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 J. 해러웨이의 <종과 종이 만날 때>가 번역 출간되었다. 저자 해러웨이가 어떤 이인지 여러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의식사학과 교수였고 현재 같은 대학의 석좌교수다. <사이보그 선언>(1985)이라는 글로 크게 알려진 페미니즘 사상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그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이라면 다른 하나로 그가 미즈 카옌 페퍼라는 이름의 반려견과 어질러티 스포츠를 즐기는 할머니이기도 하다는 점을 덧붙여야겠다. 그가 밝히듯 해러웨이와 카옌의 얽힘에서 퍼져나간 끈적끈적한 실들이 이 책이 다루는 모든 관계들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필자가 보기에 그는 다른 무엇이기보다도 이야기꾼이다. <종과 종이 만날 때>에서 그는 자본과 실험실 동물, 품종견, 닭고기 산업과 인간(또한 인간의 노동)이 맺는 관계를 유전학 연구실의 연구원, 스포츠 기자였던 아버지, 개 유전학 활동가의 활약상, 대학 회식 자리에서 벌어진 채식주의 및 태반 먹기 논쟁과 같은 이야기들로 풀어낸다. 이러한 관계들의 실뜨기는 이야기의 실뜨기가 되어 누구든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특히 이 직물을 구성하는 가닥들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닿아있기 마련이어서 나에게도 여러 가닥을 걸쳤다. 그중 하나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세계의 한 가운데서 세속적으로 되기
필자는 고양이 다섯 마리의 집사다. 누군가는 퍽 고양이 애호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그전까지 생명을 가진 무엇도 제대로 키워 본 적이 없었다. 집사가 된 계기도 자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다섯 존재가 내 삶으로 들어오고 나서 나는 그전까지 인간으로만 구성되었던 나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내가 보고 경험하는 것 이상의 다수의 세계가, 그래서 확장 가능한 무한한 세계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다섯의 세계는 나의 삶을 어떠한 충만함으로 채우는 것 이상으로 일상뿐 아니라 내가 쓰는 글, 보는 작품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논의들, 나의 연구를 물들이고 있다.
그 관계의 항들, 사건들은 끝이 없지만 앞서 나의 반려종이 된 루이, 루시 두 남매 고양이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3개월 때 입양한 이 아이들의 중성화 수술 문제에 관해서도 세상 마음 아파하면서 머리를 싸맸다. 지금도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옳은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해러웨이는 이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예/아니요의 답을 넘어서는 사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저자는 1장에서 반려(companion)라는 단어가 "빵을 함께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의 '쿰 파니스(cum panis)'에서 왔음을 상기하는데, 영양가 있는 소화불량이라는 부제가 붙은 12장 '마지막 식사'에서 우리는 지구에서 먹기의 문제가 어떠한 스펙트럼 속에서 사유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
이 12장을 채운 몇 가지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해러웨이가 속한 학과의 한 식사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평이 난 환경보호론자이기도 했던 해러웨이의 한 동료는 능숙한 사냥꾼이자 요리사이기도 해서 멧돼지 통구이를 함께 먹는 식사 자리를 직접 마련했다. 그는 자신의 죽이기가 공포와 아픔을 적게 수반하도록 모든 일을 철저히 하는 자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손님 몇은 이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고 이러한 종류의 접대가 동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학생과 교수들에 대한 공격행위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학과가 비건식을 채택했어야 하며 학과 전체가 동물의 신체를 통째로 눈앞에 두고 집단으로 먹는 일은 피했어야 한다고도 했다. 결국 그러한 식사 자리는 더 지속되지 않았다.
해러웨이는 멧돼지와 사냥꾼들, 그것을 먹는 자들, 먹기에 저항하는 자들 모두가 난잡한 식사에 얽혀 있는 반려종이며 각각의 소화를 안정시켜줄 모두를 위한 달콤한 해결책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관련해 "상대주의가 아니고 동시에 진실이면서도 조화가 불가능한 복수의 사물이 낳는 그런 종류의 아픔"이라고도 표현한다. 종과 종이 함께 먹을 뿐만 아니라 먹고 먹히기의 그물에 얽혀 있는 지구에서 서로에 대한 먹기를 제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결국 망에 혼란을 초래하는 일일 수 있다.
