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대학교 4학년인데, 저뿐만 아니라 제 주위의 많은 페미니스트 동료들, 그리고 여성들은 스스로를 '강남역 세대'라고 생각하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이후로 다시는 강남역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다짐과 기억이 이어져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조혜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7주기 추모행동 기획단 활동가
조혜원 씨는 2년 전 이날 처음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추모 현장에 왔다. 당시엔 "그저 우연히 포스트잇을 하나 남기던 사람"이었다. 꼭 2년이 흐른 2023년 5월 17일, 조 씨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7주기 추모기획단의 활동가가 되어 같은 자리에 섰다. 스스로를 "강남역 세대"라고 정체화한 그는 "이제는 내가 그 자리를 지키고 힘을 주는 선배이자 동료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올해로 3년째 강남역 추모집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다경 활동가도 비슷한 경험을 고백했다. 3년 전 이날, 이 씨는 "페미니스트라는 게 알려지는 것이 너무 두려워" 광장 뒤편에 숨어 울었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창피"했지만, 페미니스트인 자신이 "이 사회에서 혼자라고 느껴져"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광장 앞 발언대에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지난 2016년 일어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으로부터 7년이 지났다. 국내의 가장 대표적인 여성혐오·여성폭력 사건으로 꼽히는 해당 사건은 당시 수많은 여성들의 공감과 분노를 이끌어내며 여성주의 운동의 대중화,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끌었다. 17일 저녁, 그 리부트의 결과물이 강남역 거리에 펼쳐졌다. 7년의 시간 동안 방황과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함께 겪은 '강남역 세대'들이 "강남역 이후 7년, 지금 여성들은 안전한가" 물으며 거리로 나왔다.
34개 여성·인권단체가 공동 구성한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7주기 추모행동'은 이날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광장에서 강남역 사건 7주기 추모집회 '누구도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없다'를 개최했다.
특히 이날 현장엔 페미니스트 대학생 연합동아리를 비롯해 고려대, 경희대, 광주여대, 동국대, 동덕여대, 숭실대, 이화여대 등 각 대학교 페미니즘·인권 동아리 소속 청년 활동가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청소년·청년 시기 강남역 사건을 접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말한다.
현장을 찾은 류현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는 "(사건이 있었던) 2016년 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게 왜 여성혐오인지, 여성혐오란 게 대체 뭔지 묻고 다녔다"라며 사건 당시를 회상했다. 류 활동가는 사건 당시 현장을 채웠던 여성들의 추모 포스트잇을 보며 '사회적 죽음'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고 말한다. '강남역'의 경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고, 그는 "그렇게 지난 7년을 페미니스트로서 살았다."
"이제 누군가 저에게 '강남역 사건'이 무슨 의미를 가지냐고 묻는다면, 여성이라서 죽는 일, 여성으로서 사는 일에 대해 사회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계기라고 대답할 겁니다." -류현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
강남역 여성살해사건과 같은 젠더기반 폭력 사건은 2016년 이후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2017년엔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이 일어나며 국내에서도 수많은 성폭력 사건이 폭로됐고, 2020년에는 이른바 N번방 사건으로 불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일어나며 디지털 성폭력 사건의 실체가 전 사회에 드러났다. 지난해만 해도 인하대 성폭력·사망 사건, 신당역 스토킹 살해 사건이 일어나면서 "여성폭력 문제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시민사회의 분노가 들끓었다.
이날 모인 시민들은 "여전히 여성폭력이 만연한 이 사회의 성불평등 구조"를 지적하며, 한편으론 그럼에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인식을 보이고 있는 현 윤석열 정부의 반여성적 기조를 규탄했다.
오은선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신당역 젠더 살인사건, 인하대 강간 살인사건 등 이 모든 사건들이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떤 존재로 취급해왔는지 나타내고 있다"라며 "지난 7년 동안 저는 딸을 하나 얻었는데, 제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이는 이런 퇴행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고려대학교 여학생위원회의 심청 활동가는 "(2016년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이 묻지마 살인인 것은 인정하였으나 여성혐오에 기반한 살인이라는 점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7년 전 경찰의 그러한 입장 표명이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삶과 목숨을 앗아가는데 일조한 것"이라며 "(그리고)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N번방 사건, 우울증갤러리 사건, 파주골 노동자 탄압 등 현재까지도 여성혐오 범죄는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7년 전 사건의 젠더 기반 특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수사기관 내 성인지 감수성 부재 논란을 낳은 경찰의 입장은 최근엔 정부와 여당 차원에서 다소 정치적으로 답습되고 있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공언한 바 있는 윤석열 대통령은 물론이고, 신당역·인하대 사건 당시 사건의 젠더 기반 성격을 적극적으로 부정한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도 그 한 축이다.
이날 모인 시민들은 이 같은 태도로 일관해온 정부의 지난 1년이 "퇴행이자 여성 지우기"에 몰두한 1년이었다며 "윤석열 정부의 퇴행의 정치에 여성은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여성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더욱 연대하고 단결해 전진해 나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집회를 주최한 중심단체 서울여성회의 박지아 부회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여성들은 가장 먼저 타깃이 되었고 퇴행의 직격탄을 맞았다. 여성과 여성운동을 향한 '백래시'는 여성들이 목소리 내는 곳마다 따라와 울려지고 있다"라며 "여성폭력을 좌시하지 않고 해결할 힘을 모으기 위해, 백래시에 같이 맞설 힘을 모으기 위해 오늘 이 자리를 기획했다"고 집회의 취지를 밝혔다.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현장마다 따라오는 백래시'는 이날 현장에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반 페미니즘 단체 신남성연대가 이날 집회 현장 인근에 시위 차량을 몰고 와 맞불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경찰의 제지에도 집회 현장에 난입해 "페미니즘을 규탄한다", "페미니즘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추모집회 주최 측은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 등 "여성 지우기에 박차를 가하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가 이러한 백래시에 정치적인 힘을 부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이날 발표한 성명서에서 "여성이 정당한 목소리를 내어도 공격의 대상이 되고 신상이 털리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백래시의 현실"이라며 "그러나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강하게 '우리'가 되어갈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에 참여자들은 윤석열 대통령, 김현숙 여가부 장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 등 정부여당 내 '여성 지우기'의 대표격 인물로 불리우는 이들을 인쇄한 현수막에 강남역 사건에 대한 추모 포스트잇 메시지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작은 포스트잇이 모여 만든 글자는 이윽고 이날 모인 '강남역 세대'가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문장을 완성했다.
"퇴행을 거슬러, 페미가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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