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언론 외신면에 며칠이 멀다 하고 꾸준히 실리는 주제가 있다. 인공지능(AI) 개발 소식이다. 마치 스포츠 중계라도 하는 것처럼, 심심하면 한 번씩 인공지능이 또 다시 획기적인 혁신을 이뤘다는 뉴스가 실린다. 이번 주에도 드디어 개와 고양이를 식별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고 떠들썩했다.
그런 와중에도 인간 세상의 다른 많은 곳은 시위와 폭력 진압, 전쟁 위기와 진짜 전쟁으로 시끄럽다. 미얀마는 여전히 내전 중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끝날 줄 모르며, 이슬람 신정 체제에 맞선 이란 민중의 시위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게다가 체제의 퇴행을 지켜만 보는 듯싶던 중국 민중까지 거리로 나서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얼마 전까지 파업 중인 화물연대 조합원들과 이른바 '자유주의' 정부가 대치했다.
겉보기에는 무척 대조적인 21세기의 두 풍경이다. 한 쪽에서는 인류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새 세상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열리려 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20세기의 폭력과 혼란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서로 너무나 거리가 먼 두 시대가 공존하는 것만 같다. 언제쯤에야 인간은 야만의 과거를 청산하고 과학기술이 약속하는 화려한 유토피아를 향해 손잡고 나아갈 것인가?
그러나 우연치 않게 최근에 잇달아 나온 두 권의 책은 이런 인상이나 물음이 잘못됐다고 일깨운다. 상반되는 듯 보이는 두 광경, 과학기술 유토피아의 약속과, 억압과 투쟁의 연쇄반응이 실은 한 동전의 양 면이라는 것이다. 아니, 자동화된 복된 미래의 약속이야말로 오늘날 억압과 투쟁을 부추기는 어둡고도 강력한 힘이라는 것이다.
'우루무치를 해방하라'는 함성 이면의 현실
11월 26일에 상하이에서 처음으로 시진핑 정부의 제로 코로나 봉쇄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시민들이 모인 곳은 우루무치중루였다. 위구르인들이 많이 거주하기에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중심도시 우루무치의 이름을 딴 동네다. 이곳에 모인 시민들은 "코로나 봉쇄 조치를 해제하라"는 구호와 더불어 이렇게 외쳤다. "우루무치를 해방하라!"
이 소식을 처음 듣고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방금 읽은 신간 내용이 마치 이 사건의 예언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미국 인류학자 대런 바일러가 쓴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 중국의 첨단기술 형벌 식민지에서 벌어지는 탄압과 착취의 기록>(홍명교 옮김, 생각의힘, 2022)이 그 책이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는 문고본 크기에 200쪽 가량의, 길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내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어느 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성 말살의 처참한 기록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그 존재가 잘 알려진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강제수용소(중국 당국의 표현에 따르면, '재교육'수용소)에서 혹독한 시간을 겪고 나서 저자와 인터뷰한 '무슬림계'(역시 당국의 분류) 인물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근거는 서방의 선전 용어와 동일하다. '테러와의 전쟁'. 중화인민공화국의 안보와 통합을 위협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의 침투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고 무슬림 주민들을 '재교육'하여 선량한 인민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허울 아래 들어선 거대 수용소의 일상은 독일이나 소련에 있었던 그 고전적 선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폭행과 고문이 자행되고, 공장형 축산시설과 다를 바 없는 더러운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가축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는 이런 21세기의 '굴락'을 폭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의 목적은 오히려 우리 시대의 '굴락'이 과거의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알리는 데 있다. 그 차이점은 인공지능이 약속하는 유토피아의 구성 요소들과 동일한 성분으로 이뤄져 있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그에 따라 거대한 기계(좁은 의미의 기계만이 아니라 '사회'라는 기계)를 작동하게 하는 테크놀로지 말이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의 주인공들은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검문소에서 구금되거나 무심코 스마트폰으로 '무슬림' 친지와 통화하다 공안요원에게 끌려갔다. 제복 입은 자들에 의해 갑자기 호송차에 실려 알지 못할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은 이미 익숙한 장면이지만, 여기에 '21세기 중국 특색'을 더하는 것은 첨단기술을 활용한 감시 체계다.
