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에 태어나 1986년에 생을 마감한 작가의 젠더에 관한 상상력과 고찰이 낡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비극이다.
일본 페미니즘 SF의 선구자로 불리는 스즈키 이즈미의 단편 소설과 에세이를 모은 <여자와 여자의 세상-스즈키 이즈미 프리미엄 컬렉션>(스즈키 이즈미 지음·최혜수 옮김·문학과지성사·436쪽) 속엔 다소 불안정하고 냉소적이지만 호기심에 찬 소녀들과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언뜻 보면 현실 세계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 가공의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여성성과 남성성, 성역할은 모방하고 흉내내며 구성되는 것이지 타고나 고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가는 나아가 학습한 성역할에 따라 몸까지 변화하는 세계를 그려낸다. 단편 <밤 소풍>의 등장인물들은 지구가 아닌 행성에서 지구의 인간 사회를 의미 없이 모방하며 지낸다. 아버지는 "보통 사람들"은 신문을 읽는다며 낡은 정보를 엉터리로 짜깁기 해 가짜 신문을 만들어 매일 아침 읽을 정도다. "남자아이"였던 동생은 부모가 아이는 남자와 여자 한 명씩 있는 게 좋다고 "정한" 뒤 "여자아이 차림"을 하는 "여동생이 되었다." 이후 동생은 "여성지"를 통해 "여자아이는 과일이랑 요구르트를 먹어야"한다는 등을 학습하며 여성성을 흉내낸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몸까지 변화한다. "여자아이 차림을 하고서 얼마 안 있어 동생은 이전보다 몸매가 부드러워졌다. 본인도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표제작인 <여자와 여자의 세상>에선 작가의 현실 인식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자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지구에 "기형"적 체형을 타고 난 "남자족"이 태어났고 그들은 "전쟁과 거기에 쓰는 도구를 발명"하고 "혁명이라든가 일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에 "형태가 없는 것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쏟아 넣"으며 "엄청난 민폐"를 끼쳤다. 여자들에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참아내고 잠이 와도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이었다. 먹을 것을 발견하면 자기가 보호하고 있는 약하고 작은 생물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이윽고 폭력 등을 통해 사회의 지배자가 된 남자들은 입시 전쟁, 교통 전쟁까지 포함해 전쟁만 해대다 공해 탓인지 20세기 후반부터 태어나는 수가 줄어들었다. '현재' 남자는 특수 거주구에 가야 볼 수 있게 됐다. 대부분의 자원을 소모하고 사라진 남자들이 "황폐하게 만든 지구를 여자들은 근근이 지켜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의 묘사는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에서 여성이 남성들이 일으키는 분쟁의 구실이자 때로 유일한 피해자가 되는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분쟁에서 여성이 입는 피해는 물리적으로 약하고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민간인 희생자' 그 이상이다. 두 부족이 평화롭게 살던 마을에서 남성에 의한 다른 부족 여성에 대한 강간이 일어나고 이에 분개한 피해 여성이 속한 부족 남성들이 상대방 부족 여성들을 강간해 '복수'하는 것은 '부족 간 분쟁'이라 불리는 현상에서 여전히 흔히 관찰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남성 간 물리적 폭력도 표출되지만 표면적으로 분쟁 중인 두 종족 남성들은 여성 폭력 측면에선 공모자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일단 '분쟁'이나 '전쟁'으로 이름이 붙고 나면 그것은 '그 집단 모두를 대표하는 싸움'이 되고 여성 폭력은 가려진다.
책에는 단편 뿐 아니라 저자의 에세이도 실려 있어 소설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통로가 돼 준다. 저자는 에세이에서 현대 사회가 "남성 중심 사회"라는 것을 적시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이 "살아가기 위해" 배려, 섬세함, 공감 등 일반적으로 여성의 특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학습함을 시사한다. 그는 에세이 <여배우의 자아>에서 "여자에게 있어서 똑똑함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지성과는 다른 것"이라며 여성들이 생존을 위해 "자기보다 강한 자, 자신을 보호하고 지배하는 자의 의향을 재빨리 알아챈다.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면 너무 늦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떤 대상이든 노력하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유연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또 여자아이는 "순종"하고 "주장"을 내세우지 않도록 훈육된다고 제시한다. 에세이 <메마른 폭력의 거리>에서 저자는 "'여자아이는 귀여워야만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순종을 강요했다. 나중에 남자와 잘 지내려면 주장이나 의견은 방해가 될 뿐"이라며 "열다섯 살까지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되면 자아의 주장을 칭찬받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는 이어 "여자아이는 멋지지만, 자기가 여자아이라는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자아를 주장해도 비난받지 않는 남자라는 성에 동경을 품게 되었다"고 서술했다.
"순종"하고 "주장"도 없고 공감과 "유연함"을 기르도록 훈련된 존재들은 "자기 정당화"를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약자들이 폭력을 당한 뒤 흔히 겪는 "자기 파괴" 충동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타당해 보인다. 저자는 에세이를 통해 "자기 정당화가 약하기 때문에 외부를 향해야 할 증오가 안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 파괴 혹은 자기 처벌 욕구는 이 세계에 대한 적의가 바뀐 것"이라며 "심한 일을 당하는 죽고 싶어지는 것은 그로 인해 타격을 입기 때문이 아니다. 증오의 에너지가 쌓여 그것을 외부로 향하게 하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부딪치면 그 보복이 두렵다. 튕겨서 되돌아오는 것을 버텨낼 수가 없다. 자기를 파괴하는 것만 가지고는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저자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40년 가까이 지났지만 작가의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 성역할이 학습되는 것을 비롯해 성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최근 리시 수낵 영국 총리의 "사람은 원하는 성별이 될 수 없다. 남성은 남성이고 여성은 여성이다"라는 발언을 비롯해 다시금 성별이 신체에 부착된 것이라는 낡은 주장이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수십 년 전 나온 이 작품이 오히려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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