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실제로 송태섭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실제로 송태섭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성우 엄상현

지난 주말,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슬램덩크)가 누적 관객수 442만 명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봤다. 한국어 더빙판에서 주인공 송태섭의 목소리를 연기한 엄상현 성우가 떠올랐다.

슬램덩크가 개봉한 이후 나는 그와 두 번의 만남을 가졌다. 첫 번째 만남은 영화가 개봉된 직후 한 라디오 방송에 같이 출연하면서 이루어졌다. 방송이 끝난 후, 나는 그에게 "슬램덩크가 한국에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1위 기록을 깼으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고, 그는 "감사하다. 열심히 홍보하겠다"고 했다.

엄상현 성우와의 두 번째 만남은 '슬램덩크에 미친 자', 이른바 '#슬친자' 열풍이 불며 누적 관객수 300만을 앞두고 있던 2월, 내가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 우면동의 한 삼겹살 집에서 만났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노우에 다케히코 감독, 2022) 스틸컷.

- <슬램덩크> 신드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인기를 실감하고 있나?

"요즘 지인들이 전화해서 하는 첫 마디가 "뚫어! 송태섭"이다.(웃음) 식당에서도 "혹시 송태섭 더빙하신 분?"이라고 물어봐주시고 인사해주시는 분들이 생겼다. 성우 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너무 감사하지만 <슬램덩크>라는 좋은 작품에 숟가락만 얹은 것뿐인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가끔은 민망하기도 하다."

- <슬램덩크>가 이 정도로 흥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빙을 하면서 작품을 봤을 때 작품도 좋고, 또 <슬램덩크> 팬들도 있으니까 어느 정도 흥행은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 일 줄은 몰랐다. 특히 더빙판이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지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 더빙판이 더 화제가 되고 있는데, 너무 겸손한 표현 아닌가?

"<슬램덩크> 이전까지 극장판 영화 더빙에서 내가 맡은 캐릭터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가 <쿵푸팬더>의 주인공 '포'였다. 혹시 알고 계셨나?"

- 아, <로보카 폴리>의 '폴리'로만 알았지 <쿵푸팬더>의 '포'였는지는 몰랐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내 주위 사람들도 잘 모른다. 사실 <쿵푸팬더>를 더빙판으로 보신 분들이 얼마나 되겠는가?!(웃음)

솔직히 처음 <쿵푸팬더>의 '포' 역할을 맡게 됐을 때 '이 유명한 영화의 주인공을 내가 연기한다고?'라는 생각에 엄청나게 흥분했다. 처음 이야기하는 거지만, '포' 역할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오래 전부터 계획했던 해외 여행 중이었다. 그것도 비행기에서 내린 여행 첫 날이었다. 너무 하고 싶어서 아내에게 허락을 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녹음을 하면서도 '잭 블랙이 연기한 '포'를 내가 연기한다고?'라는 생각에, 정말이지 열심히 했다. 영화는 예상대로 엄청나게 흥행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막판의 이야기다. 해외여행도 포기하고, 그렇게 긴장하면서 열심히 했는데도 내가 '포'를 연기한 건 아무도 모르더라.(웃음) 이 때 경험을 통해 외화 더빙은 작품이 아무리 재밌고 흥행해도 더빙판과는 상관없는 이야기, 나같은 한국어 더빙 성우와는 더더욱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슬램덩크>와 송태섭이, 이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해줬다. 연기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커졌다. 앞으로 다른 작품들의 더빙을 맡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임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슬램덩크>와 송태섭은 내 성우 인생에 커다란 분기점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 하지만 예전에 나온 모바일 게임에서는 송태섭이 아닌 서태웅의 목소리를 연기한 걸로 알고 있다.(웃음)

"(당황해 하며) 아…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때는 서태웅뿐만 아니라, 북산고 5인방의 목소리를 다 녹음했다. 그리고 나서 제작사에서 내 목소리를 서태웅 캐릭터에 사용한 건데, 게임이 나오기 전까진 나도 내가 서태웅인지 몰랐다.(웃음)"

- 슬램덩크는 제작사인 '도에이 에니메이션'이 TV판에 없는 산왕전 IP를 확보하기 위해 10년 이상을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에게 매달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조만간 산왕전 IP를 활용한 새로운 게임이 출시될 가능성도 높은데, 만약 더빙 참여 제안이 온다면 그땐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가?

