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최악의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제제재 및 외교적 고립에 직면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가 바로 그것이다.
푸틴은 지난달 27일에 서방 국가들의 경제제재를 맹비난하면서 핵무기 경보 태세의 강화를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바이든 행정부는 러시아의 핵 위협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 예정되었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를 연기하는 등 위기예방 조치를 취했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내 분위기도 달라지고 있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정보국(DIA) 국장인 스콧 베리어 중장이 17일(현지시간)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재래식 전력이 약화하면서 러시아는 서방에 신호를 보내고 국내외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핵 억제력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특히 그는 러시아가 "적들을 위협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상대가 종전 협상에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해 전술, 비전략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내놓았다. 이에 앞서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도 "한때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핵분쟁 가능성이 이제 가능한 영역으로 다시 들어왔다"고 말했다.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발적 핵전쟁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 종식 이후에도 핵미사일의 '경보 즉시 발사(launch on warning)'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상태에서 러시아가 핵미사일 태세를 격상하면 오인·오판·오작동의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
또 하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저위력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이다. 우크라이나의 강력한 저항과 이에 따른 재래식 전력의 큰 손실에 직면한 러시아가 전술핵미사일이나 핵대포 등을 동원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엔 러시아가 제시한 휴전 조건에 동의하도록 압박하고 미국 등 국제사회엔 '경제제재를 재고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효과를 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극도의 좌절감과 고립감에 휩싸인 푸틴이 핵무기에서 절망의 탈출구를 찾으려고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러시아가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은 미지의 영역이지만, 앞으로 핵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일 가능성은 확실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재래식 군사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손실뿐만 아니라 강력한 경제제재로 비핵 무기의 생산능력도 크게 저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유럽 국가들은 대대적인 군비증강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군비증강을 자제해왔던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이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국방비를 GDP 대비 2%로 높이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또 여러 나토 회원국들도 국방력 강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고 미국도 군사력 전진 배치 및 군사적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맞물리면 나토 대 러시아 사이의 군사력 균형은 러시아에 더욱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다. 러시아가 핵무기, 특히 전술핵의 비중을 대폭 높여 이를 만회하려고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전망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게 가시화되면 냉전 시대에 버금가는 핵전쟁의 공포가 유럽을 비롯한 지구촌을 또다시 배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끔찍한 시나리오가 가시화되기 전에 조속히 휴전 협상을 마무리짓는 것이 중요하다. 때마침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협상팀은 우크라이나의 중립화에 일정 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영토 주권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인정하고 돈바스 지역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의 독립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영토를 양보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협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선 휴전, 후 추가 협상'의 접근이 요구된다. 즉, 우크라이나의 중립화와 러시아의 철군 및 안전보장을 골자로 우선 휴전에 합의하고 영토 문제는 추후 협상 의제로 넘기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나토와 러시아는 유럽의 안보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틀도 준비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진정되더라도 적대감과 군비경쟁의 열기를 제어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지 않으면,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앞날은 매우 어두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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