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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무리한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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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무리한 욕심인가?

[기고] 49일 장기파업 택배 노동자의 절박한 심정

28년째 택배 일을 하고 있는 택배 노동자다. 오래 일했지만 삶은 늘 팍팍했다. 28년 동안 건당 수수료는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2009년 화물연대 광주지부 대한통운분회를 만들어 건당 수수료 30원 인상을 요구했는데 대한통운의 답변은 78명 전원 해고였다. 투쟁을 이끌던 박종태 지회장이 최소한 노조가 깨지는 걸 막고 싶다며 자결했다.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노조는 지켰지만 수수료는 올리지 못했다. CJ와 대한통운이 합병되면서 수수료는 오히려 깎였다.

몇몇 언론은 연봉이 1억 가까이나 되는데 파업한다고 비난한다. 한 달에 700~800만 원 버는 택배기사의 사연이 소개된 유튜브도 봤다. 많은 수수료(월급)를 가져가는 노동자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평범한 택배노동자의 삶과는 거리가 아주 먼 얘기다. 부부가 함께 일하거나 집화를 많이 하면 수입이 늘어나겠지만 혼자 배송만 할 경우 연봉 1억은 딴 세상 얘기다. 기름 값, 보험료, 식대, 차량유지비, 수수료 등을 다 개인이 짊어지다보면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나는 2009년을 제외하면 노조의 어떤 직책도 맡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2009년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그런 내가 지금 50일 가까이 파업에 동참하고 있다. 수수료 인상을 간절히 원하지만 수수료 인상이 직접적인 목적이 아닌 이 파업에 기꺼이 동참하고 있다. 과로사가 판치는 죽음의 현장은 기필코 막아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핏값'으로 만들어진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 합의

2020년 한 해 만 과로로 14명의 택배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죽음까지 생각하면 더 심각하다. 병들고 다치는 노동자들은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소장은 "부모가 죽어도 나와서 일해야 하는 게 택배 현장"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묻어 나는 택배 현장의 속상 상 노동자들은 아주 심각한 병이나 부상이 아니면 나와서 일한다. 그렇게 나와 얼마나 오랜 시간 일하는가?

2021년 발표한 고용노동부 조사결과 택배노동자들의 28.6%가 1일 10-12시간, 42.3%가 1일 12-14시간, 17.6%가 1일 14시간 이상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97.3%가 주 6일 이상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도 이러다간 죽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일했다. '탑차 안에서 버려진 죽음'을 상상하곤 했다. 수많은 택배 노동자가 똑같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작년 사회적 합의는 이 절망에서 벗어날 소중한 희망이었다. 택배기사를 분류 작업에서 배제하고 택배기사의 작업 시간은 주 60시간 이내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택배원가 상승요인이 170원임을 확인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저절로 노·사·정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죽어간 노동자들의 핏값이었다. 노조로 뭉친 노동자들의 처절한 저항이 있었다. 시민들의 지지도 있었다. CJ대한통운은 택배 요금을 인상해서 만들어지는 재원을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위한 비용과 작업환경 개선, 기술 도입, 서비스 개선에 쓸 예정이라고 약속했다.

약속 안 지키는 택배사, 면죄부 발급하는 정부

CJ대한통운은 택배비 인상분의 50% 정도가 수수료로 배분되고 분류인력도 차질 없이 투입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현실이 정말 그런지 노조와 함께 검증해 보자는 요구는 묵살하고 있다. 파업 50여 일이 되도록 교섭 한 번 하지 않는 게 CJ대한통운이다.

CJ대한통운은 어떻게 작업환경 개선하고, 어떤 기술을 도입하고 있으며, 어떤 서비스를 개선하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과로사 방지를 위해 어떻게 재원을 쓰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택배비 인상분의 50% 정도가 수수료로 배분되고 있다'는 소리만 앵무새 같이 반복하고 있다.