"죽어도 송태섭이다! 만약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조건 송태섭만 볼 거다! 송태섭이 아니면 안 할 거다!"

- 사람이 갑자기 확 달라진 것 같아 살짝 당황스럽다.(웃음) 우리가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웃음) 스스로를 농구팬도 #슬친자도 아니라고 말했던 걸 기억하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지금은 #슬친자다!(웃음) 지난 번에 말했듯이 1990년대 나는 밝은 분위기의 명랑 만화, 개그 만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드래곤볼>과 <슬램덩크>에 열광할 때, 난 <닥터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보단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가 더 좋았다. 물론 그때도 <슬램덩크> 만화를 다 보긴 했다.

하지만, 농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몰입이 잘 안됐다. 그래서 이번에 송태섭 역할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많이 걱정하기도 했다. 처음엔 송태섭을 맡아 달라길래 '송태섭은 만화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잖아. 휴,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송태섭이 주인공이란 말을 듣고 얼마나 부담됐는지 모른다.

그런데 영화 속 송태섭 이야기는 달랐다. 만화에는 없는 송태섭의 스토리가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쉽게 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요즘은 '송태섭 역할을 맡게 돼 다행이다, 송태섭을 하길 잘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마치 만화 속에 나오는 '북산에 들어오길 잘했어'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 1월 초에 만났을 때와는 달리 송태섭의 '찐' 팬이 된 것 같다(웃음)

"N차 관람 횟수가 늘어나면 이렇게 됐다. N차 관람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더빙을 할 때는 몰랐던, 나와 송태섭의 닮은 점들이 보였다."

- '송태섭과 닮았다'는 게 무슨 말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대학시절 꿈은 성우가 아닌 배우였다. 하지만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몸의 절반이 마비되는 사고를 당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반신마비' 생활과 치료를 3년 가까이 해야 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당연히 배우의 꿈도 접어야 했다.

N차 관람이 쌓이던 어느 날, 송태섭이 바이크 사고를 당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그때 기억이 떠오르더라. 송태섭이 사고 이후 다시 농구를 하기 위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해변 백사장을 달리는 장면에서는 투병 생활 이후, 영화 쪽 관련 일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뛰어다니던 내 모습이 겹쳐져 눈가가 촉촉해졌다.

영화에서 송태섭이 1학년이던 시절 벤치에 앉아 "패스를 해야지" 하면서 답답해 하고 경기에 나가고 싶어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성우 초년생 시절, 더빙을 하고 싶어도 일이 없던 시절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져 콧물까지 나오더라. 

또 더빙을 할 때는 몰랐는데, 극장에서 "힘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 한다"는 송태섭의 대사를 듣고 울컥했다. 녹음실에 들어가기 전,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오버하고, 더 크게 웃던, 한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N차 관람을 통해 이런 것들이 보이면서 요즘은 인터뷰에서 "만약 실제로 송태섭을 만나면 꼭 안아주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진심이다. 만날 수만 있다면 송태섭을, 과거의 나를 닮은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나 혼자 괜히 오바해서 억지로 꿰맞추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다.(웃음)"

- 영화 속 송태섭의 모든 대사를 다 해본 사람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송태섭의 명대사, '띵언' 하나를 꼽는다면?

"드리블은 키 작은 선수의 살 길이라고!"

-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 속 장면과 똑같아서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웃음) 무대 인사 때도 그 대사를 자주 하는 것 같던데,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꼽은 이유가 궁금하다?

"비록 한 줄 짜리 짧은 대사지만, 송태섭이라는 선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이 대사는 송태섭이 산왕공고의 무지막지한 존 프레스의 압박을 뚫고 나가면서 하는 말인데, 자기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선수 2~3명이 에워싸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결연하게 내뱉는 말이다.

나이를 먹다 보니 인생을 살면서 마치 산왕공고의 존 프레스에 막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자주 있다. 송태섭처럼 패스할 곳도 다 막히고, 드리블로 치고 나갈 길도 모두 막힌, 그래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몇 번이고 더 만나게 될 것 같지만….

