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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하라'…정권교체 밤 밝힌 국회 앞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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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금지법 제정하라'…정권교체 밤 밝힌 국회 앞 집회

[현장] 문재인도 윤석열도 아닌, 오직 시민들이 만들어온 '평등'의 역사

"80년대 민주화의 역사는 누구의 역사입니까? 우리(시민)의 역사입니다.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는 누가 전진 시켰습니까? 우리가 시켰습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국회 안에 있습니까, 여기 이 자리에 있습니까?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책임집행위원(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9일 밤 100여 명의 시민이 국회 앞에 모였다.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 촉구를 위해 모인 시민사회 연대체 차별금지법제정연대(차제연)에 소속된 시민 활동가들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마지막 퇴근을 마치고 윤석열 현 대통령이 취임을 목전에 둔 이날, 여야의 희비가 교차한 '대통령이 바뀌는 밤'에 이들은 문재인도 윤석열도, 여도 야도 아닌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평등법 논의를 키워왔다며 정치권의 나태를 지적하고 평등법 즉시 제정을 촉구했다.

당초 이들은 국회 앞 차제연 단식농성장 강제 철거를 막기 위해 모였다. 지난 2일, 국회 사무처는 차제연 측에 지난달 11일부터 평등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한 이종걸 차제연 공동대표와 미류 책임집행위원이 머무는 국회 2문 앞 농성장을 철거해 달라고 요청했다. 10일 예정된 대통령 취임식과 관련한 경호 및 미관 문제가 이유였다. 차제연은 "평등법 제정에 대한 국회의 실질적인 움직임"이 실현될 때까지 자진철거를 거부했고, 취임식 전날 밤인 이날엔 국회 측의 강제철거가 진행될 경우 이를 막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차제연 소속 단위의 활동가들이 한 데 모였다.

이날 오후 상황이 바뀌었다. 오후 3시 30분경 대통령 경호처·국회 사무처·영등포경찰서에서 농성장을 방문해 협상을 진행했다. 차제연 측 단식자들과 공동집행위원장이 협상에 임했고, 농성 공간의 운영을 담보하고 있는 네 명의 평등법 대표발의자(장혜영·박주민·이상민·권인숙) 중 권인숙 의원도 협상장에 급히 합류했다. 협상은 '농성장을 강제철거하지 않고, 10일 오전 7시부터 오후 12시 30분까지 농성장엔 최소인원만 상주한다'는 내용으로 완료됐다. 장예정 차제연 공동집행위원장은 이를 "농성장 철거 통보에 분노한 시민들이 마음을 모으며 여론을 형성한 결과"라고 평했다.

철거 취소가 확정되면서 이날 예고된 차제연의 1박2일 철야농성도 취소됐지만, 한 데 모인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밤 9시부터 '평등의 자리를 지켜낸 우리의 야간 집회'를 개최했다. 이날은 두 단식자의 단식농성이 29일째에 이른 날이기도 했다. 차제연은 "철거 국면은 시민들의 힘으로 넘어갔지만, (평등법 제정에 대한) 국회의 응답은 요원"하다며 "한 달을 꼬박 숟가락을 내려놓은 이들에게 아무것도 내놓지 못하는 국회에 분노"하고 "차별금지법 지금 당장 제정"을 요구한다고 이날 집회의 취지를 밝혔다.

▲국회로부터 자진 철거 요청을 받은 국회 2문 앞 농성장의 9일 밤 모습 ⓒ프레시안(한예섭)

이날 집회에선 각지에서 모여든 활동가들, 평등법 제정에 찬성하는 정치인들 등이 무대에 올라 발언과 공연을 이어나갔다. 발언자들은 시민의 연대로 농성장을 지켜냈다는 기쁨과 그럼에도 아직 응답이 없는 정치권에 대한 분노, 2007년부터 15년간 이어온 평등법 제정 촉구 투쟁에 대한 소회 등을 함께 나눴다. 발언은 발표가 아닌 교류의 장이었다. 무대에서 "나는 HIV 감염인"이라 밝힌 한 발언자에게 시민들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환호하기도 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정말로 필요한 말입니다. 차별 받는 모두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차별은 차별일 뿐입니다. 그 차별에 저항할 수 있게 만드는 법이 차별금지법입니다." -소주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

10일 0시를 기준으로 윤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면서 이날 집회는 정권교체 전의 마지막 평등법 집회로 남았다. 참가자들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의 정부"와 "차별금지법 문제를 '나중에'라며 미룬 문재인의 정부" 양측 모두를 비판하며 결국 "역사를 바꾸는 주체는 국회가 아닌 시민이다"라고 강조했다.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민주당을 가리켜 "그 많은 의석수에도 불구하고 국민의힘 핑계를 대면서, 또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면서 눈치보기 바쁜 것 말고 지난 15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며 "(평등법을) 제대로 논의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그는 국민의힘을 두고도 "윤 당선인이 '구조적 성차별 없다'고 말했을 때 저는 제가 장애 여성으로서 당한 차별의 역사를 권력이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복합적 차별의 위치를 외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9일 집회에 참여해 공연을 진행하고 있는 시민단체 '멸종반란' 활동가들 ⓒ프레시안(한예섭)
▲9일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야간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참가자들 ⓒ프레시안(한예섭)

