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간첩으로 내몬 한 여자의 '평생 자술서'>(☞바로가기)에서 이어집니다.
<국가폭력과 여성>
①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上 1950년 7월 25일, 10살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는 모습을 봤다(☞바로가기)
② '나주경찰부대 사건' 유족 곽정례 할머니 下 "유족회 막내가 일흔 둘이야, 한국전쟁 때는 뱃속에 있었을 거라고"(☞바로가기)
* 이번 연재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와 함께 기획했습니다.
가족의 이름으로
서울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8번 출구로 나와 비탈길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어느 골목 사이 오래된 주택이 있다. 빛바랜 문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눔의 집'이라고 적혀있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이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들을 위해 만든 공간이다.
김순자는 그 언덕길을 30년 넘게 오르내렸다. 처음엔 어머니와 함께, 동생 태일이 출소한 후엔 동생과 함께. 세월이 흐르고 흘러 할머니가 된 김순자는 어린 손주들을 업고 그 길을 오갔다. 국가로부터 가족을 뺏기고 억울한 낙인이 찍힌 김순자 가족의 아픔을 알아주는 건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이었다.
민가협을 찾은 건 먼저 출소한 어머니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단체를 교도소에 있을 때 어떻게 듣고 알음알음 찾았다.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을 잃은 어머니가 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김순자는 어머니를 따라 민가협에 나가기 시작했고, 동생 태일은 후에 민가협 회장까지 지냈다.누명을 벗은 2016년까지, 지난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지금 민가협 나눔의 집에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들이 많다. 김순자는 아직 이곳을 정기적으로 오가며 식사 준비와 가사 일을 챙긴다. 고택 곳곳에 김순자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여성이 시작한 민주주의
오늘날 "민가협이 누구예요?"라는 말을 많이 듣지만, 민가협은 민주화운동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단체다. 정식으로 출범한 건 1980년대지만 그 모태는 70년대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구속자 가족협의회다. 박정희정권이 조작한 반국가단체 사건에, 1024명이 끌려갔고 고문 끝에 203명이 구속됐다. 판결이 난 지 20시간이 채 안 돼 8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 어머니들, 여성이 중심이 돼 주도한 단체다.
대부분이 국가에 자식을 빼앗긴 엄마들이었다. 많은 수가 아들, 더러는 딸과 남편을 잃었다. 자식의 존재가 여성에게 전부였던 때, 특히 아들은 여성의 삶의 이유이자 의무였다. 그런 귀한 자식을 나라가 뺏어가 고문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몇몇은 죽였다. 수년간 행방을 알 수 없는 자식도 있었다.
김순자는 "거의 다 대학 다니는 똑똑한 애들"이었다면서 "그런 자식이 빨갱이, 간첩, 데모꾼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니 엄마들 속이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순자의 어머니도 그랬을 게다.
모성, 그 이상의 분노
가족을 뺏기고 아버지마저 잃은 김순자도 그랬다.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어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은 점점 간절해졌다.
김순자는 "내가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 "도대체 우리 가족에게 왜 그랬나, 배운 것 없이 평생 호미 들고 농사지은 아버지를 그렇게 고문하고 죽였나" 김순자가 40여 년간 국가에 던진 물음이기도 했다.
어머니들의 싸움은 '내 가족'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내 자식, 내 가족의 억울함은 함께 하는 이들의 억울함으로, 국가폭력을 향한 분노로 이어졌다.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이 있었냐는 질문에 80에 접어든 김순자는 한참을 생각했다. 어떤 순간도 뜨겁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김순자는 '영등포교도소'를 떠올렸다. 지금은 서울 구로구로 옮겨 '서울남부교도소'로 불리는 곳.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국가폭력을 폭로한 양심수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김지하 시인, 김근태 전 국회의원 등이 이곳을 거쳤고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사건도 이곳을 통해 알려졌다.
민가협 어머니들의 활약은 실로 대단했다. '내 자식 내놓아라'에서 시작한 시위가 남민전 사건, 재일교포간첩단 사건, 부천서 성고문 사건 등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낯선 양심수(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정치적·종교적 신념에 등으로 투옥) 석방, 비전향 장기수(사상전향을 거부하고 장기복역한 인민군 포로나 남파간첩) 63명을 북한으로 송환시켰다.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을 직접 현상수배에 나섰던 것도 민가협 어머니들이었다. 40대였던 엄마들은 이제 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됐다. 아직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매주 목요일 종로에서 집회를 연다. 김순자도 그중 한 명이다.
"싸워야 해, 당장은 아무것도 안 될지라도."
