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민주당이 미국인 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연방대법원의 임신중지권 보호 철폐 결정을 공격하며 선거 의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당내 일각에선 대법관 탄핵 주장까지 나오는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소극적 대응이 비판을 받고 있다.
27일(현지시각)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같은 당 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24일 대법원이 뒤집은 임신중지권 보호(로 대 웨이드 판결)를 성문화 하는 것을 포함해 연방 차원에서 여성의 건강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검토 중인 법안에는 미국인이 미국 전역을 자유롭게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임신중지가 제한된 주에 거주하는 여성이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주로 이동하는 것을 주가 차단할 가능성을 막겠다는 의미다. 앞서 대법원은 임신중지권에 대한 헌법상 보호를 폐기하고 관련된 규제를 각 주 재량에 맡겼다. 펠로시는 준비 중인 법안에 건강 관련 애플리케이션에 저장된 생리주기 등 여성의 재생산 관련 정보를 보호하는 내용도 담겼다고 밝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앱에 담긴 정보가 임신중지를 범죄화한 주에서 수사에 악용될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펠로시는 서한에서 "극단주의 대법원이 미국인들을 벌주고 통제하려 하는 동안 민주당원들은 미국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 50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원에서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를 저지하기 위해 60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그럼에도 펠로시가 입법안을 발표한 것은 "민주당이 로 대 웨이드가 뒤집힌 시대에 자신들이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정당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비슷한 생각의 유권자들을 투표소로 이끌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펠로시는 서한에서 "필리버스터를 제거하고 여성의 기본권과 모든 미국인의 자유를 복구하기 위해 11월 선거에서 상하원 의석 확장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대법관 탄핵 주장까지 나왔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하원의원은 26일 미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법관 인준 당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브렛 캐버노 대법관과 닐 고서치 대법관이 "거짓말"을 했다며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르테즈는 "선서 뒤에 한 거짓말은 탄핵 사유"라며 방관한다면 "모든 미래의 후보자들에게 그들이 대법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정당하게 선출된 상원의원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24일 펠로시도 청문회 때 고서치가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질문에서 "상원의원들 앞에서 (같거나 비슷한 사건에 대한 판결 때 앞선 판례에 의해 구속을 받는) 선례구속원칙과 전임자를 존중한다고 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냐"며 비판했다. 고서치는 2017년 상원 청문회 때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 판례는 "전임 대법관들이 거듭 재확인해 온 것"이라며 존중할 듯한 태도를 보였다. 캐버노 역시 2018년 상원 청문회 때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선례구속원칙"을 언급했다.
하원은 다수결을 통해 대법관 탄핵을 결의할 수 있지만 이후 상원이 심리 뒤 3분의 2가 동의해야 실제 탄핵이 이뤄지기 때문에 상원을 민주당과 공화당이 반씩 점유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탄핵이 실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미국에서는 1805년 새뮤얼 체이스 전 대법관이 유일하게 탄핵 심리를 받았지만 상원은 그를 퇴출하지 않기로 했다.
인플레이션 탓에 11월 중간선거 전망이 암울했던 민주당 후보들은 임신중지권 보호를 선거 의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각 주에서 분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27일 22명의 민주당 소속 주 법무장관들은 임신중지권을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고 임신중지를 위해 해당 주로 이동한 여성들을 보호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WP)를 보면 애리조나주 법무장관직을 노리는 크리스 메이어스는 "이것이 선거운동의 가장 첫번째 이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체리 비즐리는 24일 주도 롤리의 한 공원에서 "우리는 헌법적 권리에 대한 분수령에 직면해 있다"며 "나는 여러분이 이게 (권리 침해의)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11월에 투표소로 가자"며 지지자들을 독려했다. 펜실베니아주 상원의원 후보인 존 페터맨은 "임신중지권은 11월 펜실베니아에서 투표에 부쳐질 것"이라며 유권자들에게 임신중지권을 정당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아달라고 호소했다. 민주당 후보들은 공화당 후보들이 이전에 임신중지에 대해 언급한 영상 등을 찾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는 등 공화당이 임신중지권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권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임신중지권을 핵심 선거 의제로 삼으려는 민주당의 전략은 대법원의 이번 판결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이라는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4일 판결 뒤 25일까지 미 CBS 방송과 여론조사기관 유고브가 함께 조사한 결과를 보면 미국인의 59%가 대법원 결정을 반대하며 52%가 이 결정이 미국을 후퇴시켰다고 생각한다. 과반수의 응답자가 대법원이 향후 동성혼(57%)과 피임(55%)까지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플로리다주 상원의원에 도전하는 밸 데밍스는 이번주 지역구 유세 때 마주치는 사람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물었다며 "여성과 소녀를 2등 시민 혹은 소유물로 취급하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은 플로리다의 정말 많은 여성과 남성들에게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매체는 민주당의 기금 모금이 급증하고 있다며 공화당 일각에서도 이번 판결이 선거에 불리하다는 우려가 나온다고 전했다.
