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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곡물협정 복귀 못 끌어낸 에르도안…중재자 역할 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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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곡물협정 복귀 못 끌어낸 에르도안…중재자 역할 흔들?

푸틴, 정상회담 뒤 기존 입장 반복…전문가 "푸틴에게 튀르키예는 서방 향한 유일한 창"

흑해곡물협정 부활을 두고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려 기대를 모았지만 가시적 성과는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서방과 러시아 사이 중재자 역할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4일(현지시각) 두 정상이 러시아 소치에서 회담을 가진 뒤 푸틴 대통령은 "우리는 곡물협정을 재개할 가능성을 고려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러시아 농수산물 수출 제한 해제에 관한 모든 합의가 완전히 이행되는 대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서방은 세계 시장에 러시아 비료과 곡물이 공급되는 것을 계속 차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곡물협정 종료 뒤에도 식량 가격이 상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어 "물리적 식량 부족은 없다"며 러시아의 협정 이탈이 식량 위기를 촉발했다는 서방의 주장을 반박했다.

지난해 7월 유엔(UN)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체결된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가 흑해 봉쇄를 풀고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을 막지 않도록 했지만 러시아 쪽은 자국 농산물과 비료 수출 보장 등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지난 7월 협정 탈퇴를 선언했다. 우크라이나는 해바라기씨유, 밀 등 식량 작물의 주요 생산지로 특히 북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등 인근 지역의 의존도가 커 이들 지역의 식량 안보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의식한 듯 부르키나파소, 짐바브웨, 말리, 소말리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에리트레아 등 아프리카 6개국에 무상으로 곡물을 공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고 이날 이들 국가와의 합의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튀르키예 및 카타르를 통한 아프리카 빈곤국 지원 방안도 새롭게 발표했다. 카타르 재정 지원을 받아 튀르키예가 러시아 곡물 100만 톤(t)을 할인가로 구입 뒤 이를 가공해 아프리카에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러시아가 곡물 제공을 통해 최근 몇 년 간 연이은 쿠데타로 정세가 불안한 데다 옛 식민 지배국인 프랑스 및 서방에 대한 반감이 퍼지고 있는 아프리카를 달래며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시도로도 풀이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회담 뒤 "근시일 내에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해결책에 도달할 것으로 믿는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유엔과 튀르키예가 러시아에 대한 새로운 제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협정 부활 땐 수출 곡물이 유럽보다 아프리카로 더 많이 향해야 하며 "우크라이나가 접근 방식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푸틴 대통령은 곡물협정을 통해 수출된 곡물 대부분이 빈곤국이 아닌 부유한 국가들로 향하고 있다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언급한 새 제안엔 러시아가 요구해 온 러시아 은행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시스템 재연결 등이 포함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은 튀르키예 현지 관리들이 "튀르키예 정부가 제한적인 방식으로 국제 결제망에 복귀할 수 있도록 서방 국가들을 설득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곡물과 비료를 실은 선박에 대한 보험 재개도 거론된다. 러시아 쪽은 곡물협정이 러시아 곡물 및 비료 수출을 보장했음에도 국제결제망, 보험 등 서방의 금융 제재로 사실상 거래가 제한됐다고 본다.

기대를 모았던 이번 회담이 가시적 성과 없이 끝나며 에르도안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온다. 튀르키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국이지만 러시아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양쪽 모두에서 실리를 챙기는 동시에 중재자 역할도 해 왔다. 튀르키예는 나토 동맹국이지만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오랜 기간 어깃장을 놓으며 염원하던 F-16 전투기 이전 추진을 미국으로부터 이끌어 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와의 소통 창구 역할을 맡아 흑해곡물협정 및 포로 교환을 중재하기도 했다.

다만 최근 몇 달 간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보는 튀르키예가 다소 서방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다. 튀르키예는 지난 7월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동의했고 같은 달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를 방문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회담 뒤 "우크라이나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나토 회원국이 될 자격이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저지를 전쟁 명분 중 하나로 내세울 정도로 꺼리고 있는 상황이다. 또 지난해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에 러시아군에 항전하다 포로가 돼 튀르키예에 머물던 아조우연대 지휘관들을 지난 7월 우크라이나로 돌려 보내 러시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그러나 이번 회담이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관계가 다방면에서 긴밀히 얽혀 있음을 상기시키며 튀르키예가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행보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고 짚었다. 매체는 "나토 동맹국들의 러시아 경제를 마비시키고 세계 에너지 시장에 접근을 제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정상은 무역을 늘리고 에너지 문제에 대해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튀르키예 기업들은 군수물품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기계, 고무, 부품 등을 러시아에 수출했고 러시아는 튀르키예 경제가 불안한 상황에서 가스 대금 지불 연기를 허용해 주기도 했다. 러시아는 지중해 연안에 튀르키예의 첫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 중으로 푸틴 대통령은 이날 이 중 첫 번째 발전소가 내년에 가동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했다.

알렉산더 가부예프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 소장은 양국 대표단에 중앙은행 총재 및 드미트리 슈가예프 러시아 연방 군사기술협력국장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을 들어 양국 무역에서 자국 통화 거래 확대 및 군사 문제 또한 논의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전문가들은 튀르키예의 중재자 위치가 튀르키예는 물론 러시아에도 나쁠 것이 없어 한동안 유지될 것으로 봤다.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위치한 베이코즈대 아멧 카심한 국제관계학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푸틴 대통령이 나토 국가 지도자 중 하나와의 공개 소통으로 나머지 나토 동맹국들에 간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나토 내부에서 "때로 동맹에 전술적으로 중요한 논의를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구성원"의 존재를 러시아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튀르키예 외교관 출신이자 이스탄불에 기반을 둔 싱크탱크 경제외교정책센터(EDAM)의 시난 울겐 국장도 미국 CNN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최근 친서방적으로 보이는 행보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이 서방으로 향한 유일한 "창문"인 튀르키예와의 관계에 계속해서 가치를 부여할 것으로 봤다.

튀르키예가 최근 서방에 기운 듯한 행보를 보인 것 또한 중간적 위치를 유지하며 러시아 쪽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DC 소재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객원 연구원 아슬리 아이딘타스바스는 CNN에 이전엔 양 지도자 사이에서 푸틴 대통령이 에르도안 대통령보다 우위를 점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러시아가 약해지는 것처럼 보이자 에르도안 대통령이 "푸틴과의 충돌 없이" 특정 영역에서 튀르키예의 영향력을 키우려 하고 있다고 봤다.

한편 <로이터>는 4일 우크라이나 쪽이 러시아가 루마니아 국경과 접한 우크라이나 남서부 이즈마엘 인근을 공격하던 중 러시아 무인기(드론)이 나토 회원국인 루마니아 영토에 떨어져 폭발했다고 주장했지만 루마니아 국방부가 이를 "단호히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루마니아 국방부는 "러시아 공격 수단이 루마니아 영토나 영해에 직접적인 군사 위협을 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나토 회원국은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집단방위조약의 보호를 받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4일(현지시각) 러시아 소치에서 회담한 후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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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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