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희생자 1500만 명(군인 800만, 민간인 700만)을 냈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들은 그 전쟁을 '큰 전쟁'(Great War)로 불렀다.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젊은이가 뮌헨의 술집에서 생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아! 지난번 그 '큰 전쟁'에서 말이야, 내가 하마터면 죽을 뻔 했어"라고 말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큰 전쟁'이 끝나고 21년 뒤에 다시 '더 큰 전쟁'이 벌어지자, 1,2차 세계대전이란 구별이 생겨났다. 흔히 한 세대를 나누는 30년도 지나기 전에 우리 인류는 역사상 가장 큰 전쟁에 뛰어든 셈이다.
최소 5000만 명의 생목숨을 앗아간 제2차 세계대전은 추축국의 주요 지도자들이 죽으면서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는 도망치다가 파르티잔에게 붙잡혀 죽은 뒤, 밀라노 광장의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렸다(1945년 4월28일). 흥분한 군중들은 시신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런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무솔리니 같은 수모를 피하려고 '내가 죽으면 시신을 불태우라'는 말을 부하들에게 되풀이했다.
"나는 내 시신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 채찍을 든 군중의 오락거리가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가 되겠지만 말이다."(Ian Kershaw, <Death in the Bunker>, Penguin Books, 2005, 47쪽).
바로 얼마 뒤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고, 시신은 불태워졌다(1945년 4월30일). 소련군은 히틀러의 치과 기록을 살펴보고 그의 시신임을 확인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둘 다 애인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히틀러가 남긴 유서 가운데 들어 있는 내용은 이렇다.
"내가 가진 것은 당의 소유가 된다. 당이 없어진다면 국가 소유이고, 국가마저 파괴된다면 내가 내린 결정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파면이나 항복의 수치에서 벗어나려고 죽음을 택한다. 지난 12년 동안 민족에게 봉사하면서 거의 날마다 업무 대부분을 처리해온 이곳에서 즉시 불태워지는 것이 나의 뜻이다"(Chris Bellamy, <Absolute War: Soviet Russia in the Second World War>, Alfred Knopf, 2007, 648쪽).
스탈린, '10만 명 처형하자'고 주장
1945년 5월7일 독일은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은 막을 내렸다. 다음날인 5월8일은 유럽 전승 기념일이 됐다. 여기서 '무조건'이란 승자가 패자를 어떻게 처리하든 토를 달 수 없다는 조건을 가리킨다. 독일이 항복할 무렵, 일본은 자국 영토인 이오지마를 미군에 이미 내주었고, 오키나와를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었다. 전쟁의 흐름은 추축국의 패전으로 가는 내리막길에서 베를린-로마-도쿄를 잇는 추축국 전쟁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로 관심이 쏠렸다.
전쟁이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부터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나 일본의 도조 히데키 같은 패전국 지도자 처벌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았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윈스턴 처칠이 남긴 메모에 따르면, 1943년 12월 테헤란회담이 열렸을 때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면 고위직부터 말단 장교까지 10만 명을 처형하자'는 제안을 불쑥 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처칠은 물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테헤란회담이 열릴 무렵엔 당면한 전쟁의 승기를 어떻게 잘 이어갈 것인가에 무게중심이 있었기에, 전범처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았다. 스탈린이 지나가는 말처럼 불쑥 내뱉은 '10만 처형론'도 1회성 발언으로 넘어갔다. 돌이켜 보면, 스탈린이 그런 극단적인 말을 할만도 했다. 독일의 침공으로 적어도 2000만 명에 이르는 큰 인명피해를 입은 소련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복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결처형이냐, 전범재판이냐
전쟁 중 연합국 지도자들은 전범 처리와 관련, 크게 4가지 방안을 놓고 저울질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에게 그랬듯이 재판 없이 외딴 곳으로 유배를 보내 고립시키거나 △즉결 처형하거나 △유배나 재판 없이 그냥 풀어주거나 △재판에 붙여 처벌하는 방안들이었다. 이 가운데 즉결처형이냐 전범재판이냐가 논쟁거리로 자리 잡았다.
