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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된 입양서류 들고 한국에 왔다…한국인 생모를 드디어 만났다"

[283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② "46년간 이별 끝에 드디어 엄마를 찾았습니다"

입양서류 위조

2016 년 나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날 하늘로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미처 소화되지 않은 슬픔과 1976년 친부모를 잃은 트라우마, 그리고 덴마크 입양 서류에 허위 정보가 있다는 소식에 난 하늘로 던저져 버렸습니다.

덴마크 입양 서류에서 나는 부산에서 발견된 고아였습니다.

2016년에 내가 한국의 입양서류를 요청한 이후 한국사회봉사회(KSS)는 나를 고아라고 정보를 위조한것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메일을 보냈고 그들은 내가 누군가에 의해 태어났고 누군가에 의해 길러졌고 만들어 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1976년에 내가 입양될 당시 서울에 살고 있던 20대 초반의 미혼 부부였던 친부모입니다.

서울은 '나의' 도시입니다. 나는 여기 서울에서 태어나 첫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한국사회봉사회에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3개월 후 나는 덴마크로 입양되었습니다.

덴마크는 "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국 또한 '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내 덴마크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부모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버려졌다는 사실이 전부입니다. 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몸과 영혼은 그것을 결코 잊은적이 없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첫 번째 부모인 친부모를 잃은 슬픔을 소화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동시에 나는 언젠가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2017년에 나는 친아버지를 찾았습니다

2017년에 해외입양인연대 (입양인들이 운영하고 있는 한국내 비영리단체)가 마련한 "첫번째 고향방문" 여행 프로그램으로 나는 입양 이후 처음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여행의 촛점은 친가족 찾기뿐만 아니라 나의 기원과 다시 연결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온 것은 강렬하고 감정적이며 압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친부모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사회봉사회를 방문했습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나에게 단지 그들의 성만을 알려주려했습니다. 한국사회봉사회를 나오며 나는 한국 어딘가에서 김 씨와 최 씨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친부모 찾기를 했고 자원봉사자들(미희와 은미에게 정말 감사드립니다)의 행운과 우연의 일치와 노력으로 친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를 만난 날은 저에게 감성적으로 복받쳐오르는 날이었습니다. 그 여행을 잘 준비해야 했지만 나는 친부를 만날 가능성을 감히 생각지도 못했고 만약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너무 실망할까봐 두려움에 떠느라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운이 좋게도 아버지만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과 숙모 그리고 사촌과 그들의 손자도 만났습니다. 따뜻하게 환영해준 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와 삼촌이 모두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불행히도, 그들 중 누구도 1976년 이후로 제 친어머니와 만난 적이 없습니다.

나의 첫번째 한국 방문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스럽고 자유롭고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기도 했고 이 모든 것을 소화해 내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이 상황을 소화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입니다. 친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는 나의 가장 큰 소원은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갑니다.

덴마크 한인 인권 단체

2022년 9월, 한국에서 꽤 강력한 몇 주를 보냈습니다. 저는 한국 입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KBS는 내 입양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해 서울의 여러 곳을 따라다녔습니다. 또한 저는 덴마크 한인인권단체가 283건의 입양 사례를 한국진실화해위원회에 제출한 것과 관련하여 전 세계의 다른 많은 한국 입양인을 대표하여 연설을 했습니다.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정보가 실존한다면 서류에 아이들을 고아로 만드는 일은 끝나야 합니다.

더 이상 거짓은 없습니다!

우리는 입양에 대한 진실을 원합니다!

우리는 정의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정체성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생물학적 기원을 아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신분입니다. 나는 40년 동안 거짓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는 고아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부산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부산 고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게 만들어졌고 부모님의 신분이 알려 졌음에도 서류상 고아가 되었습니다.

엄마! 당신을 찾았습니다.

2022년10월 서울에 있는 경찰서를 세 번이나 방문했습니다. 2018년에 나는 생모의 성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수색을 요청했습니다. 며칠 후 그들은 1951-53년에 태어난 그녀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경찰서로 돌아가서 1950-55년을 수색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날 늦게 그들은 새로운 수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경찰서에 가서 나의 DNA 검사를 요청했습니다. 언젠가 나의 생모가 나를 찾는다면 내 DNA 프로필은 이미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운 좋게도 정말 좋은 경찰관을 만났던 다른 건물로 가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친모를 찾고 있었고 DNA 검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내 모든 정보를 가지고 경찰관 중 한 명이 경찰 데이터베이스를 살펴보고 실제로 친모 있을 수 있는 한 여성을 발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약속했습니다.

나는 경찰서를 떠날 때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 내 어머니를 찾을 것이라고 내가 감히 믿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호텔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냥 덴마크로 돌아가기 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을 떠나기로 되어 있던 날, 경찰관으로부터 "네 어머니를 찾았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혼랍스럽고 흥분되어 메시지를 여러 번 읽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찾았고, 나를 만나도록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DNA 검사도 합니다. 경찰서 데이터베이스에서 그녀는 1954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첫 번째 검색(1951-53)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서 너무 기쁩니다. 그리고 한국사회봉사회의 도움과 방해가 누락돼 너무 기쁩니다.

6년간의 찾기와 46년간의 이별 끝에 나는 다음날 생모와 재회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나는 덴마크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연기하고 호텔 체류를 연장해야 했습니다. 정신이 없는 날이었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가장 멋진 날이 됐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여전히 혼랍스럽고 행복하고 불안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 많은 복잡한 감정과 공허함도 있었습니다.

생모를 만난 것은 감동적이고 훌륭했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준 포옹.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그녀는 입양 이후로 나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나는 조금 울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위해 미역국을 준비하여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고 나는 이 재회가 그녀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았습니다.

친모와 재회 후 나는 안도감과 행복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나는 나를 낳은 여자와 재회했습니다; 나의 첫 번째 어머니, 나의 생모, 나의 한국 어머니, 나의 엄마.

나는 그 경찰관의 한 일에 대해 영원히 행복하고 감사할 것입니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운이 좋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피곤합니다. 나는 한국으로 곧 돌아 갈 것입니다.

나는 한국 입양인의 권리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며, 위조되고 날조된 입양 서류에 계속 초점을 맞출 것이며,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알 권리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이며, 명확성과 진실을 위해 싸울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친모를 계속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 조각을 찾았습니다. 온전한 인격체가 되기 위한 마지막 조각. 엄마! 당신을 찾았습니다.

▲KBS <시사직격>과 인터뷰하고 있는 루이스 광씨. ⓒKBS 화면 갈무리

*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난 루이스 광 씨는 1976년 덴마크로 입양됐다. 지난 9월 283명의 해외입양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에 입양될 당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조사 신청서를 제출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권위주의 시기에 한국에서 덴마크와 전세계로 입양된 해외입양인의 입양과정에서 인권 침해 여부와 그 과정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개입 여부에 대한 조사를 요청한 것이다. <프레시안>은 진실화해위에 조사를 요청한 해외입양인들의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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