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이 존재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빠르게 세 측면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다음의 경우에만 '가치 있는' 책이 쓰였다 할 수 있습니다. ①동일한 주제 혹은 관련 주제에 관한 책들이 일종의 전면적 오류에 빠져 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경우(책의 논쟁하는 기능), ②그 주제와 관련된 필수적인 무언가 간과되었던 것들을 생각하는 경우(책의 발명하는 기능), ③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추정하는 경우(책의 창조하는 기능)."
- 질 들뢰즈, '아르노 빌라니에게 보낸 편지',
질 들뢰즈 지음, 다비드 라푸자드 엮음, 서창현 옮김, <들뢰즈 다양체>, 갈무리, 2022, 117쪽.
(강조는 원문)
질 들뢰즈는 항상 개념들의 발명과 창조로서의 철학을 고민했다. 들뢰즈의 독자로서 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책의 논쟁하는 기능'―정신분석가들과의 논쟁―을 발견할 수 있고, <천 개의 고원>을 통해서는 '책의 창조하는 기능'을 한층 선명하게 발견하게 된다. 차이, 생성, 배치, 리좀, 되기, 정동 등 들뢰즈의 철학을 논하기 위한 개념어는 실로 다양하다.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들뢰즈가 소환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들뢰즈의 사후, 두 권의 저작 <무인도와 그 밖의 텍스트들, 1953~1974>(Desert Islands and Other Texts 1953-1974, 2004),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Two Regimes of Madness: Texts and Interviews 1975–1995, 2006)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두 권을 비롯해 들뢰즈의 어떤 저작에도 수록되지 않은 1953년에서 1995년 사이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수많은 에세이와 인터뷰, 강의록과 기타 텍스트가 비로소 수집되었다. 철학적으로 '다양한' 텍스트가 망라된 셈이다. 이 선집의 원제 "Lettres et Autres Textes(Letters and Other Texts)"를 감안한다면 '편지와 기타 텍스트'라고 번역될 수 있는 저작, <들뢰즈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들뢰즈 다양체>의 제1부 <편지들>은 들뢰즈의 학문이 형성되는 과정이 드러나는 동시에, 출판사 또는 잡지 편집자와 협상, 대학 관료들에 대한 짜증과 사소한 질투, 건강상의 문제 등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문적 박식함 너머에서 느껴지는 들뢰즈의 성격의 매혹적인 일면이다. 예컨대, '편지들'에 수집된 편지 가운데서 독자는 다음과 같은 들뢰즈의 투정을 엿볼 수 있다. "저한테 편지 쓰기 편집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대화에 의미를 부여한다고도요. 전 대화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들뢰즈 다양체>, 90쪽)." 흥미로운 사실은 편지를 통해 언표된 들뢰즈의 투정이 들뢰즈의 태도를 배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들뢰즈는 편지를 통해 다양한 학자들과 나눈 대화에 빠짐없이 신실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번역의 맥락을 상상하면서 들뢰즈의 투정을 다시 한 번 고쳐 적어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 문장은 들뢰즈가 '대화의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Don’t think that I am a compulsive letter writer or that I have a sense of dialogue, I hate it.')는 정도가 될 것이다. (들뢰즈는 "난 대화가 범상함을 넘어서면 잘 따라가지 못하거든요."라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이왕에 눈길을 사로잡은 들뢰즈의 투정을 받아주고자 한다면, 들뢰즈가 쓴 편지를 그의 개인적인 혹은 사적인 감각으로 환원하지 않는 읽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들뢰즈가 남긴 편지는 그의 일상적 권태와 좌절을 곳곳에서 표출하면서도, 상대에 대한 경탄과 우정을 각인시키고 있다. 들뢰즈는 '대화의 감각'을 의식하지 않고, 그 의식에 앞서 무언가에 추동되어 경탄과 우정에 이르렀다. 그 '무언가'는 당대의 학문 네트워크 내에 흐르고 있던 정동일 것이다. 그 정동의 증거로서 들뢰즈의 편지를 읽어낼 수 있겠다. 들뢰즈의 편지는 들뢰즈라는 주체의 내면에 고여 있는 어떤 감각이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관계, 즉 편지를 매개로 펼쳐지는 외부성에 끊임없이 주목하게 한다.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관계도 일반적인 관계도 아닌, '탈인격화'의 강도적 관계가 바로 들뢰즈의 편지에서 드러난다. 조세프 에마뉘알 보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들뢰즈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급하고 서툴게 말해진 것들이니 답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들뢰즈 다양체>, 122쪽)." 여기서 표현된 '반응'은 '내장적 감각'에 가까운 것일 테고, 그렇다면 '감응' 또는 '정동'이라고 그 표현을 대체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들뢰즈 다양체>는 들뢰즈의 학문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 위치, 방향, 태도 등을 통해 들뢰즈를 가시화한다.