소련은 테헤란회담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스탈린이 꺼냈던 즉결처형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고위직 정치인들과 전쟁범죄 행위가 확실한 5만 명쯤을 새벽에 총살해버리고 전범 처리를 끝내자'는 얘기도 나왔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 지도부도 얄타회담(1945년 2월) 직전까지는 재판을 거치지 않는 즉결처형 쪽에 마음이 가 있었다. 처칠은 1945년 초만 해도 "악질범은 예전의 처리 방식대로 군대에서 총살해버리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도 처음에는 나치 전범들은 즉결 처형하는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만약에 재판을 하게 되면 나치 전범들에게 그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의 최종 결정은 '재판을 통한 전범 처리' 쪽이었고, 다른 연합국 지도자들도 미국 쪽 결정을 따랐다.
이장희(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44년 10월 미 국방부가 전범 처리방식과 관련해 작성한 내부 문서를 인용하면서, 미국이 소련의 즉결처형 주장에 반대하고 전범 재판을 고집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려준다. 아래는 미 국방부 문서의 일부다.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뒤 연합국은 히틀러나 히믈러(SS 친위대장) 같은 가장 극악한 나치 전범자들을 재판이나 심문하지 않고도 처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미 국방부)는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것(즉결처형)은 확실하고 빠른 처리방식이라는 장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연합국 모두가 합의해온 가장 기본적인 정의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경우의 위험성은 독일인들이 이 범죄자들을 순교자로 숭배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장희,「도쿄국제군사재판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대한 국제법적 비교 연구」동북아역사논총 25호, 2009년에서 재인용).
즉결처형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고 전범들을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녔다. 위의 미 국방부 문건을 보면, 미 국방부가 실제로 '공정한 재판'이 중요하다고 여겼을 걸로 믿고 싶지만, 즉결처형을 할 경우 일어날 부작용과 혼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재판을 통한 전범처리' 방식은 그 뒤 일본 전범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재판 가닥 확정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면 이렇다. 1943년 10월 모스크바에서 미국·영국·소련 등 3국의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논의 끝에 '독일의 잔학행위에 관한 선언'이 나왔다. 이 선언으로 연합국은 독일의 '잔학행위, 학살, 대량처형의 증거'들을 모아 전쟁이 끝나면 독일의 주요 전범자들을 처벌하기로 합의했다. 이 무렵까진 처벌의 형식을 즉결 처형으로 할지, 재판을 통해서 할지는 확정된 상태는 아니었다.
독일의 주요 전범들을 붙잡아 재판에 넘긴다는 방침은 연합국 지도자들이 다시 모인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확정됐다. 독일은 항복했지만 일본이 아직 버티고 있던 시점에 소련의 동독 점령지에서 열린 포츠담회담(1945년 7~8월)에선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세운다'는 얄타회담에서의 합의를 다시금 확인했다. 미국·영국·소련 3국 지도부가 발표한 '포츠담선언' 제5항은 '연합국의 포로를 학대한 자를 포함한 일체의 전쟁범죄자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가하게 될 것이다'라고 못 박았다.
전범 처벌에 관한 포츠담선언은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국제군사재판소가 열리는 길을 마련했다. 곧 이어 1945년8월8일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은 '런던헌장'(London Charter)을 채택했다. 헌장의 정식 명칭은 '유럽 추축국 주요 전쟁범죄자 기소 및 처벌에 관한 협정 및 국제군사법원 헌장'(이른바 '뉘른베르크 헌장')이다. 이로써 나치 지도부의 전쟁범죄를 심판하는 국제군사재판소의 법적 근거가 마련됐고, 뉘른베르크에서 1945년 11월에 시작된 재판에 당시 전세계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다.