'재교육'수용소에 끌려간 뒤에도 마찬가지다. 수용소에서는 구석구석마다 보안 카메라가 작동하며, "컴퓨터 비전 시스템, 빅데이터 분석, 클라우드 컴퓨팅"(97쪽)으로 넘쳐 나는 지휘통제실은 첨단 정보통신기업 사무실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이곳은 실리콘밸리나 시애틀의 빅테크에서 개발한 최신 기술을 현실에 적용하는 실험실이다. 다 헤진 종이 뭉치를 들고 유대인을 색출하던 나치 친위대나 기분 나쁜 잡음을 흘리며 전화기를 도청하던 비밀경찰의 시대는 가고 AI 강제수용소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것이 신장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큰 도시 우루무치에서 11월 24일 한 고층아파트의 화재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미처 대피하지 못한 것은 아파트 출입구를 쇠사슬 등으로 막아놓은 억압적인 코로나바이러스 봉쇄 조치 탓이었다. 그간 탄압과 감시, 봉쇄에 지칠 대로 지친 우루무치 시민들이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났고, 뜻밖에도 신장위구르 바깥 여러 대도시에서도 이에 호응해 '백지' 시위가 시작됐다. 도를 넘은 거의 3년간의 봉쇄와 시진핑 일인독재 강화를 겪으며 신장위구르의 현실이 곧 14억 중국인 전체의 운명임을 절감한 이들이 마침내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저항은 그야말로 시작의 시작 단계에 있을 뿐이며,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에서 검증 과정을 거친 저들의 무기는 막강하기만 하다. 중국 당국이 '백지' 시위대를 위협하려고 제일 먼저 내민 무기는 30여 년 전과는 달리 소총이나 탱크가 아니다. 미국 빅테크 원산의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활용한 불시 검문이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가 '결론'에서 소름 끼치게 지적하는 것처럼, 이 '중국 특색'의 탄압에는 'Made in USA' 딱지가 선명히 붙어 있다. "신장 뒤에는 시애틀이 있고, 시애틀 뒤에는 신장이 있다."
인공지능에 먹이를 대는 미세노동의 노예들
그러나 지구를 종횡하는 인공지능 관련 기술의 초국적 사슬은 이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신장에서 출발해 시애틀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변방에서 출발해 그만큼 전 지구적인 사슬을 거슬러 오르다가 동일한 목적지에 닿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와 같은 시점에 국역본이 나온 영국 경제학자 필 존스의 <노동자 없는 노동: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김고명 옮김 롤러코스터, 2022)은 바로 이 궤도를 추적하는 책이다.
'노동자 없는 노동' 이라…. 얼핏 들으면, 인공지능이 로봇을 움직여 사람의 노동을 모조리 대신하는 세상을 뜻하는 것 같다. 누구는 이런 세상이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의 토대가 되리라 기대하기도 한다(아론 바스타니,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김민수, 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그러나 <노동자 없는 노동>에서 저자 존스가 그리는 세상은 이런 매력적인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여기에는 노동자가 없다. 노동자로 제대로 대접받는 노동자가.
사실 일하는 사람은 있다. 그러나 그 일이란 게 '미세노동(microwork)'이다. '미세노동'이란 '미세금융(미소금융)'을 본뜬 말로서, 거의 분 단위로 쪼개진 일거리를 수행하고는 미미한 보수만 지급받는 작업 형태를 뜻한다. 도대체 이런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무엇일까? 놀랍게도 인공지능과 관련된 일이다.