그때마다 힘이 되는 말 한마디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다. 혼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드리블은 키 작은 선수의 살 길이라고!", "뚫어! 송태섭!" 이 말을 생각하면, 그 어떤 벽도 뚫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느끼는 이런 기분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더 자주 하게 되는 것 같다."

▲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주인공 송태섭 목소리를 연기한 성우 엄상현.

- 엄상현 성우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성우 중 한 명인데, 벽에 막히는 그런 상황이 올까?(웃음)

"분명히 올 것이다!(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과거의 나는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날들 속에서 살았다. 연극을 하다가 생계를 위해 우연히 성우라는 직업을 접했기 때문인지 성우가 되고 나서도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했다.

1998년 EBS 성우극회 17기로 입사하기 전에 KBS 성우극회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탈락하기도 했고, EBS에 입사한 이후에도 한동안 기회를 얻지 못해 힘든 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땐 EBS에서 퇴근하면, 친구가 하는 장어집에서 새벽 4시까지 숯불을 굽고 서빙을 하는 '투잡'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생각해봐라.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 일을 하고, 아침 9시에 출근하는 일상이 반복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꿈도 꾸기 힘들다. 그 시절 나의 미래는 내가 살던 반지하방처럼 사방이 꽉 막혀있고, 캄캄했다. 

오늘 인터뷰를 위해 버스를 타고 우면동으로 오는데 그때의 기억들이 많이 떠오르더라."

- 인터뷰하자는 제안에, 성우 엄상현에게 잊지 못할 장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면서 이 식당을 골랐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요즘 <슬램덩크> 덕분에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제안하면서 했던 말 중 '처음 마음, 초심(初心)'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꽂혔다. 요즘 마음이 좀 복잡해서인지 '초심'을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에 이 곳을 선택한 것 같다. 

비록 지금은 EBS의 우면동 시대가 끝났지만, 여기가 바로 성우 엄상현의 시작점이니까 우면동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은 내가 일이 없어 가난했던 시절, 성우 선생님들이나 선배들이 가끔씩 고기를 사주던, 내게는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다. 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 마시면서 참 많이 웃고, 또 많이 울었다."

- 밖에서 볼 땐 요즘 너무 행복할 것만 같은데, 왜 마음이 복잡한지 물어봐도 되나?

"지난 1월에 내가 목소리를 연기한 두 편의 영화가 극장에서 같이 상영되고 있었다. 하나가 <슬램덩크>고, 또 다른 하나는 <캐리와 슈퍼콜라>라는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이었다. <슬램덩크>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흥행 기록을 쓰고 있지만, <캐리와 슈퍼콜라>는 10만 명을 조금 넘긴 채 극장에서 사라졌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과 국내 애니메이션은 예산과 제작 인력, 제작 기간 등을 놓고 볼 때 비교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순수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관계자들의 열정 만큼은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슬램덩크>의 흥행 열기에는 못 미치더라도 국내 애니메이션 역시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스코어가 나와서 마음이 좀 복잡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내의 수많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은 부족한 예산과 열악한 제작 환경이라는, 꽉 막힌 벽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들도 송태섭처럼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하며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늘 응원하는데, 결과가 그에 미치지 못해 마음이 안 좋다."

인터뷰를 마치고 농구와 <슬램덩크>에 큰 관심이 없었던 성우 엄상현이 갑자기 #슬친자가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송태섭의 목소리를 연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화 속 송태섭을 통해 과거의 자신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드리블은 키 작은 선수의 살 길이라고!", "뚫어! 송태섭!"이란 외침이 성우 엄상현의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박힌 이유다.

산왕공고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말하는 송태섭, 가쁜 숨을 다 잡고, 심장이 쿵쾅거려도 있는 힘껏 강한 척한다는 송태섭, 그리고 그 벽을 향해 힘차게 돌진하는 송태섭의 모습에서 우리는 '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런 송태섭을 향한 한나의 "뚫어! 송태섭!"이라는 외침은 지금 나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고 싶은 외침이기에….

▲ <더 퍼스트 슬램덩크> 더빙판 성우들. ⓒ엄상현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이종훈

제가 만난 스포츠 스타들은 셀 수 없이 많은 패배가 자신을 승리자로 만들어 줬다고 말합니다. [이종훈의 더 플레이어]를 통해 수많은 이들을 승리자로 만들어 준 '패배와 실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