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 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바로가기)
㉓ 장 조레스 上 (☞바로가기)
"나는 고발한다. (J'accuse…!)" : '진보적 인문주의자' 장 조레스와 '드레퓌스 사건'
장 조레스가 프랑스인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사람'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며, 신학, 가정, 국가 모두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지,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겨진다면 그건 부정해야 할 사상이요, 족쇄요, 끔찍한 우상에 지나지 않는다"(<사회주의와 자유>, 1898)고 비판한, '사회주의는 계급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길'을 닦은 진보적인 인문주의자였다.
드레퓌스 사건을 마주한 조레스의 태도는 그것을 잘 보여줬다.
1898년 1월 13일 프랑스의 일간지 <로로르> 1면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글쓴이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가 에밀 졸라(Émile Zola)였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공개서한을 써서 드레퓌스의 무고함과 무죄를 주장했다. 본래 이 공개서한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소극적 제목이었는데, 주필인 클레망소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보다 직설적인 제목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 '드레퓌스(Dreyfus Affair) 사건'이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후, 프랑스의 포병대위 드레퓌스에 대한 간첩 조작사건으로,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 반유대주의, 강박적인 애국주의는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만들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그의 간첩혐의는 프랑스 사회가 양분된 정치적인 스캔들이었다. 무죄를 주장하는 드레퓌스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드레퓌스파가 양분되어 격렬하게 투쟁했다.
유대계 프랑스 장교인 드레퓌스는 1894년 군사정보를 독일측에 통보했다는 혐의로 군적과 계급이 박탈되고, 종신형에 처해져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악마의 섬'(Ile du Diable)에 유배됐다. 2년 뒤 무죄를 증명하는 유리한 증거가 발견되고 진범이 밝혀졌지만 엄청난 파장을 두려워한 군 당국은 덮어버렸다. 이에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시작으로 정치투쟁으로 확대됐고 1906년 최고재판소에 의해 무죄로 확정돼 사건이 종결됐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나는 고발한다>를 외친 에밀 졸라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한 것은 진보적 인문주의자인 조레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졸라에 대한 졸속 기소는 거짓이고 비열하다"는 하원 연설 이후 조레스는 의회 내 드레퓌스 진영의 리더가 됐다. 그는 법정에서 "에밀 졸라는 조국에 대한 고귀한 봉사로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군부와 가톨릭교회가 왜 졸라를 증오하는지, 왜 그를 기소하는지 잘 알고 있다"며 이렇게 증언한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진실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과, '극단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사회를 어떻게 광기로 몰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프랑스는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이 사건을 통해 국민 전체가 개인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 '똘레랑스(tolérence)의 프랑스'를 만들었다.
※영화 <빠삐용>(Papillon), 노회찬과 드레퓌스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를 보면 영화 <빠삐용>이 나온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노회찬에게 잊혀지지 않는 영화 <빠삐용>을 보면, 드레퓌스가 유배된 '악마의 섬'이 나온다.
수차례의 탈옥과 재수감을 거쳐 빠삐용이 마지막 수형지로 머물렀던, 악마의 섬, 망망대해가 보이는 절벽위의 바위에 걸터앉은 빠삐용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그 때 나이든 수형자가 다가온다. 그리고 빠삐용에게 도전적으로 묻는다.
'악마의 섬'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속의 실존인물인 드레피스와 빠삐용(앙리 샤리에르)은 약 45년의 시차가 있었다. 그런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드레퓌스 대위의 이름이 튀어 나온 것은 아마 그곳의 죄수들이 그 유명한 사람, 드레퓌스 대위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며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노회찬, "프랑스 국민과 돌아가신 에밀 졸라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2005년 9월 29일 광주고검에 대한 국회 법사위의 국정감사장.
이른바 '삼성 X파일'을 통해 '삼성 떡값'의 전달책으로 지목 받아온 홍석조 광주고검장의 용퇴를 요구하는 의원들과 홍석조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던 중에 주성영 한나라당 17대 국회의원의 홍석조 광주고검장에 대한 옹호성 발언이 논란이 됐다.
주성영은 김상희 법무부 차관에게 사퇴를 종용했다는 자신의 사례를 들며 "우리 고검장께서는 프랑스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알고 계시죠?"라고 홍 고검장에게 질의를 던졌다. 이어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가져야할 덕목으로 지적한 게 있다"며 "고검장께서는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은 뒤 "개인의 곤혹스러움과 개인적인 곤경을 인내로서 이기고 근거도 없는 의혹으로 몰아넣고 있는 세력을 용서하고 끝까지 검사로서의 직위를 지켜낼 것을 약속할 수 있습니까"라고 감쌌다.
주성영의 발언에 대해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질타했다.
그에 앞서 2005년 5월 6일 여야 국회의원 113명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노회찬이 함께 한 것은 당연했다.
