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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스리랑카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 점거 후에도 나가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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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스리랑카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 점거 후에도 나가지 않는 이유

성명 발표 없이 퇴임 의사 전달한 라자팍사 대통령 '불신'…관저 호화로움에도 '분노'

지난 주말 대통령 관저를 점거한 스리랑카 시위대가 고타바야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의 사임 의사를 전달 받았음에도 점거를 풀지 않고 있다. 관저에 딸린 수영장에 뛰어들고 헬스 기구를 이용하며 그간 몇 시간이나 줄을 서야 얻을 수 있었던 넉넉한 연료를 만끽하며 요리를 하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얻어냈음에도 귀가를 망설이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대통령이 정말로 자리를 내려놓을지에 대한 불신과 시민들이 경제난으로 겪은 극심한 고통과 대비되는 관저의 호화로운 생활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0일(현지시각) 수도 콜롬보에 위치한 스리랑카 대통령 관저에 수천 명의 시민들이 몰려 "박물관 무료 입장 행사"를 떠올리게 할만큼 붐볐다고 보도했다. 전날 시위대가 점거한 관저에 너무 많은 시민들이 몰려 계단이며 복도가 꽉 차 활동가들이 대통령 집무실이나 총리 관저도 비어 있으니 그 곳을 방문하라고 안내할 정도였다고 한다. 외신들은 관저에 진입한 시민들이 호화로운 샹들리에며 미술품에 놀라고 천개가 달린 대통령의 침대에 누워도 보고 관저 내 수영장에 뛰어들고 부엌에서 조리도 하고 심지어 바닥 청소도 하고 식물에 물도 주며 1700만루피(약 6500만원)에 이르는 돈을 찾아내 경찰에 돌려주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총리 관저에서도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카드놀이를 즐겼다.

지난 3월 경제난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는 5월 초 마힌다 라자팍사 스리랑카 전 총리의 사임을 이끌어 낸 뒤에도 계속돼 왔다. 전임 총리와 대통령은 형제지간이다.  총리 사임 뒤에도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돼 510억달러(약 66조원)의 외채를 보유한 스리랑카는 지난 5월18일 공식적인 국가 부도(디폴트) 상태에 빠졌다. 수입 의존도가 큰 스리랑카 경제에서 외환 보유고 고갈은 생활고로 직결된다. 당장 휘발유·요리용 가스·분유·화장지 등을 수입할 돈이 없어 시민 생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세계적으로 식품값과 연료값이 오르면서 고통이 심화됐다. 정부는 외환 보유고 고갈 원인으로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관광수입 급감을 꼽는다. 그러나 정부가 2019년 단행한 대규모 감세 및 작물 생산량 감소와 이로 인한 식량 수입 증가를 가져 온 2021년 비료 수입 규제 등 정부 실책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여기에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56.4%에 이르며 시위대가 대통령 관저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라자팍사 대통령과 라닐 위크레메싱게 총리는 시위대가 집무실과 관저를 점거한 9일 곧바로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시위대는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관저 점거 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며 오는 13일 사임하겠다는 의사도 직접 표명하지 않고 마힌다 야파 아베이와르데나 스리랑카 국회의장을 통해 밝혔다. 시위대가 물러나지 않자 11일 이번엔 총리실을 통해 사임하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대통령 명의의 공식 성명을 내지는 않았다. 위크레메싱게 총리 또한 점거 이후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군사 소식통을 인용해 대통령이 현재 해군 함정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라자팍사 대통령은 사임 의사를 전달한 뒤에도 국정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라자팍사 대통령이 10일 요리용 가스 분배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다만 같은 날 주요 야당 지도자들은 발 빠르게 새 정부 구성 논의에 들어갔다.

<로이터> 통신은 11일 시위대가 대통령과 총리가 사임하는 것을 실제로 확인할 때까지 관저에서 머물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4월 초부터 시위에 참가했던 주드 한사나(31)는 통신에 "우리는 대통령이 떠나고 시민들이 납득할만한 새 정부가 꾸려지기 전까지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라며 "시민들은 대통령 퇴진뿐 아니라 광범위한 정치 개혁을 원한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인권변호사이자 정치분석가인 바바니 폰세카는 "앞으로 며칠 간은 정치적으로 어떤 일이 매우 불확실한 시간이 될 것"이라며 대통령과 총리가 "정말 사임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시민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외신은 그간 스리랑카인들이 겪은 생활고와 대비되는 대통령 관저의 호화로움이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BBC가 지난주 게재한 르포를 보면 경제난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 스리랑카인들이 먹고 일하고 자는 모든 것을 투쟁으로 만들었다. 매체는 연료 부족으로 밤에 정전이 이어지며 사람들이 몇 달 간이나 더위에 선풍기도 켜지 못한 채 잠을 설치고 있다고 전했다. 연료를 사기 위한 긴 줄은 일상이 됐고 운송으로 생계를 영위하는 삼륜차 툭툭 운전자들은 베개와 갈아입을 옷을 챙겨 48시간 정도 줄을 서야 운행에 필요한 연료를 조달할 수 있다. 가정에서 요리을 하기 위한 연료를 구하기 위해서도 긴 줄을 서야 한다. 연료 부족으로 어선도 출항을 못해 생선을 구하기도 힘들고 그나마 출항한 배들이 잡아 온 생선은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린다. 어린이들의 식단에서 단백질 요리가 사라졌고 분유도 구하기 어렵다. 의약품 부족도 현실화되고 있으며 연료 부족으로 교통수단 운행이 제약된 상황에서 병원까지 갈 교통수단을 구하지 못해 아기가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AP> 통신은 세계식량계획(WFP)을 인용해 스리랑카의 10가구 중 9가구가 끼니를 거르거나 식료품을 절약하고 긴급 인도적 지원을 받는 인구도 3백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BBC는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시위가 "본능적인 것"이라고 묘사했다.

관저를 점거한 시민 중 한 명인 알 프레마왈딘은 BBC에 "우리는 등유·가스·식료품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서는데, 대통령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4명의 자녀를 데리고 관저에 들어온 라시미 카빈드히야는 "관저의 화려함을 보라. 우리는 마을의 작은 집에서 산다. 이곳은 시민의 돈으로 지어졌고 시민의 것"이라고 말했다. BBC는 대통령의 호화로운 생활을 접한 뒤 "시민들의 분노가 거세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라자팍사 대통령이 사임할 경우 새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아베이와르데나 국회의장이 임시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새 정부가 꾸려져도 당면한 위기를 해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누가 정부를 이끌더라도 지치고 성난 대중과 쉬운 해결책이 없는 경제 붕괴 상황에서 위기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자야데바 우양고다 콜롬보다 정치학 교수는 이 매체에 "정치계급 전체가 대중의 신뢰를 잃은 상황"이라며 "정치계급과 정치적으로 각성한 시민들 간의 갈등이 건설적으로 풀리지 않는 한 불안정성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날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 위치한 대통령 관저를 점거한 시민들이 10일(현지시각) 관저 내 침실을 둘러보고 있다.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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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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