현직 연방의원들부터 각 주 공직에 출마하고자 하는 후보들까지 임신중지권 보호를 위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와중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된다. 바이든은 대법원 결정 뒤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해달라고 호소했을 뿐 대통령 권한을 사용한 특별한 행정조치는 발표하지 않은 상태다. 대통령이 무엇을 하든 결국 공화당의 필리버스터를 막지 못해 상원에서 저지될 수도 있지만 바이든이 임신중지권 확대를 위한 공격적 행정조치를 취했다면 지지자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유권자들에게 민주당이 투쟁하고 있다는 신호를 줬을 것이라며 민주당 지지자들이 아쉬워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했다.
더구나 이번 사태는 공화당이 임기 말 대법관 지명이 적절치 않다는 구실로 2016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대법관 지명 기회를 빼앗음으로써 직접적으로 촉발됐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임신중지권 보호 단체는 공화당은 계속해서 규칙을 어기는데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규칙을 준수하겠다며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2016년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숨지자 오바마는 메릭 갈랜드 당시 워싱턴D.C. 연방순회항소법원장(현 법무장관)을 지명했지만 공화당의 반대로 실패했고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갈랜드 대신 고서치를 지명해 대법관에 앉혔다. 이후 임기 말인 2020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숨지며 트럼프는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명했고, 임기 말이라는 이유로 갈랜드 인준을 거부했던 공화당은 입장을 바꿔 대법관 인준을 강행했다.
당 내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유권자의 표를 얻을 가능성은 없다는 불평이 나온다. 민주당 코리 부시 하원의원은 유권자들에게 무턱대고 표를 호소하는 건 소용없다며 "그들은 '우린 이미 당신에게 투표했다'고 응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이 공 떠넘기자 각 주 소송 몸살…"임신중지권 폐지는 특히 흑인 여성 모성사망 높일 것"
대법원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헌법적 보호를 철회한 채 공을 주로 넘긴 탓에 각 주는 거듭되는 소송에 몸살을 앓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시 임신중지권을 제한하는 법이 발효되는 이른바 '트리거 조항'을 가진 주들에선 이 법의 시행을 막고자 하는 소송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27일 루이지애나주 법원은 해당 주의 트리거 조항이 정확히 효력을 가지기 시작하는 시점과 규제하는 행위에 대한 구체성이 부족하다는 임신중지권 보호 단체의 주장을 받아들여 법 시행을 일시 중단했다. 같은 날 유타주 법원도 트리거 조항 시행을 14일 유예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날 캘리포니아 주의원들은 재생산권을 명시적으로 보호하는 주 헌법 개정안을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
한편 임신중지권에 대한 보호 철폐로 여성의 임신과 출산 관련 사망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결정이 특히 이미 의료 접근이 제한돼 있던 흑인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봤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자료를 보면 2020년 미국의 출생아 10만명 당 임신·출산과 관련해 숨진 여성의 수를 나타내는 모성사망비는 백인 19.1명, 흑인 55.3명으로 흑인 여성이 백인 여성에 비해 임신과 출산으로 숨질 가능성이 3배 가까이 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의 모성사망비 평균은 2019년 기준 8.9명이고 한국의 모성사망비는 2020년 기준 11.8명이다. 영국 매체 <가디언>은 지난해 발간된 아만다 진 스티븐슨 콜로라도대 사회학 교수의 연구를 인용해 만일 미국 전역에서 임신중지가 금지된다면 모성사망이 21% 늘어날 것이며 유색인종의 모성사망은 33%나 증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레이첼 하드만 미네소타대 보건정책 교수는 "임신중지 의료기관에 대한 접근 부족이 흑인과 라틴계 주민들에게 불균형하게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모성사망비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고 <가디언>에 말했다. 그는 대법원의 이번 결정은 "인종차별정책"이라며 "그 부담을 흑인 여성이 가장 크게 지고, 원주민, 유색인종, 지방민들, 저소득층도 큰 부담을 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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