평등법 제정은 진보(자유주의) 진영의 눈치보기와 보수 진영의 노골적 반대 속에 15년 동안 좌초돼 왔다. 지난 2007년 법무부가 최초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내 기독교 모임 등 일부 세력의 적극적인 반대와 그에 대한 거대양당의 동조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병력(건강상태), 가족형태, 출신 국가, 범죄경력 등 7개 차별금지 사유가 원안에서 삭제됐다. 지난 2014년엔 서울시에서 시민들의 참여로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의 항목이 포함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만들었지만,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당선 당시의 공약을 뒤집고 인권헌장 선포를 철회했다.

그러나 이는 "결코 패배의 역사가 아니"라고 이날 시민들은 서로를 북돋았다. 2007년 당시 시민사회가 조직한 '반차별 공동행동'에서 평등법 제정 투쟁을 시작한 미류 위원은 "지금은 그 7가지 차별금지 사유를 차별금지법에서 뺀다는 걸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다. 차별금지법을 만들면서 학력을 빼? 성적 지향을 빼? 누구도 그런 걸 상상할 수 없는 시대지 않나" 되물으며 "우리는 15년 동안 그 인식을 바꿔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도 "(07년 당시) 7개 조항이 삭제된 개정안에 시민사회가 반대한 덕분에 지금의 강력한 연대 투쟁이 동력을 얻었다"며 "단 한 사람도 차별지대에 남겨두면 안 된다는 정신"이 당시로부터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한 장혜영 정의당 의원도 이날 현장을 찾아 발언 무대에 올랐다. 장 의원은 "오늘은 차별금지법을 '나중에'라며 미뤘던 대통령이 마지막 임기를 마치는 날이고, 내일이면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날이다"라면서도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와 좌절은 정당하지만, 분노와 함께 동료 시민들을 북돋는 일을 절대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래야 이 지겹고 지겨운 차별을 끊어낼 수 있다"고 연대의 말을 전했다.

▲9일 집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는 장혜영 정의당 의원 ⓒ프레시안(한예섭)
▲9일 집회에 참여해 발언하고 있는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책임집행위원 ⓒ프레시안(한예섭)

애초 오후 11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던 이날 집회는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주최 측의 의도에 따라 11시 30분까지 연장 진행됐다. 두 명의 사회자와 두 명의 단식자를 포함해 총 19명의 발언자들이 무대에 올랐다. "이제 정말 '제정' 하나만 남은" 평등법 제정 국면은, 그렇게 "최대한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이날 차제연 측은 강조했다.

담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아래로 짧게 전한다.

호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활동가는 "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2014년 서울시청 점거 농성 당시의 구호를 다시 외쳤다. 문화민주주의 실천연대 소속 이동민 문화기획자는 "예술인들이 블랙리스트 국가범죄와 싸우는 이유는 기본적인 자유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투쟁도 마찬가지"라며 연대의 뜻을 전했다.

강릉 유천초등학교 공동대책위원회의 '징계교사' 남정아 교사는 "학생들은 차별에 가장 민감하다"며 "차별금지법의 제정은 우리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좋아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환경단체 멸종반란은 "기후위기는 차별적으로 오고, 차별의 시스템은 생태위기를 초래한다"는 자우 활동가의 발언과 함께 민중가요 <상록수>와 <바위처럼>을 공연했다.

남상혁 서울지역대학 인권연합동아리 대표는 "이곳이야말로 우리 시대 인권투쟁의 최전선 현장이고, 그 가슴 벅찬 최전선에 함께 해서 기쁘다"고 집회 참여의 소감을 밝혔다. "아직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는 초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상근 간사는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겪은 차별의 경험을 고백했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2018년 미투 이후, 2차 가해자들이 버젓이 다니는 국회 근처도 오지 못하던 김지은 님도 이곳 농성장을 디딤돌 삼아 4년 만에 국회 앞에 섰다"며 농성장의 존재 의의를 강조했다. 심지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는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를 상상"한다며 박소란의 시 '다음에'를 낭독했다.

사루 노동당 사회운동위원회 위원은 "저는 성소수자 당사자"라며 "노동당도 저도 여러분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했다. 김찬휘 녹색당 공동대표도 "녹생당과 우리 모든 시민들이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황수영 참여연대 활동가는 "차별과 군사주의는 맞닿아 있고, 그래서 평등과 평화도 맞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다니주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는 "'에이즈 걸리면 매장 당한다'고 말하는 게 어떻게 (에이즈) 교육인가" 되물으며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적인 현실을 지적했다.

이종걸 차제연 공동대표는 "국회가 권한이 있겠지만 역사를 바꾸는 주체는 시민들이다"라고 강조했다. 미류 위원과 함께 이날로 평등법 제정 촉구 단식 농성 29일째를 맞은 그는 "우리가, 시민들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는 소리를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외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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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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