그 배경은 5월 3일 제정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위법 또는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발생한 사망·상해·실종 사건과 그밖에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과 조작의혹 사건"을 진실규명 대상으로 규정했으나,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은 제외"하도록 해 지난 1992년 강기훈 씨가 징역 3년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이 사건은 조사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노회찬 등 서명 의원들은 "(유서대필 조작으로) 김기설의 분신은 숭고한 의미를 빼앗겼고,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던 강기훈이라는 청년에게는 죽어가는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준 반인륜의 천형과 패륜아로서의 굴레만이 남게 됐다"며 "우리의 이성과 양심은 참으로 오랜 동안 어둠의 동굴에 갇히게 됐다"고 회고했다.
또 "아직도 그 당시 사건에 관여했던 인사들은 검찰 등 권력기관의 주요 직책에 있지만, 지금까지 반인륜적, 반인권적 유서대필 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강성준, 「"유서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국회의원 113명 진상규명 요구 서명 동참」, 인권운동사랑방, <인권하루소식> 2806호, 2005.5.6.)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1991년 노태우 정권 때 일어났다. 당시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잇따르는 가운데,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분신한 이후, 그의 친구인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처벌됐다. 강기훈은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1994년 만기 출소했다.
'사건' 당시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노회찬은 부모님께 부친 편지(1991.5.11.)에서 안타까움과 분노의 심정을 피력했다.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2년 재심이 개시됐으며, 2015년 5월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강기훈 유서대필은 조작이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24년 만에 비로소 완전히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2012년 간암 판정마저 받은 강기훈은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지탱해야 했다.
재심 공판이 열린 2014년 1월 16일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강기훈은 최후진술에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누구에게 욕을 해야 할 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면서 사건의 책임자들인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노원욱, 임대화, 부구욱, 박만호, 전재기, 정구영, 김기춘'의 이름을 읊었다.
※ 참고로,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은 박근혜 정부 대통령 비서살장을 지낸 김기춘이었고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2021년 "아들 화천대유 퇴직금 논란"과 관련해 언론의 조명을 받은 곽상도 국민의 힘 20대 국회의원은 1991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때 담당 수사검사로 박근혜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은 "저는 당사자로서 재판을 받았지만 제 주변에서도 91년도의 기억을 갖고 똑같이 아파하고 똑같이 괴로워하고 삶이 비틀린 수많은 사람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아픔이 오늘의 판결을 통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고 제 바람입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2015년 5월 3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누가 그를 모함했나?-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4년의 진실>에 나온 주치의 강용주는 제작진에게 강기훈이 암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6개월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는 마지막 불꽃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우리 사회가, 국가가 '정말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말을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소견을 밝히기도 했다. (황서연 기자, 「'그것이 알고 싶다' 강기훈, 암 투병 중 "국가.사회적 차원 사과 필요해"」, <티브이 데일리>, 2015.5.31.)
노회찬과 '삼성X파일 사건': "나를 기소하라", "나도 기소하라"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불의와 거짓에 맞서 싸운 것이라면, 노회찬의 의원직 상실을 가져온 한국의 '삼성X파일 사건'도 비슷한 맥락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노회찬의 오랜 길동무이자 변호인이었던 박갑주 변호사는 '삼성X파일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05년 8월 18일 떡값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2007년 5월 21일 서울중앙지검이 명예훼손 및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노회찬을 기소하자, 영등포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은 옥중편지를 인터넷 언론 <레디앙>에 보냈다. (김성환, 「노회찬과 함께 나를 기소하라」, <레다앙>, 2007.5.23.)
김성환은 무노조 경영을 철칙이자 금과옥조로 해온 삼성과의 15년간 싸움을 이끈 장본인이자 산 증인으로, 엠네스티 국제사면위원회 양심수에 선정되기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옥중편지 일부를 소개한다.
'나는 고발한다'로 졸라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의 고소로 재판에서 1년 징역형과 3000 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은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한 뒤 결국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1898년 반드레퓌스파들은 조레스에게 "생디카의 노예, 조국 없는 유태인들, 배신자 드레퓌스를 변호한 졸라를 옹호했다"며 그가 가는 곳마다 "졸라 타도", "조레스 타도"를 외치며 집요하게 공격했다. 결국 선거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조레스는 의원직을 잃게 된다.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이런 문장을 끝을 맺는다.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던 날(2013.2.14.) 노회찬은 '국회를 떠나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을 맺는다.
'애국',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 "사회주의자에게도 조국은 큰 의미를 가진다"
조레스에게 사회주의 원칙은 바로 '인간'이며,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익과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에게서 폭력은 부정되며 반전평화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공화주의자이자 휴머니스트이며 사회주의자인 이유이다. (배성인, 「조레스의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월간 워커스>, 20j 호, 2016.7.28.)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슬슬 감돌던 시기 조레스는 반전평화론으로 인해 '친독일파'로 찍혀 애국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 개혁주의 노선을 프랑스 사회주의의 주류로 올려놓고 나서도, 노동계급과 농민을 비롯한 대중의 칭송을 받고도, 고립과 위험을 무릅쓴 것이다.
