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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탈시설'로는 장애인·아동·노인 시설 문제 못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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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탈시설'로는 장애인·아동·노인 시설 문제 못 바꾼다"

[복지국가SOCIETY]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하여…

복지국가와 사회적 약자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국가이다. 복지국가는 어떻게 작동되는가? 보통 국민들이 낸 세금과 보험(건강, 연금, 고용, 산재, 요양 등)을 재정으로 나와 내 가족이 아플 때, 직장을 잃었을 때, 일하다 다쳤을 때, 나이가 들어 은퇴하고 병들었을 때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각각의 사회보장이 작동하여 국민들의 삶을 보장한다. 그런데 모든 국민이라고 했지만, 우리사회를 포함한 모든 나라에는 사회적 약자가 존재한다. 복지국가에서 사회적 약자는 어떤 대우와 지원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약자는 일반적으로 사회복지사업법 상의 26개 법률이 정하고 있는 아동(학대, 유기, 방치 등의 요보호 아동), 노인(치매나 질환 등으로 돌봄이 필요한 노인), 청소년(학교밖, 가정밖, 은둔형외톨이 등), 장애인, 노숙인 등 가족이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구성원을 말한다.

다른 나라와 다른 복지발전경로

한국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지점에서 다른 선진국과는 다른 경로를 밟아왔다. 미국이나 영국 등 유럽의 시설들, 사회적 약자를 격리 수용하였던 시설들은 국가나 종교단체가 설립하여 국가의 책임하에 운영됐다. 20세기 이전에는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20세기 중반까지는 이후는 국가에 의한 시설보호 중심으로 사회적 약자를 격리 보호했다. 그리고 1970년대 이후를 거치며 장애인 운동과 인권의식의 성장 등의 이유로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설을 최소화하고 지역사회보호를 주로 국가의 책임아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시스템을 구축해갔다.

그에 비해 한국의 경우 70년 전 한국전쟁 이후 전쟁고아의 발생은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서 그 책임을 외국의 원조와 민간에게 주었다. 개인과 종교단체 등이 대한민국 정부 대신 외국의 원조와 구호를 받아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인 전쟁고아를 돌보았으며, 또한 국가 시스템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시설들(고아원)을 통해서 보호와 양육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책임을 지기 보다는 관리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했고, 30년이 지난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적 약자도 국가 구성원의 하나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제대로 된 예산지원도 80년대 이후부터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80년대에는 경제발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시기였고,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이 국가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시기였다. 사실 그 당시는 수용보호하는 거주시설과 장애인에 대한 교육을 하는 특수학교만이 장애인을 위한 복지와 교육시스템으로 존재하여 다른 서비스의 부재로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회적 약자를 대한 전통적 관점 : 자선과 시혜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사회적 약자는 자선과 시혜의 관점에 기초하여 대우받았다. 시혜란 주는 사람의 여유 만큼을 의미한다. 서비스를 받는 약자들의 필요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원을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으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무기력, 무능력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시설을 통한 보호와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 당시 시설은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동과 장애인(정신장애인을 포함해), 노인, 노숙인 등을 보호하는 핵심적인 중요한 복지의 수단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수용보호하는 시설의 스펙트럼은 1980년대까지 매우 강한 사회 복지시스템의 하나였다. 불법적인 삼청교육대에서 아동양육시설까지 시설은 모두 '정상'적인 보통사람들이 아닌 도움이 필요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을 격리 보호하는 곳으로 기능했다.

시설 : 국가의 전통적 사회적 약자 보호 시스템

물론 시설시스템은 국가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중의 하나로 지금 우리의 현재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기제 중의 하나이다. 교도소-군대-시설-병원-학교(강제성이 강한 순서)는 같은 원리를 갖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면 입소하여 재소자가 되며, 성인남성으로 영장을 받아 입대하여 군인이 되며, 병으로 인해 입원하여 환자가 되며, 의무교육이나 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입학하여 학생이 된다. 특정 공간의 구성원이 된 순간 그 곳의 규칙을 따라야 하며, 그 시설(기관)을 책임지는 시설(기관)장에게 자신의 권리 중 일부(혹은 전부)를 위임하고 그의 책임 아래 놓여진다. 식사시간, 취침시간, 일상의 시간도 일부 혹은 전부를 정해진 대로 해야 한다. 특정집단의 구성원이 되고 그것은 개인보다는 그 집단의 특성에 의해서 삶이 규율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장애인, 노숙인 등을 보호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시설은 다른 시설시스템과 또 다른 특성이 존재한다. 군인, 환자, 학생은 일시적이며,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 사회복지사업법 상의 장애인, 아동, 노인 시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없는 선택으로 자신의 선택이나 필요가 아니라 가족의 필요에 의해 입소하게 되는 경우이며, 자신의 선택으로 입소한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로 시설에서 퇴소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즉, 인간의 본질적인 권리가 과도하게 제한되고, 핵심권리조차도 시설장에게 위임된다는 측면에서 시설은 인권보장에 제한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시설은 현실적으로 꼭 있어야 하는 복지시스템이었다.