분류인력 투입은 진행되고 있지만, 너무나 미흡하다. 지난 1월 국토교통부가 점검한 25개소(다른 택배사 터미널 포함) 중 분류인력이 전부 투입되어 택배노동자가 완전히 분류작업에서 배제된 곳은 7개소 (28%) 뿐이다. 그 7개소가 어느 터미널인지 알 수 없는데 노조와 함께 실제로 검증해 보길 바란다. 결국 CJ대한통운은 택배비 인상분을 자기 잇속만 채우고 있다. 사측이 택배비 인상액을 과로사 방지를 위해 최우선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공신력 있는 단체와 더불어 검증하자는 노조의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정부는 심야배송 제한도 정상적으로 이행되고 있다고 발표했는데, 근거는 4개 택배사가 제출한 자료다. 각 택배사는 21시 이후 시스템 차단을 통해 배송을 제한하고 있다는 말만 믿는다. 수많은 현장에선 물량이 많고 사람은 적어 완료스캔을 미리 누르고 심야배송을 하거나 심야배송 후 다음날 완료스캔을 다시 잡고 있는데 정부는 택배사에 면죄부만 주고 있다.

CJ대한통운은 사회적 합의의 부속합의서에 '당일배송', '주 6일제', '터미널 도착 상품의 무조건 배송' 등 3가지 항목을 집어넣었다. 대리점과 계약할 때 표준계약서에 이 내용이 담기면 '택배기사의 작업 시간은 주 60시간 이내가 되도록 노력한다'는 사회적 합의는 당연히 무너진다. 노동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날 수 있다.

지금도 노동자들은 생물 당일 배송은 물론이고 수많은 물건을 당일 배송하기 위해 쎄빠지게 일하고 있다. 모든 노동자가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까지 일하는 노동자도 많다. 그런데 '당일 배송', '주 6일제', '터미널 도착 상품의 무조건 배송'을 명문화하면 상황은 아주 악화될 것이다. 이것은 택배 일을 조금만 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측은 "주당 작업시간 60시간 을 넘기게 되면 당일, 주말 배송 등을 안 해도 된다"고 하는데 계약서를 들이밀고 압박하는데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CJ대한통운은 노동자들의 저항과 사회적 압력에 밀려 합의를 했지만 부속합의서의 독소조항을 무기로 택배 현장을 거꾸로 돌리려 한다. 이 독소조항은 쿠팡처럼 24시간 풀가동 체제의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2회전 배송, 3회전 배송은 불가피하다.

물량은 늘어나고 있다. 인력은 항상 부족하다. '당일 배송', '주 6일제', '터미널 도착 상품의 무조건 배송'이 담긴 계약서는 노동자의 목을 조른다. 장시간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과로사를 막을 수 있겠는가?

▲ 민주노총이 CJ대한통운 본사 앞에서 CJ그룹 규탄 결의대회를 열었다. ⓒ프레시안(허환주)

파업이 길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운 건

아직까지 우리는 교섭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는 소수다. 2만여 명의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 중에서 조합원은 1700여 명이다. 하지만 결코 우리만의 이익을 위한 파업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과로사는 조합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CJ대한통운 노동자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또한 죽음의 현장을 바꿔야만 더 나은 택배 환경을 만들 수 있고 시민들에게 보다 정확하고 안전한 배송을 할 수 있다. 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파업이 길어지는 게 두렵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의 초장기파업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더 두려운 건 나에게, 동료들에게 일어날 과로사다. 계속되는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중노동이다. 자본의 무한한 탐욕이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건 무리한 욕심이 아니라면 CJ대한통운은 노동조합을 인정하고 대화와 교섭에 나서야 한다. 과로사 유발 정책을 폐지해야 한다. 택배비 인상분은 택배기사들의 과로사 방지에 최우선적으로 사용한다는 약속을 지키고 노동자들의 핏값을 3세 경영승계를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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