재판 장소를 뉘른베르크로 잡은 이유
전범재판이 왜 뉘른베르크에서 열리게 됐을까. 여기에는 승전국들 나름의 '정치적 보복' 심리가 깔려 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 히틀러 정권의 제3제국 출발 과정에서 특별한 정치적 인연이 닿아 있는 도시였기에, 나치 정권을 징벌하는 차원에서 선택됐다. 나치당 1차 전당대회(1923)는 뮌헨에서, 2차 전당대회(1926)은 바이마르에서 열렸다. 그 다음 전당대회는 1927년부터 1938년까지 해마다 뉘른베르크에서 치러졌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환상적인 조명 연출과 횃불 행진 등 엄청난 규모로 진행된 정치 집회를 떠올린다. 전당대회는 나치당의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리는 정치 행사였다. 그렇기에 아돌프 히틀러 개인으로서도 뉘른베르크를 자신의 '정치적 성지'로 여길 만했다. 뉘른베르크는 '나치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도시였다. 바로 그런 곳에 전쟁범죄를 다루는 국제군사재판소를 세워 나치의 지도급 인물들을 피고석에 앉힌다는 것은 곧 나치의 존재 가치를 부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몇 해 전에 그곳에 가보니. 전당대회장으로 쓰였던 건물은 지금은 나치를 고발하는 상설 전시관, 교육관, 공연장 등으로 쓰이고 있었다).
전승국이 뉘른베르크를 전범재판소로 잡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곳에서 인종차별 악법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뉘른베르크법'이 만들어졌다. 1935년 9월10일부터 1주일 동안 열렸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는 2개의 악법이 논의됐다. 하나는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률'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시민법'이다. 이 2개의 법을 흔히 '뉘른베르크법'이라 일컫는다.
법안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유대인과 저항분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으로, 지난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차별)보다 더 지독한 악법임을 알 수 있다. '독일인 혈통 명예 보호법'에 따르면, 유대인과 독일인 간의 혼인, 성관계가 금지된다. '국가시민법'은 오직 독일인의 혈통을 가진 자만이 시민권을 가질 수 있도록 못 박았고, 체제에 불만을 지닌 정치범들의 시민적 권리도 박탈할 수 있게끔 됐다.
만약 어떤 유대인이 독일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서, 몰래 결혼을 했다가 들키면 어떤 징벌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유대인은 감옥에 갇히고, 정해진 형기를 마친 뒤엔 다시 비밀경찰(게슈타포) 손에 잡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철학자 아도르노가 겪은 '혹독한 겨울'
뉘른베르크법이 나오기 2년 반 앞서인 1933년 4월 나치 정권과 독일 의회는 유대인을 비롯한 외국계 혈통을 지닌 사람은 법조계나 교육직을 포함한 공직을 지닐 수 없도록 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여기에 덧붙여 뉘른베르크법이 나오자, 유대인들은 치명타를 입었다. 독일의 보통 사람들은 사업 관계든 개인적 친분이든 유대인과 관계 맺기를 꺼리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상점엔 드나드는 손님이 줄어들었고, 끝내 문을 닫고 폐업해야만 했다.
유대인이 독일에선 도저히 못 살겠다고 이민을 가려고 마음먹어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청난 금전적 손실이 따랐다. 집을 팔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독일을 떠나려면, 거의 90%쯤을 세금으로 바쳐야 했다. 1941년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으로 대량 학살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유대인들에겐 '혹독한 겨울'이 닥쳐왔던 셈이다.
1933년 당시 독일 유대인 숫자는 52만 명 쯤이었다. 이 가운데 80%가 독일 시민권자였고, 20%는 동유럽 등에서 독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금전적 손실보다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여겨 독일을 떠났던 유대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쟁이 끝난 뒤 옛집을 찾아 독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유대인이 어떤 집이나 건물을 놓고 말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전후 독일에서 흔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같은 유대인이자 친구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20세기에 왜 우리 인류는 새로운 야만 상태로 돌아가는가'를 다룬 화제작 <계몽의 변증법>(1947)을 썼던 사회철학자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두 주요 구성원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1949년 겨울 아도르노는 프랑크푸르트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전쟁 중 공습으로 소이탄을 맞아 파괴된 채였고, 소유권은 남에게 넘어가 있었다.
[아도르노가 살았던 집은 나치가 통치하던 시절에 헐값에 팔린 뒤였다. (전쟁이 끝나고 4년 뒤 독일로 되돌아온) 아도르노는 새로운 집주인과 언성을 높이며 충돌했다. 심한 말싸움을 했다. 훗날 그는 한 편지에서 자신이 당시 '격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썼다. "그때가 내가 유일하게 이성을 잃은 때였다. 나는 집주인은 나치, 살인자라고 불렀다"](이본 셰라트, <히틀러의 철학자들> 여름언덕, 2014, 367쪽).
