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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질 거면 크게 깨지자" 여성들의 결의, 유신 붕괴의 도화선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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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질 거면 크게 깨지자" 여성들의 결의, 유신 붕괴의 도화선 되다

[국가폭력과 여성] ⑨ 전 YH무역 노조 지부장 최순영 上

한국전쟁기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을 직접 본 딸이 있었습니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고문을 받은 여성과 아버지를 잃은 여성이 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으로 오빠를 잃은 동생과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경찰의 진압에 동료의 목숨을 잃은 한때의 여공도 만났습니다.

지난 한 달여 간 다섯 명의 국가폭력 여성 피해자‧유족을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그간 살아온 삶과 당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사연을 직접 쓴 문서와 사건 관련 자료가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얼굴 드러내기를 꺼리면서도 어떤 사명감 혹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인터뷰에 나선 여성도 있었습니다. 이제 다 극복했다는 듯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말하다가도 막상 사건이 있던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눈물이 고인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는 인터뷰이도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한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폭력에 대한 기억이 이토록 생생하고 그 영향과 고통이 이토록 끈질긴데, '과거사'라는 말은 온당한가? 이들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들이 겪은 일은 현재 진행형 아닌가.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삶이 '피해자'라는 말 안에 가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가 겪은 일에 대한 억울함을 풀기 위해, 또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바라진 않았습니다.

<프레시안>에서 준비한 '국가폭력과 여성' 기획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네번째 주인공은 YH무역 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 씨입니다. YH무역 여공들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견디지 못해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창립자 일가의 횡령으로 회사가 폐업 위기에 처한 뒤로는 관계기관을 돌아다니며 정상화 방안을 마련해달라고 수차례 호소했습니다. 공장에서 농성도 해봤습니다. 그 모든 길이 막히자 여공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사를 찾았습니다. 정부의 대응은 폭력적 진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여공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조 간부들에게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 위반'으로 유죄가 선고됐습니다. 이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복권이 이뤄지기까지 40여 년이 필요했습니다.

순영 씨와의 인터뷰는 부천 YMCA에서 이뤄졌습니다. 해당 인터뷰와 1기 진실화해위의 ' YH노조 김경숙 사망관련 조작의혹 사건' 조사 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YH무역 여공들과 순영 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1979년 8월 11일. 1000여 명의 경찰이 서울 여의도 신민당사에 투입됐다. 농성 중이던 187명의 YH무역 여공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창립자 일가의 횡령으로 문을 닫게 생긴 회사를 정상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요구하던 여공들이었다.

진압작전 수행 중 경찰은 대학생 시위를 진압할 때 보이던 일말의 조심성도 보이지 않았다. 옷이 찢긴 채 끌려 나오는 여공이 있는가 하면, 머리채를 붙들려 끌려 나오는 여공도 있었다. 건물 경비, 국회의원과 기자도 경찰의 구타를 피하지 못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사람이 떨어졌다"고 소리쳤다. 떨어진 이는 스물한 살 YH무역 여공 김경숙이었다. "나의 권리와 인격을 찾아야 한다"며 노조 활동을 하다 경찰에 밀려 신민당사 옥상에 오른 뒤 땅으로 추락한 그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YH무역 노조 지부장이었던 최순영 씨도 그날 신민당사에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죠. 경숙이가 갔구나. 그 생각밖에…. 그날(진압 전 노조 결의대회를 한 날)도 결의문을 경숙이가 읽었어요. 아주 목소리가 낭랑하고. (집이) 너무 가난하고. 번 돈으로 동생 공부시키고 노조 활동도 잘하고. 나이는 어렸지만 정의감 있는 참 좋은 친구였죠."

당시 경찰은 유족의 동의 없이 신속히 부검을 끝낸 뒤 김경숙의 죽음을 자살로 위장 발표했다. 사망시각은 진압작전 개시 30분 전으로 조작됐다. 팔목에 동맥 절단 흔적이 있다는 가짜 정보도 붙였다. 파이프로 가격당한 상처는 숨겨졌다. YH무역 여공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신민당사 농성에 대해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배후조종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거짓으로 점철된 발표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이 그때는 없었다. 순영 씨가 진실화해위에 김경숙의 죽음과 YH무역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신청하고, 그 결과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30여 년이 필요했다.

YH무역 여공들의 삶

유명을 달리한 김경숙과 국가폭력 피해를 입은 YH무역 여공들은 그 시대를 살던 평범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70년대 농촌 가정 중에는 "입 하나 덜어야 되니까", "돈을 벌 수 있으니까" 딸을 서울로 보내는 곳이 많았다. 그렇게 돈을 벌어 집에 가져다줘도 유산은 아들에게 남기던 시절이었다.

순영 씨도 마찬가지 이유로 1970년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에 왔고, 가발을 만들어 주로 수출을 하는 회사인 YH무역에 입사했다.

공장은 바쁘게 돌아갔다. YH무역 여공들은 보통 하루 12시간 일했다. 수출 날짜를 맞춰야 하면 밤도 샜다. 도급제였던 급여 지급 방식도 여공들의 일하는 시간을 늘리는 이유가 됐다. 그렇게 일하고 받는 월급은 당시 평균 월급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견습공 초봉이 2500원 정도 됐고, 회사 기숙사비가 1500원이었어요. 저는 그래도 한 1만 원 받았어요. 뼈를 갉아 먹은 거죠.그때는 사람 하나하나가 돈이었어요. 회사 입장에서야 월급도 적고, 연장근로수당 주는 것도 아니고 퇴직금도 안 주고 얼마나 좋아. 한 달에 딱 이틀 쉬었는데, 시골에서 사람 데려오면 휴가도 주고 그랬어요."

