪽이 제기한 "실수"라는 해명을 반박할 증거가 없다며 "현재까지 이스라엘이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사건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은 지난주 가자지구의 즉각적 휴전을 요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 결의안 통과를 막지 않았지만 그 직후 결의안이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해 무력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중동 특사를 지낸 프랭크 로웬스타인이 "우리(미국)는 이러한 극단적 사건으로 인한 심각한 인도적 지원 문제에 분노한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이 국제법에 따라 행동했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고 있다"며 "우리가 이스라엘이 실제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후과도 없다면 그들(이스라엘)이 왜 행동을 바꾸겠는가"라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수사가 아니라 행동"이라며 "역사는 말과 함께 이스라엘의 주의를 끌 수 있는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말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꼬집었다.
아랍 전문 연구소인 워싱턴DC 아랍센터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프로그램 책임자 유세프 무나르 선임 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이번 구호단체 폭격과 유사한 종류의 이스라엘 공격이 계속돼 왔음에도 바이든 대통령의 "분노" 수사가 "서방 구호 활동가들"이 숨졌을 때 비로소 나왔다는 점에 씁쓸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실제적 조치는 취하지 않으면서 수사의 강도는 높여가는 배경엔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가자지구 정책에 대한 국내 항의가 거세지고 있는 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경선에서 가자지구 정책에 대한 항의 표시로 사실상 단일 후보인 바이든 대통령에게 기표하지 않고 '지지후보 없음(uncommitted)'에 기표하는 운동이 확산하는 가운데 2일 위스콘신주 민주당 예비선거(프라이머리)에서도 관련 표가 4만8162표(8.3%) 나왔다.
2020년 대선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위스콘신에서 2만 표 차이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간신히 승리했는데 당시 표차의 2배에 해당하는 유권자가 바이든 대통령에 항의표를 던진 것이다.
2일 백악관에서 열린 무슬림 초청 행사에서는 참석자 한 명이 가자지구 정책에 대한 항의 표시로 비공개 회의 시작 직후 퇴장하기도 했다. <AP> 통신은 이날 가자지구에서 봉사 활동을 해 온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의사 타에르 아흐마드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라파에 살고 있는 8살 고아 소녀의 편지를 사진과 함께 전달한 뒤 자리를 떠났다고 보도했다. 아흐마드는 통신에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퇴장에 대해 그저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아흐마드는 행사가 다가오는 가운데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한다는 뉴스로 인해 괴로워졌고 "회의의 목적이 뭔가? 내가 거기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나?"라는 회의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흐마드는 통신에 "(바이든 정부의) 수사엔 변화가 있다. 하지만 구체적 행동 변화는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AP>를 보면 일부 무슬림 지도자들은 이슬람 금식 성월 라마단 종료를 축하하는 연례 행사인 해당 행사 초청을 가자지구의 참상을 이유로 거부했다. 지난해 거의 350명을 초청해 대규모 행사를 열었던 백악관은 올해 행사를 소규모 비공개 회의 형식으로 대폭 축소했다.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의 국내 정치적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3일 이스라엘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은 전시 내각에 참여 중인 베니 간츠 국가통합당 대표가 기자회견을 열어 "전쟁 발발로부터 약 1년 뒤인 오는 9월" 조기 총선을 치르기 위한 "날짜에 합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간츠 대표는 "이렇게 날짜를 정함으로써 우리는 군사적 노력을 계속하는 동시에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신뢰를 연장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주말부터 이스라엘에서 인질 협상을 촉구하고 조기 총선과 네타냐후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지만 네타냐후 총리는 선거가 "승리 직전"의 국가를 마비시키고 인질 협상에 악영향을 미치며 목표 달성 전 전쟁을 끝내도록 해 "하마스에게 환영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거 요구를 일축한 바 있다.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3일 간츠 대표의 조기 총선 요구에 관해서도 "베니 간츠는 전쟁 중, 국가의 운명적 순간에 자신의 당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유로 사소한 정치 문제를 들고나오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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