"감옥 가서 수모 당하느니 죽겠다"
뉘렌베르크와 나치에 얽힌 이야기를 하다가 유대인 사회철학자 아도르노에까지 글이 번졌다. 다시 전범재판 쪽으로 돌아가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 기소됐던 나치 독일의 전쟁지도부는 모두 24명이었다. 그 가운데 2명은 재판 도중에 빠졌다. 친히틀러 노선의 정치인으로 나치 노동조합들의 통합 조직인 '독일노동전선'의 총재였던 로베르트 라이는 기소된 뒤 수건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독일의 군수기업 크루프 중공업의 실소유주로 나치 독일의 전쟁 물자를 댔던 구스타프 크루프는 기소된 뒤 건강이 나빠져 풀려났지만 곧 죽었다.
재판이 시작됐을 때 실제로 법정에 선 사람은 21명이었다. 그들은 나치의 5대 권력기관(제3제국 내각, 나치당 지도부, 나치 친위대/보안대, 비밀경찰조직인 게슈타포, 총참모부)에서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았다.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NSDAP)을 이끌었던 마르틴 보어만은 궐석 재판을 받았다.
보어만은 독일 기업인들로부터 뜯어내 마련한 당의 운영자금을 관리했었다.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 남긴 유서에다 자신의 개인재산 관리를 맡긴다고 쓸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도망쳐 어딘가 숨어있을 것으로 믿어졌지만, 1972년 시신이 발견됐다. 1945년 베를린을 급하게 탈출하려다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는 피고석에 앉은 나치 주요 전범자들이 21명보다는 더 많아야 했지만, 패전 바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도망친 이들이 빠진 상태였다. '감옥 가서 수모를 당하느니 죽겠다'며 자살한 전범자는 아돌프 히틀러 총통을 비롯,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 베른하르트 루스트 교육장관, 헤르베르트 바케 식량장관,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공군 원수, 한스 크렙스 육군참모총장, 하인리히 히믈러 친위대(SS)대장 등이다. 히믈러는 도망치다가 영국군 검문에 걸려 붙잡힌 뒤, 입안에 숨겨놓은 독극물 캡슐을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당연히 뉘른베르크 법정 피고석에 앉았을 것이다.
'평화 깨뜨린 죄'란 새로운 죄목
이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진 없던 새로운 두 가지 죄목이 적용됐다. 첫째는 '반평화 범죄'(crimes against peace, 평화를 깨뜨린 죄)다.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나라 영토를 빼앗으려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조약·협정·서약에 위배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하고 실행한 일, 또는 이들 행위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계획이나 모의에 참가한 일'이다(뉘렌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6조,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5조). 1939년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다름 아닌 '평화를 깨뜨린 죄'를 저질렀다고 지적된다.
둘째는 '반인도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다.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정치적·인종적·종교적 박해와 집단살해(genocide) 행위를 가리킨다. 전쟁 중에 일반 민간인에게 이루어진 살육행위, 민족 집단을 말살시키려는 대량학살, 강제노동과 강제이동을 비롯한 비인도적 행위와 박해가 여기에 포함된다.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두말할 것 없이 '반인도 범죄'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나치에 희생됐는지는 논란거리다. 흔히 600만 명이 희생됐다고 하지만, 숫자가 부풀려진 것으로 지적 받는다. 따져 보면 터무니없는 지적은 아니다. 심지어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극단적인 억지 주장마저 들린다. 마치 3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난징 학살(1937)을 두고 '난징 학살 따윈 없었다'는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과 맥락이 같다(유대인 희생자 규모 논란에 대해서 본 연재에서 따로 살펴볼 예정이다).