"잔잔한 구름이 폭풍우를 품고 있듯 자본주의는 그 안에 전쟁을 잉태하고 있다." 1905년 조레스가 예고한 말이었다. (막스 갈로, 「프롤로그: 조레스를 기억하다」,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1907년 8월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2차 인터내셔널 대회는 계속된 분과위 토의 끝에 국제긴장으로 전쟁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사태에 대면하여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전쟁에 반대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로부터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 전야까지 2차 인터내셔널은 전쟁을 억지하려는 사회주의 본연의 뜻을 거듭 표명하고 미완이지만 이 뜻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그런 유럽 반전평화운동의 지도자는 바로 조레스였다. (노서경, 「조레스의 반전(反戰)과 프롤레타리아: 1907년 슈투트가르트 인터내셔널 대회에 주목하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연구>, 11권 3호, 2014)
조레스는 프랑스혁명의 전통을 중시하며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자에게도 조국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애국자였다. 다만 그에게 애국은 반전평화였고, 자유와 평등의 한 수단이었기에, 그의 애국심은 애국주의와 부닥친다. 그리하여 1914년 7월,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덮쳐온다. (김수민, 「부당하게 고통 받는 '한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 그의 삶>」, <오마이뉴스>, 2009.11.13.)
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사건 중 하나가 바로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지도자 장 조레스의 암살이었다. 조레스는 1914년 7월 31일 우익 프랑스 청년에게 암살당했는데, 그의 암살은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과 함께 1차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 사건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그가 암살당하자 유럽대륙에서 반전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춰버렸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휴머니스트 노회찬, 반전평화주의자 노회찬 : "우리가 만난 정치인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정치인..."
노회찬 사후 세 번의 앵커 브리핑으로 그를 추모한 jtbc 손석희 사장은 tbs 특집 다큐 <함께 꾸는 꿈, 노회찬>에서 "정치적 입장을 떠나서 따뜻한 사람, 휴머니스트로 기억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노회찬이 떠난 뒤 그를 떠올리며 국회 환경노동조합 김영숙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회찬은 휴머니스트였다. 아니, 그렇게 살 수 있기를 소망했다.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11.1.17.)에선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변영주 감독과의 인터뷰에선 이렇게 밝혔다.
한편 노회찬은 '애국과 애국심'을 마치 보수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과 한반도의 긴장을 조장하는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한국의 '얼치기 보수'의 박제된 애국심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노회찬의 유고집 <우리가 꿈꾸는 나라>(창비, 2018)의 「전쟁은 선택지가 아니다」를 보면 반전평화주의자 노회찬을 드러내는 글귀가 눈에 띈다.
닫는 글: 조레스의 '크나큰 다수'와 노회찬의 '거대한 소수' :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한… "
1914년 7월 31일 저녁, 파리 몽마르트르 부근 신문사 거리의 식당에서 장 조레스는 극우 민족주의자인 암살자의 흉탄에 맞아 곧 사망한다. 향년 55세. 벨기에 브뤼셀의 인터내셔널 사무국에서 전쟁 억지를 위한 대중 연설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조레스의 피살 소식에 카르모의 광부들은 말을 잃고 오열했다. 그곳의 광부들은 오랫동안 조레스를 지지한 유권자이자 그의 친구였다. 이들이 "우리 조레스, 크나큰 조레스"라고 부른 그 사람은 10년이 지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4년 11월 23일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됐다. 썰렁한 날씨에 파리 북부와 동부의 노동자들이 행진에 나섰고 카르모의 광부들은 1914년에 이어 다시 이장 운구를 선도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조레스'였다. (노서경, 「해제: 사회주의 정치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음식천국 노회찬>(일빛, 2021)의 작가 이인우는 필자 후기('왜 우리는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일까?')에 이렇게 적었다.
노회찬의 길동무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이렇게 회상했다.
조레스는 '크나큰 다수'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레스는 사회주의 혁명을 '크나큰 다수'의 '기나긴 혁명'으로 기획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44년 만에 원내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에 대해 한 주간지는 "진보 깃발을 치켜든 '거대한 소수'의 탄생은 현대 정치사에 굵은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계완, '거대한 소수'의 치밀한 승리!, <한겨레21>, 제506호, 2004.4.21.)
2004년 5월 11일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당선자 10명은 <민주노동당 의정연수 대국민 실천선언>에서 이렇게 밝혔다.
노회찬은 노동자와 서민 등 거대한 다수의 지지자들을 등에 업고 정치활동과 의정활동을 하는,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노회찬의 정치적 삶 자체가 '거대한 소수'와 같았다. 노회찬은 사회 약자들을 대변하고자 했던 '거대한 소수' 정치의 대표였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한 전 기간에 걸쳐 비록 소수 진보정당 의원이었지만, 노동자, 소상공인, 여성, 장애인 등 사회 곳곳의 '투명인간'들의 잃어버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비를 맞고 함께 우산을 쓰려고 애썼다.
조레스의 '크나큰 다수'와 노회찬의 '거대한 소수', 카르모의 광부들과 국회 청소노동자들로 상징되는 사회 약자들의 삶과 함께, 그들과 함께 하려는 두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2010년 노회찬의 고교 선배이자 오랜 길동무였던 홍세화는 노회찬을 만나러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노회찬과의 만남을 마치고 난 뒤 홍세화는 '프랑스 사회주의의 아버지' 장 조레스를 호명하며 「만남, 그 후」를 이렇게 정리했다.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장 조레스와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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