사회복지의 가치의 관점에서 전통적으로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만으로도 큰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태도, 부모의 마음으로 장애인을 돌보고 있다는 그런 자선과 시혜의 관점에서 시설은 운영됐다. 국가가 그것을 권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사회적 약자 구제시스템으로 제도화했다. 먼저 짚고 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60-70년 전 전쟁고아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지 못할 때, 개인이나 종교기관들이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시설을 만들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국가의 책임을 민간이 대신 책임졌고 그들 중 일부를 제외하면 선한 마음으로 아동들을 돌보았고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장애인 시설도 마찬가지로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발전 속에서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가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사회에서 장애인거주시설은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적 보호기능을 제대로 수행했다. 70~8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거주시설은 가족돌봄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권리중심 : 복지국가의 사회적 약자돌봄 철학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이고, 사회적 약자를 어떤 관점에서 대우해야 하는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나라가 되었다.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모든' 국민에게 있는 나라가 복지국가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시설은 시대에 맞게 자선과 시혜가 아닌 권리의 관점에서 운영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탈시설의 맥락과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시설의 삶은 허락받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삶의 하나하나가 시설장이 허락하는 범위안에 있어야 한다. 일단 시설에 입소한 이상, 그 어떤 것도 시설장의 책임 아래 있기에 구조적으로 시설은 시설에 속한 개인의 삶을 관리하고 규율할 수밖에 없다. 시설은 결국 개인의 권리, 즉 인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시설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더 이상 아동과 장애인, 노인에게 정해진 대로 주어지는 서비스가 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적 약자 개개인이 원하고 선택하는 서비스,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서비스로의 변화, 이행이 있어야 한다. 이는 아동시설, 장애인시설, 노인시설이 다다른 과제를 갖고 있으며, 단순히 탈시설이라는 단어로 시설의 문제를 현재의 권리중심 관점으로 바꾸어내지는 못한다.

ⓒ프레시안

장애인시설 :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권리중심 모델이 되어야

먼저 장애인시설부터 살펴보자. 탈시설은 장애인 단체들이 주장하고 국회에서 현재 탈시설 지원법이 논의되고 있다. 2000년 이전 장애인 복지는 앞서 언급했듯이 거주시설과 특수학교가 거의 전부였다. 2022년 현재,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 장애인 복지지원체계는 많은 변화발전이 있었다. 발달장애인의 생애주기에 맞추어 장애아 조기진단, 특수학교와 통합학교, 특수교육지원센터, 치료 바우처, 성인기 직업재활시설, 장애인주간보호시설, 장애인주간활동 서비스, 장애인종합복지관, 발달장애인가족지원센터 등 장애인을 지원하는 복지기관이 체계를 갖추어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아직 많이 부족하다. 장애인 거주시설은 장애인 가족을 위해 필요한 서비스이다. 장애인가족이 장애인돌봄에 한계가 생길 때, 부모의 나이가 70이 넘어 더 이상 장애인 가족을 돌보기 힘들거나, 최중증의 장애인을 돌보는 것이 가족에게 한정되어 가족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시설이 그 대체제로 기능할 수 있다. 이 기능은 아직 유효하다. 장애인과 그 가족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가 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체계가 충분하지 못하며, 가족의 부담이 극심한 경우가 많다. 자선과 시혜의 관점에서 권리중심으로 복지의 중심이 이동한다면 시설의 문제는 전향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기존 시설은 돌봄에 특화되어 있고, 또 현재 많은 장애인 시설들이 권리중심, 인권중심기관으로 변화했고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탈시설지원법이 아니라 기존 시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장애인복지법의 개정이 먼저이다. 즉, 기존 시설이 입소하는 시설패러다임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의 변화, 즉 돌봄과 주거 서비스가 필요한 그 지역의 장애인 개개인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계약관계에 기초한 서비스로의 변화를 만들어 가야한다. 시설에 입소하면 시설이 정한 서비스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내가 계약에 기초하여 원하는 서비스를 받는 계약에 기초한 권리중심의 서비스로의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아동양육시설 : 아동에게 사랑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보육원이라 불리우는 아동양육시설은 어떠한가?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사회문제중의 하나가 보호종료청년, 자립준비청년의 문제이다.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립한 청년들이 제대로 된 자립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보호종료청년에 대한 종합대책을 세워 청년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고, 윤석열 정부도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자립준비청년)들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명씩 목숨을 끊고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고 한다.