김순자의 투쟁은 격렬했다. 열두 가족 중 처음으로 사면된 것도 김순자였다. 김순자는 "그래서 싸워야 한다"면서 웃어 보였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태룡은 19년 2개월 만에 사면돼 감옥에서 나왔다. 그렇지만 상흔은 깊고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빼앗긴 세월, 빼앗긴 가족도 억울한데 국가는 그칠 줄 몰랐다.
사면된 김순자에게 보안감찰이 계속 붙었다. 김순자는 "대체 무슨 법인지 모르겠다"고 치를 떨었다. 때때로 김순자의 집에 "태일이 어딨느냐"는 전화가 왔다. 참고 참던 김순자는 한번, "내가 어찌 아느냐"며 "발 달린 짐승이 저 알아서 다니겠지"라고 화를 냈더랬다.
태룡의 삶은 더 고달팠다. 사면됐지만 되돌릴 수 있는 건 없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한쪽 귀가 안 들릴 정도로 몸이 많이 상했다. 20년 가까이 감옥에 있던 사람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다시 살아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행복했던 신혼부부의 기억은 빛바랜 흔적으로 남았다. 상처는 멈출 줄 모르고 뻗어 나갔다. 그렇게 만든 국가는 "그땐 어쩔 수 없었다"고만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억울함과 분노는 가실 줄 몰랐다. 국가가 만들고 방치한 트라우마였다. 김순자는 요즘 서울지하철 4호선 길음역 인근의 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 나간다. 올케도 함께한다. 일주일에 2~3번씩, 김순자와 같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이 모여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나눈다.
김순자가 처음 상담을 시작하고 상처를 드러낼 수 있었던 건 봉은사에 만들어진 국가폭력 피해자 상담실이었다. 주지 명진스님이 '좌파스님'이라 비난받던 때였다. 시대가 변했다지만 국가폭력을 밝히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봉은사 사무실 한켠을 내줬다.
그게 '법'이라고 했다
국가도 그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노무현정부는 "항일 독립운동부터 현대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반민주적·반인권적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통한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며 과거사정리를 추진했다. 많은 진통 끝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만들어졌고 1기 진화위가 출범했다. 김순자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신청했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열두 명의 가족이 간첩 누명을 쓰고 이후에 사면까지 된 사건이 어째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면조사가 원칙이었음에도 신청인 김순자에게 한 번의 전화가 끝이었다. "친척 진현식이 남파간첩 돼 집에 머물렀다"는 게 사실이라는 이유로 기각됐다. '가족들이 지하당을 조직했다', '북한과 내통해 군사기밀을 빼돌렸다' 등등 모두가 거짓이었지만 이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순자의 신청이 기각되고 이어 태룡이 같은 사건을 접수했다. 진화위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걸 재신청으로 봐야 할지 이의제기로 봐야 할지를 두고 말이다.
아마도 정치적 이유였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섰고 처음부터 쉽지 않았던 진화위의 활동이 더 위축됐다. 이 사건의 재심을 받아주면 재심 신청이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을 게다. 기막힌 일이었다.
남은 건 소송뿐이었다. 김순자는 2010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열두 가족의 소송도 두 번에 나눠서 했다. 먼저 소송 제기한 김순자 등 가족 3명은 2013년 최종적으로 무죄를 확정받았다. 태룡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은 뒤이어 소송을 제기해 2016년에야 무죄가 확정됐다. 국가는 뭐가 억울한지 항소도 했었다. 판결이 확정되는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김순자는 "아버지에게 말해주고 싶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열두 명 일가가 누명을 벗는 데 총 37년이 걸렸다. 열두 명 이상의 삶에는 65억이라는 배상이 책정됐다. 김순자는 그저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만 했다.
어찌 됐든 배상은 국가가 이제 와서라도 잘못을 시인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많이 늦었지만 다른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도 어떤 지표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국가폭력에 가담해 수많은 삶을 파괴한 고문수사관들은 국가의 훈장을 받았다. 아직까지 이름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보수정권 때는 더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사법부는 국가의 책임 범위를 한껏 줄였다. 국가배상의 기준도 까다롭게 변경했다. 고문을 당했어도 기소되지 않으면 배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배상청구도 6개월로 제한됐다. 심지어 배상 판결을 받은 피해자 일부에게 "법이 바뀌어서 자격이 안 된다"며 "배상금 일부를 반납하라"고까지 했다. 지연된 이자까지 내라며. 몇몇은 집을 가압류당하기도 했다. 국가는 그게 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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