여공들에 대한 저임금 착취에 기대 1966년 직원 100명으로 시작한 YH무역은 순영 씨 입사 당시 4000여 명을 고용한 국내 최대 가발회사로 성장해있었다. 미국인이 쓰는 가발의 1/3이 한국에서 만들어지던 때였다. YH무역의 수출 순위가 15위를 기록한 해도 있었다.

8시간 근무, 퇴직금…꿈같은 이야기를 듣고 시작한 노동조합

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YH무역의 사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한국보다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들이 가발 산업에 뛰어든 데다 YH무역 창립자 장용호 일가가 회삿돈을 빼돌린 것이 위기를 키웠다. 장용호는 빼돌린 돈으로 미국에 YH무역 제품을 수입해 파는 회사를 만들었다. 가발 구입 대금은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 장용호의 동서 진동희가 사원들에게 10억 원의 상여금을 줬다고 꾸미고 그 돈으로 YH해운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75년경부터 YH무역 노동자 사이에서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일을 잘 했던 데다 고참이었던 순영 씨도 포섭됐다. 근로기준법이 뭔지도 모른 채 공장 인근 한 다방에서 열린 모임에 갔는데 "꿈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8시간 근무를 해야 되는 거다. 그리고 여기(노조가 있는 회사)는 연장근로수당도 주고 퇴직금도 주고 그런다. 이거는 꿈같은 얘기야. 우리는 공무원들만 8시간 근무하고 일요일마다 노는 줄 알았지. '노동자'가 그렇다고?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게 해도 회사가 되나. 그런데 그게 법이래."

돈을 모아 하청 공장을 차리는 게 꿈이었던 순영 씨는 그 뒤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노조가 잘 돼 연장근로수당과 퇴직금을 주게 되면 회사가 얼마나 괘씸하게 생각할까' 해고 걱정도 됐지만 'YH무역을 노동자들이 혜택 받는 회사로 만들고 그만 둔다'는 생각으로 지부장까지 맡았다.

지부장을 맡은 지 일주일 만에 실제로 해고된 일도 있었다. 그때 공장장은 순영 씨를 불러 '하청공장을 만들면 제품을 대주겠다', '동생 학비를 책임져주겠다'며 회유책을 썼다. 순영 씨는 넘어가지 않았다. 노동청에 부당해고 진정을 넣고 복직투쟁을 시작해 한 달 만에 복직했다.

이후 노사교섭이 이뤄졌다. YH무역은 노동자들에게 퇴직금도 주고 연장근로수당도 주기로 했다. 조합원들은 "너무 좋아했다." 순영 씨도 기뻤다.

그 일이 있은 뒤 크리스천 아카데미가 동일방직, 원풍모방 등 당대 민주노조 여성 지부장을 모아 진행한 교육에서 비문(碑文)을 쓸 일이 있었다. 그날 순영 씨는 '노동자와 함께 살다 잠들다'라고 썼다.

▲ 최순영 전 YH무역노조 지부장. ⓒ프레시안(최형락)

기울어가는 YH무역…"깨질 거면 크게 깨지자"던 여공들의 결의

아쉽게도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여공들이 제 몫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YH무역의 사세는 계속 기울어갔다. 그 와중에도 장용호는 YH무역에서 빼돌린 돈으로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하며 잇속을 챙겼다.

밑빠진 독으로 돈이 빠져나가는데 버틸 수 있는 회사는 없다. 1979년 3월 29일. YH무역은 마침내 4월 말 폐업을 발표했다. 당시 사장이었던 박모 씨가 쓴 폐업 사유서에는 장영호가 갚지 않은 15억 원이 회사 부실화의 원인으로 적시됐다. 갈곳없는 처지에 놓인 여공들은 대책을 강구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싸움을 준비한 거예요. 간부들끼리 모여서 회의를 했죠. 회사가 깨질 수밖에 없는데 그럴 거면 왕창 깨지자. 크게 깨져야 소리가 크게 난다. 그래야 탄압받고 있던 다른 민주노조도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런데 크게 깨지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안 될 수 있으니까. '취직할 사람은 조용히 나가도 된다' 그랬는데 안 나간대. 여기서 싸우자는 거야."

이후 간부들은 조합원들을 만났다. '우리가 싸운 만큼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이 나올 것이고, 수당이나 퇴직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역시 한 명의 이탈자도 나오지 않았다.

4월부터 노조는 보건사회부 등 관계기관, 채권자인 조흥은행 등에 회사 정상화 방안을 요구했다. 미 대사관에 장영호의 소환을 요청하기도 했다. '우리가 회사를 살릴 테니 경영권을 달라'고도 해봤다. 간절한 호소에도 뾰족한 방안은 마련되지 않았다.

모든 길이 막히자 노조는 1979년 7월 30일 공장 농성에 들어갔다. 일주일여 뒤인 8월 6일 회사는 정식 폐업공고를 붙였다. 공장 농성에 대한 경찰의 해산 움직임이 감지되자 여공들은 8월 9일 새벽 몰래 공장을 빠져나왔고, 농성장소를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로 옮겼다.

정부는 김계원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유혁인 정무 제1수석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재규가 강제해산을 건의했다.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8월 11일 김경숙의 생명을 앗아간 강제진압 작전이 실행됐다.

그 날의 사건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직무를 정지당했고, 국회의원직에서도 제명당했다. 이는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건으로 이어졌고, 결국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한국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일하던 여공들의 "크게 깨지자"던 결의가 세상을 깨뜨리는 계기가 됐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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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락

내 집은 아니어도 되니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집, 잘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충분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임금과 여가를 보장하는 직장,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나, 모든 사람이 이 정도쯤이야 쉽게 이루고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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