<들뢰즈 다양체>에서 들뢰즈가 작성한 편지는 일종의 보고서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사서이기도 하다. 이렇게 편지는 번번이 잠재태의 텍스트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발신자와 수신자의 '함께 되기' 과정을 증명한다. 들뢰즈는 상대에게도 그 관계를 환기함을 잊지 않는다. 주로 경탄과 우정을 믿어달라는 말로 마무리되는 그의 편지에는 때로는 난처함과 유감스러움이 표명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편지가 보여주는 한 가지 의미심장한 긴장은 아르노 빌라니와의 교신에서 확인된다. 빌라니는 들뢰즈와 과타리의 텍스트 가운데 하나에 대한 리뷰를 출판했는데, 이는 들뢰즈를 짜증나게 할 만큼 과타리의 역할을 상당히 경시했다. 들뢰즈는 수차례의 편지를 통해 과타리의 위상과 역할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가 들뢰즈에게 직접 닿을 때, 그는 그것을 상당히 우아한 포즈로 받아들인다. 미셸 푸코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그의 진정한 기쁨에 독자가 미소를 짓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들뢰즈 다양체>의 독법은 이 밖에도 다양할 수 있다. 들뢰즈의 모든 저작은 밀도가 높고 저자는 어느 영역 가릴 것 없이 동등한 척도로 박식하다. 들뢰즈가 제시하는 개념은 종종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배포된다. 들뢰즈의 저작에 친숙한 독자들이라면 <들뢰즈 다양체>를 통해 들뢰즈의 중요한 개념들 일부의 발전을 기록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 다양체>는 들뢰즈가 구분한 책의 존재가치 가운데 두 번째 측면, 그 주제와 관련된 필수적인 무언가 간과되었던 것들을 생각하는 경우, '책의 발명하는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비드 라푸자드가 편집한 <Lettres et Autres Textes>, 이를 아메스 호지스가 번역한 <Letters and Other Texts>에 "들뢰즈 다양체"라는 제목이 새롭게 부여되는 번역의 과정이야말로 '다양체(multiplicités)'라는 들뢰즈의 존재론적 개념에 대한 발명, 그리고 이를 위한 물질적-담론적 실험이라 할 만하다. 들뢰즈는 '실험'을 ‘반역’이라고 했다. 이 명제를 전제로 삼았을 때, <들뢰즈 다양체>는 저자 들뢰즈의 의도를 배반하는 실험이라 할만하다. 들뢰즈는 아키비스트가 아니었고, <들뢰즈 다양체>에 실린 텍스트들의 출간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 텍스트들은 마치 편지처럼, 그리고 들뢰즈가 그의 시대를 함께 한 당대의 지성들과 주고받은 실제의 편지와 함께 (수신인이 아니라) 독자 앞에 도착했다. 자크 데리다라면 이 과정을 '오배'라고 했을 것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이 모음집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텍스트는 레이몽 벨루가 진행한 들뢰즈와 과타리와의 (두 권으로 된)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Capitalism and Schizophrenia)의 첫 번째 저작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인터뷰다. 이와 연관해서 아마도 가장 많은 주목을 이끌어낼 텍스트는 들뢰즈와 과타리 사이의 서신일 것이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교한한 서신은 대부분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의 발전에 대한 토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편지인데, 여기에는 탐구의 정확한 방향과 질문을 해결하고 '기계'와 같은 개념을 공식화하려는 초기 시도가 포함되어 있다.