아동양육시설은 베이비박스를 통해서 아기 때 들어오거나, 부모의 학대, 유기, 방치 등으로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더 불행하게 되었을 때 들어와서 일차적으로는 18세까지 나아가 24세까지 생활하게 된다. 권리중심의 관점, 인권중심의 관점에서 아동양육시설을 바라보는 것과 자선과 시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을 아동시설은 시설의 아동에게 주어야 한다. 부모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았다는 상처,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한다는 상처가 있는 상태에서 시설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이고, 먹여주고 입혀주면 감지덕지하라는 사고를 갖고 있다면, 아이들을 문제 덩어리라고 여기고 18세 되면 바로 내보내고 관심을 끊는다면….

시설에서 독립한 순간 열여덟이 되어 갑자기 어른이 되어 세상을 맞이한 그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 보호종료청년의 18세 이후의 사회속에서의 건강한 삶은 그들이 시설에서 나와 세상에서 살 때 충분한 지원을 해주는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시설에서의 경험에서 결정된다. 시설에서 독립할 때,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지원받아서 행복하고 건강한 상태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아동양육시설의 권리중심 관점은 사랑받을 권리 즉, '아동에게 가장 좋은 것을'이라는 아동최우선의 원칙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한해 2500명의 청년들, 청소년그룹홈까지 합치면 3000명 이상의 세상에 나오는 청년들이 또 다른 누군의 지원이 아니라 원래 어릴 때부터 자신을 사랑해주고 키워주었던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정부는 아이를 사랑하고 제대로 양육하는 시설과 그렇지 않은 시설을 구분하고 있는 지 묻고 싶다. 자기 시설의 아이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내보내는 그런 시설들, 18세 되면 더 이상 내 아이가 아니라는 시설들…. 물론 모든 아동양육시설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시설에서 문제는 발생한다. 정부가 아이들을 제대로 사랑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시설을 제대로 지원하고 그렇지 못한 시설들을 관리하고 통제한다면 보호종료청년의 문제는 70%이상 해결할 수 있다.

노인시설 : 존엄을 보장하는 지역사회통합돌봄

노인시설이 본격화된 것은 2008년 장기요양보험이 제도화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요양병원과 요양원이라는 노인 시설이 노인복지의 기본적 수단이 되었고, 노인돌봄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사실 가족돌봄이 어르신 부양의 해결책이었다. 주로 여성들이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했고, 적은 수의 노인들이 양로원 등의 시설을 이용하였다.

현재 문제는 노인 요양에서 사회적 입원이 너무 많다는 것과 노인들이 요양시설에 입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입원의 문제는 정부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이라는 지역중심의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복지서비스를 구축해가고 있다. 그런데 어르신들에게 요양시설의 입소가 좋은 선택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라는 시설에 들어가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곳에 들어간 순간 나라는 개별성은 사라지고, 치매 걸린 노인, 걷지 못하는 노인이 되어 삶을 연명하게 된다.

삶의 존엄은 개별성에 있다. 병 걸린 불쌍한 노인, 힘 없는 불쌍한 노인이 아니라 내가 나로써 대우받고 나를 아는 사회적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존엄을 유지하는 삶이다. 노인시설은 자선과 시혜가 아닌 영리중심의 서비스로 노인들의 존엄, 노인들의 권리가 침해받고 있다. 시설의 운영목표가 이윤추구에 있는 곳이 많고, 그로 인해 노인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해왔다. 가족의 돌봄부담을 최소화하고, 지역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돌봄체계를 만들어내고,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있고, 아는 사람들과 함께 돌봄과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존엄(권리)을 보장하는 서비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나의 방식

복지국가에서 사회적 약자는 어떻게 대우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필자는 옛날로 말하면 고아원 원장의 아들이었다. 시설의 아이들과 같이 자랐다. 시설에서 나보다 20~30세 많은 형들이 있었고, 내 또래가 있어 같이 살았다. 중학교 때까지는 거의 같이 놀고 먹고 잠은 원장사택에서 잤다. 나는 원장 아들이었고, 그들은 고아였다. 나는 내가 놀고 싶으면 같이 놀고 집에 가고 싶으면 가는 등, 시설의 규칙이 내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원장 아들이었으니까, 내게는 부모가 있었으니까.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도 그들이 부러워했던 시선을 기억한다. 그러한 차이에 나는 민감했다. 시설 친구들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머리가 커가면서 하게 되었다.

타인의 도움과 지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자체가 매우 자존감과 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약자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누리면서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 힘으로 내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서 그 권리를 이차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 그러한다.

많은 것이 부족했던 자선과 시혜의 시대에서 이제는 선진국이 되어 많은 것이 풍족해진 권리중심의 시대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권리보장은 그 전보다 더 세심해지고, 민감해지고, 전문적이어야 한다. 불쌍한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공동체내의 권리주체로서의 개개인으로써 대우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복지국가는 사회적 약자 집단이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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