인공지능을 신비화하는 여러 대중적 환상이 있지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입력하여 '학습'시키는 과정이 없다면 인공지능은 존재할 수 없다. 인터넷 바다에 이미 우주와 같은 규모의 정보가 존재한다지만, 특정 목적의 인공지능을 개발하려면 새롭게 관련 정보들을 일일이 입력해야 한다. 그렇다. 사람이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해줘야 한다. 그 '사람'이 하는 노동의 형식으로서 최근 확산되는 것이 미세노동이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빅테크들은 직원들을 시켜 이런 작업을 하지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이윤의 막대한 부분을 인건비로 다 써버릴 것이다. 이들 기업들은 NGO 등과 손잡고 미세노동 사이트를 열어, 정보 입력 작업을 하고 푼돈이나마 벌려는 사람들을 모집한다. 이에 응모한 사람들은 자기 집 골방에서 키보드를 두드려 10분짜리 일을 하고 1달러를 버는 식으로 미래의 인공지능에게 먹이를 대준다. 달동네에서 주부들이 자투리 시간을 내어 인형에 눈을 붙이거나 봉투에 풀칠하던 아르바이트 노동의 21세기판이라고나 할까.
우리 시대에 그런 '달동네'는 대개 남반구 빈국들이다. 물론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에서도, 이제는 플랫폼 노동 외에는 다른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 이들이 미세노동 사이트에 몰리기는 한다. 그러나 빅테크들은 더 값싸게 조각 노동을 시킬 수 있는, 가난한 나라의 고학력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를 더 선호한다. 그러면서 남반구 빈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선심을 쓴다. <노동자 없는 노동> 1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케냐나 팔레스타인의 난민촌은 미세노동 종사자를 모집하는,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전형적인 장소다.
이것은 단지 현재 지구 위 어느 구석에서 벌어지는 다소 특이한 노동 형태만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발전한다는 것은 이런 노동 형태가 더욱더 확산되고 더 나아가서는 가장 보편적인 노동 형태가 될 것임을 뜻한다. 즉,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는 만인의 노동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기는커녕 만인이 분 단위에 건당 몇 원의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세상을 낳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이미 그렇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없는 노동>은 자본주의가 마침내 도달할 이런 디스토피아를 퉁명스럽게 제시하고 자신의 예지력에 의기양양해하며 끝맺는 그런 책은 아니다. 충격적인 분석과 전망 뒤에는, 정규직이 아니라 임시계약직이 보편적 해방의 주체로 나서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운동을 호소하는 열정적인 단락들이 따른다. 오래 전부터 이런 방향으로 변신이 필요함을 절감해온 한국 노동운동에는 정말 깊은 동지애를 느낄만한 고민들이다. 이 점만 따져봐도 <노동자 없는 노동>은 필독의 가치가 있다.
서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지옥과 그 공통 지반, 인공지능
요즘은 패권 다툼을 벌이는 두 강대국 중 어느 한 쪽을 '지옥'이라 부르며 지옥에 맞선 '성전'을 외치는 목소리들이 유행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둘 다 지옥이다. 게다가 저마다 특색을 지닌 이 두 지옥은 서로 대립하는 외관과는 달리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다. 신장 뒤에 시애틀이 있는 것처럼, 독재와 빈곤이 뒤섞여 있는 곳 어디든 시애틀을 위한 미세노동 인력시장이 될 수 있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와 <노동자 없는 노동>은 이 거대한 지옥도의 공통 지반이 인공지능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결합임을 드러낸다. 신이 인간 능력의 투영임을 폭로했던 L. 포이에르바흐의 철학은 오늘날 다시 한 번 거꾸로 뒤집혀, 인간 능력을 애써 포이에르바흐적 기계신에 투영하고 이에 복종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21세기 인류로 나타나고 있다. 신상 건립은 이제 막바지 작업에 도달한 듯 보이고 인신공양의 제물이 될 이들의 긴 대열이 준비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으로 상징되는 지구의 양쪽 모두에서 말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혁명 대신 모든 난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책인 듯 보이기에 지금 우리 대다수는 이런 신상 건립 노역에 기꺼이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떠받드는 네 번째 산업혁명은 결코 진짜 혁명을 대신할 수 없다. 아니, 인공지능 등장 전야의 현 상태는 오히려 두 세기 동안 연기돼온 진짜 혁명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고 다급한 요청으로 만든다.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와 <노동자 없는 노동>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시작해 하나로 모이는, 이 요청의 나팔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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