잭슨 수석검사, "독이 든 성배(聖杯) 넘겼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세계평화를 위협한 범죄를 다루게 된 것에 엄중한 책임을 느낀다. 우리가 이들 피고인들을 심판하는 기록이 후세에 역사가 우리를 심판할 기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들 피고인들에게 독이 든 성배(聖杯)를 넘기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입술에도 그것을 대는 것과 같다(To pass these defendants a poisoned chalice is to put it to our own lips as well). 우리는 이 재판이 정의를 이루려는 인류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후세에 인정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 대한 초연함과 지적 진실성을 지녀야 한다."(https://www.roberthjackson.org/)
위에 옮긴 글은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법정이 열리자, 미국인 수석검사 로버트 잭슨이 했던 말이다. 잭슨 수석검사의 발언에서 흔히 '승자의 재판'이라는 지적을 의식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는 이 재판이 '승리한 국가들이 멋대로 휘두르는 권력 행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그전까지 국제 형사법에 없던 '평화에 반한 죄'나 '인도에 반한 죄'를 기소 이유로 삼아 전쟁범죄자들을 단죄하기로 한 것을 국제법학계에선 이른바 '뉘른베르크 원칙'이라 부른다. 이 원칙은 1946년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인되었고, 도쿄 극동군사재판을 비롯한 다른 곳에서의 전쟁 범죄 재판에 대한 구속력 있는 법적 선례가 되었다. 뉘렌베르크 재판보다 6개월 늦게 열린 도쿄 재판(첫 심리일은 1946년 5월3일)도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라 '평화에 반한 죄'나 '인도에 반한 죄'를 주요 전범자(A급 전범자)에게 적용했다.
잭슨 수석검사는 '미래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이 법이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되풀이해 강조했다. 그러면서 '승자가 패자에 강요하는 재판'이 아니라 했다. 과연 그럴까. 잭슨이 말하는 '법'은 그전까지 없던 법을 적용한 소급입법이란 지적을 받았고, 강대국이자 전승국인 미국에겐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는 물론 미래에도 적용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판소의 주요 구성원(판사, 검사)이 전승국 출신들로 채워졌고 중립국이나 패전국 출신 법조인은 없었기에 '공정성' 문제가 지적됐다(소급입법과 공정성 지적에 대해선 다음 주에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미 대법원장, "승자가 패자에게 벌하는 것, 역겹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의 판사 8명은 전승국 4개국(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서 각기 2명씩 맡고, 검사도 전승국 4개국에서 각기 2명씩 보내 검찰 소추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부 구성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개 전승국 사이에 비교적 공평하게 이뤄졌다.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처럼 미국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휘둘리진 않았다(도쿄재판소의 문제점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따로 살펴봄).
수석검사로 임명되기 전에 로버트 잭슨은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로 있었다. 당시 연방대법원장 할란 스토운(대법원장 재직기간은 1941-1946)은 잭슨이 뉘른베르크 재판소의 수석검사로 가서 '승자의 재판'에서 악역 역할을 맡은 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남긴 말을 들어보자.
"이 얘기를 내 이름을 달고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미국 대법원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나 이를 승낙한 정부의 결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밝혀둔다. 로버트 잭슨 판사가 미국측 수석검사에 임명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기 전에 나는 이와 관련해 아무 통보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보건대, 뉘른베르크 재판은 패전국이 전쟁을 도발했다는 죄목으로 승자가 패자를 벌주고 또 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다. 나는 이 재판이 무슨 법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포장되는 것을 보면서 심한 역겨움을 느낀다"(리처드 하우드, <정말 600만이 죽었나> 리버크레스트, 2014, 66쪽).
스토운 연방대법원장은 '잭슨 검사가 뉘른베르크에서 고도의 린치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그의 눈에 비친 뉘른베르크 재판은 '신성함을 가장한 사기극'이다. 한 나라의 대법원장이 내뱉은 말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극단적이고 과격하게 들리지만, 지난 주 글에서 E.H.카, 레이몽 아롱, 헨리 키신저 같은 국제정치의 현실주의자들이 전범재판을 승자의 재판이라고 여기며 반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음 주 글에서는 앞에서 짧게 짚어본 소급입법과 공정성 문제 등 뉘른베르크 재판을 둘러싼 논란을 살펴본다. 아울러,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군수장관)가 20년 동안 징역을 살면서 쓴 회고록을 바탕으로, 나치 정권의 2인자 행세를 했던 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주요 전범 피고들의 법정 발언과 미묘한 심경 변화, 재판의 결과 등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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