다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대, 죽여도 되는 존재로 만들지 말지어다"이다. 또한 해러웨이는 이 식사 사건을 상기하는 일이 자신에게 "적대자를 미개의 틀에 끼워 맞추는 성급한 입장에 직면할 때마다, 미개할 거라고 짐작되는 쪽으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실의 실천을 발견하게 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라고 덧붙인다. 그래서 이 장의 부재가 영양가 있는 소화불량일 테다. 하나의 답을 찾으려고 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서 누구에게도 폭력이 아닌 하나의 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다만 바라는 바는 어떠한 존재에게 폭력이 되는 결정에 대해서 최대한 조밀한 망을 세우고 검토하는 우리의 노력이 깃드는 것이다.
종의 번식과 관련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
앞서 필자는 반려묘들과 함께하게 되었을 때 고민하게 된 일 중 하나로 중성화 수술을 언급했다. 종의 번식과 관련한 문제의 결정권이 나에게 생겼을 때 그 무게도 부담이었지만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종과 종이 만날 때>에서 관련 논의는 이러한 선택을 내릴 때 어떠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반려종의 클론 제작과 관련된 문제, 그가 한번 다룬 바 있는 유전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온코마우스(1988년 듀퐁과 하버드대가 공동으로 특허승인을 받은 실험용 쥐)와 같은 유기체의 문제는 오늘날 종과 관련된 문제들이 어디까지 확대되고 있는지, 그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5장에서 지금 시점에 (특히 기술지향의 개 문화를 중심으로) 이종 간의 풍요와 연민, 그리고 책임 있는 행위에 관한 윤리의 출현이 어떻게 위기에 처해있는지를 탐구한다. 여기서 풍요는 반려종에 관한 고통의 경감을 대체할 개념으로 쓰이며 연민은 풍요의 윤리에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때 해러웨이는 미국의 개 브리더들의 작은 커뮤니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반려와 관련된 종의 연구는 생물학 실험실이 아닌 아마추어 커뮤니티와 개인들로 구성된 가내 산업이 떠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레이트 피레니즈의 브리더이자 건강 활동가인 이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피레니즈의 고관절 이형성증에 대해 브리더가 대처하는 방법을 바꾸고자 했다. 그들의 데이터는 수 세기에 걸친 피레니즈의 역사와 계통에 관해 구축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번식이 견종 개량에 관계되는 한에서, 다시 말해 그레이트 피레니즈 견의 풍요에 공헌하는 개체에 대해서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노력의 실행은 또 다른 문제이며 제도가 이를 완전히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이러한 해러웨이의 사유가 우리가 대면하는 많은 갈등에서 답이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나아가 대안적 노력들, 우리가 할 수도 있을 일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배움을 얻었다. 그리고 나의 반려존재들의 풍요를 위한 나의 연민과 결정이 철저하고 단단해지기를 다짐하게 된다.
그의 실이 나에게로 와서 다시 여기로부터의 관계로 퍼져나가길
앞서 필자는 해러웨이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말했다. 그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강조해 시작한 이유는 그가 작업한 실뜨기의 연결이 나에게로, 또한 내가 맺는 관계들로 퍼져나가기를 간절히 희망해서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뜨기의 연결은 모든 독자에게서 가능할 것이다.
해러웨이는 우리가 인간예외주의를 단념하는 것, 즉 지구의 특권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 "하루가 시작되었을 때보다 그 하루가 끝날 때 더 많이 알 것을 요구하고, 종과 종이 얽혀서 결코 안정되는 일이 없는 생명정치 속에서 특정한 삶의 방식을 골라잡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실의 끝이 당신에게로 가서 닿기를, 그리고 그 실의 끝은 당신이 주저했지만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던 이들에게로 가서 다시 연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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