<들뢰즈 다양체>를 통해 들뢰즈가 제시하는 공식을 재확인하는 독법이 가능하고, 또한 유효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독법이 절대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다각적이고 복잡하지만, 현실의 흐름과 존재에 대한 사고에 끊임없이 중점을 두었으며, 개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개념이야말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개념은 변화하는 문제에 대응하여 창조되고, 발명되고, 생산된다. 들뢰즈의 개념은 수없이 적용, 발전, 수정, 해석 및 재해석되었으며, 철학자와 철학자가 아닌 모두에게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들뢰즈 다양체>는 도리어 공식의 배반을 확인하는 독법에 열려 있다고 하겠다. "일단 작품이 완성되고 확정되고 인쇄되면, 그것은 결국 저자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이 되어 독자를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들뢰즈 다양체>, 390쪽)"고 했던 들뢰즈의 말은 그의 사후에 바로 <들뢰즈 다양체>로서 입증된 셈이다.
<들뢰즈 다양체>는 들뢰즈가 누락한 잔여물이 아니라, '들뢰즈 되기' 더 나아가 '철학자 되기'를 보여주는 핵심 저작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 다양체>를 철학적 주석이나 참고문헌으로서가 아니라 '쓰기'와 '되기'의 관점에서 읽어내도 좋겠다. <들뢰즈 다양체>가 저자로서 소환된 들뢰즈의 청년기 저작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의미는 '들뢰즈의 탄생' 또는 '철학자의 탄생' 같은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적어도 이 책에서 들뢰즈는 '쓰기'를 통해 다른 철학(자)에게로 용해되고 접착된다. 이 '흐름'은 들뢰즈의 존재론이 다양체의 존재론이었음을 환기한다. 존재론에서 다양체를 사유했던 들뢰즈는 과타리와 만나 배치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배치 속에서 '들뢰즈 다양체'는 인칭적 권력으로서의 들뢰즈에게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른 철학자가 출간한 저작의 행간에서 들뢰즈를 만났던 적이 있다. 텍스트는 불순하다. 불순한 것은 관계적이다. 관계적 텍스트의 주체는 비인칭적이다.
근대 철학이 인간의 개체성을 고집하는 순간, 철학은 자신이 보편적임을 자처했다. 그런데 <들뢰즈 다양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철학자는 보편적 인간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 않다. 철학자들의 모습에는 인간들의 복수성이 비친다. 들뢰즈는 "어떻게 분열증자처럼 되지 않으면서도 분열증적 진전을 이뤄낼 것인가?(<들뢰즈 다양체>, 87쪽)"라고 묻는다. 이에 답하기 위해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들뢰즈를 초과하는 것들과 마주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개방하고, 개인을 초과하는, 특이점에서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흐름에는 그것을 이행시키는 어떤 것, 물의 흐름처럼 장애물이 있을 때 그것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는 어떤 것이 동반됩니다. 그러나 주체는 흐름 앞에 있는 누군가가 아닙니다. 주체 자체가 흐름의 집합체입니다(<들뢰즈 다양체>, 262쪽)." 그렇다면 주체가 아니라 주체가 놓여있는 ‘필드’ 자체가 문제가 된다. 어떤 분야든 자기 자신 또는 다른 분야와 간섭하고 재상상하는 능력을 통해, 다시 말해 자신을 배신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만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책을 한 권의 책으로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책으로 체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외부 집합 속의, '책'이라 불리는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책은 그것의 내부성에 의해서, 그 안에 포함된 지면들에 의해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책은 책 밖의 수많은 연결들과 관련해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들뢰즈 다양체>, 255-256쪽)." <들뢰즈 다양체>의 아상블라주는 독자를 내부의 페이지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상황으로 돌려보낸다. 그 외부에는 흐름들이 있다. 물의 흐름. 자본과 욕망의 흐름. 차별과 혐오, 연대와 공생의 흐름. 그리고 우리는 다른 흐름들을 찾는 하나의 작은 흐름이다. 사회는 어떤 곳에는 결핍을, 다른 어떤 곳에는 과잉을 분배하기 위해 조직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두 가지 욕망의 정치가 있다고 말한다. "파시즘적, 편집증적,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재영토화하는 정치, 즉 좌표화하고 통괄 조정하고 영토화하는 정치가 있고, 무언가가 삐걱거리고 탈주하는 순간 그것에 투자하는 다른 정치가 있습니다(<들뢰즈 다양체>, 268쪽)." <들뢰즈 다양체>는 보편적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으로서 우리 앞에 오배된 또 하나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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