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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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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⑧]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저우언라이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①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노회찬 ⓒ연합뉴스

노회찬,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저우언라이(주은래)

2004년 17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중앙선대본부장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2004.1.20.)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서프라이즈>의 지승호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

마지막 질문은 좋아하는 정치인을 말하라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쉽게 답변했다.

'레닌, 호지명, 주은래.'"

정운영은 노회찬이 주은래를 꼽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운영 :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주은래를 꼽으셨는데 그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노회찬 :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근면하고 성실하고 검소했으며 일에는 철두철미해서 정반대의 이해관계를 가진 키신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매력적인 인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운영 : 마오쩌둥 대신에 저우언라이를 꼽은 점이 다소 독특하네요.

노회찬 : 마오가 저우보다 더 훌륭한 사람일 수는 있어도 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마오는 강하기 때문에 경원시되는 면도 있겠죠. 또 너무 복잡한 인간형이라 타인이 쉽게 접근하고 편하게 배우기 어려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마오쩌둥보다 더 매력적인 사람",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는 누구? :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위대한 설계사'"

▲마오쩌둥(모택동)과 저우언라이(주은래)

저우언라이 총리 집무실 입구에 한 장의 대자보가 붙은 적이 있다. 1967년 2월 3일, 당원만 약 300만 명이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쇠약해진 심신으로 매일같이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까지 일을 하던 저우언라이의 건강을 염려한 사람들이, 건강을 돌보지 않는 그의 행동을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동지, 우리는 총리님께 좀 거역되는 일을 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총리께서 현재의 일하는 방식과 생활습관을 고쳐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일하시면 저희들을 위해 오래 일하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생활습관을 고치고 쉬셔야 총리께서는 변화된 몸 상태에 적응하실 수 있으며, 또한 오랫동안 당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의 이 바람은 당과 혁명의 심원하고 지고한 이익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 총리께서는 부디 저희의 이 같은 청을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권춘오 (「MB정부, 저우언라이를 배워라」, <이코노믹리뷰>, 2009.6.19.)

저우언라이가 서거한 1976년, 천안문광장에는 누군가가 쓴 추도시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니,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

저우언라이는 항상 마오의 뒤에 있던 제2인자였다. 그렇지만 최고 권력자보다 더 유명하고 더욱 존경을 받았다.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 그곳을 지나는 중국인들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정치지도자는? 답은 천안문 액자의 주인공인 마오쩌둥(毛澤東)이 아니다. 열이면 일고여덟 명으로부터 저우언라이(周恩來)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천호영 (「중화TV, '중국인민의 벗' <저우언라이> 다큐 방영」, <오마이뉴스>, 2007.7.5.)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친절한 인민의 벗', '세계가 경모한 대지의 아들' 저우언라이(1898.3.5.~1976.1.8)는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마오쩌둥 시기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국무원 총리(1949~1976)를 지낸 인물이다.

마오가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자리에 오른 1949년 10월 1일, 저우언라이(저우)는 그날부터 총리의 소임을 맡아 1976년 사망까지 26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마오가 중국정부의 최고권력자로서 중국 대륙을 지배하는 동안 그는 언제나 충실히 마오를 보좌해온 '제2인자'였다. 저우가 2인자임에도 마오보다 중국 인민들로부터 더 사랑받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저자 야부키 스스무는 두 사람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 인민에게 마오쩌둥이 엄격한 아버지였다면 저우언라이는 인자한 어머니였다."

저우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읽었다. "화장해 조국 산하에 뿌려 달라"는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화장돼 그가 모든 삶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 강토에 뿌려졌다. 미국 뉴욕 소재 유엔본부에는 그를 추모하며 조기를 게양했는데,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국제 사회에서 저우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 당시 UN사무총장이었던 발트하임은 조기 게양에 반발하는 국가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UN에서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조기 게양은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중국은 문명고국으로서 금은재화가 부지기수이고 인민폐도 헤아릴 수 없게 많습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는 생전에 한 푼의 저축도 없었습니다.

둘째, 중국의 10억 인구는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는 한 명의 자식도 없었습니다. 

만약 어느 나라 원수든 앞으로 이 두 가지 중 한 가지에만 부합되어도 그가 서거하는 날 우리 UN에서는 그를 위해 반드시 조기를 게양할 것입니다." 발트하임 (「MB정부, 저우언라이를 배워라」, <이코노믹리뷰>, 2009.6.19.)

"그러나 정작 외국의 중국 공관에서는 반기조차 올리지 못했다. 대사관 옥상에 중국 국기 오성홍기가 반기로 올려졌으나 한 시간 만에 다시 내려졌다. 추도회도 열지 못했고 애도 전문도 받을 수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내려온 훈령 때문이었다. 

주재국의 의회나 관서에는 반기가 걸려있는데 정작 중국 대사관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듯이 국기가 평온하게 펄럭거렸다. 당시는 장칭(강청 江靑)을 비롯한 4인방이 마오를 둘러싸고 전횡을 일삼던 때였다." 이중 전 숭실대 총장 (「현대중국은 주은래 밑그림에 등소평이 다듬고 색깔 입힌 것」, <아시아N>, 2018.12.5.)

격동의 78년을 살아온 대륙의 혁명가이자 권력의 2인자인 저우는 유언장을 통해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겼다.

"추도식을 크게 치르지 말 것. 부부이기에 앞서 영원한 혁명동지인 덩잉차오(등영초 鄧穎超)는 아내로서보다는 전우의 자격으로 추도식에 참석해 줄 것. 모든 재산을 당에 기부할 것."

저우는 일생동안 '6무(六無)', 즉 여섯 가지를 하지 않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사불유회(死不留灰),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생이무후(生而无后),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관이무형(官而无型),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당이무사(黨而無私), 당에 있었지만 사사로움이 없었다.

로이불원(勞而不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다.

사불유언(死不留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중국 건국 이전에는 강인한 혁명가로, 건국 이후에는 외교와 행정의 탁월한 정치가로 활약한 저우. 현대 중국에서 그만큼 인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지도자는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죽의 장막'으로 고립된 중국을 세계사 전면에 다시 등장시킨 주인공도 바로 저우였다.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한 저우는 1970년대 외교 일선에서 실용주의적인 '실사구시'의 태도를 내세웠다. 냉전 시기, 저우는 갈등과 대결보다는 화해와 타협을 추구했다. 그의 진심은 미국 등 서구 지도자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냈고 중국을 국제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1년 7월 닉슨의 밀명을 받고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에게 북경오리를 밀전병에 싸서 건네고 있는 주은래. ⓒ연합뉴스

닉슨은 1972년 미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며 "마오쩌둥이 없었더라면 중국 혁명이라는 불은 발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우언라이가 없었으면 불은 이미 다 타서 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위대한 파괴자' 모택동보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 '위대한 설계사' 주은래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주은래, 인민을 위해 살다 간 영원한 총리」, <목포시민신문>, 2015.12.8.)

1972년 '핑퐁외교'를 통해 미중 데탕트 시대를 연 미국 대표 국무장관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나는 저우언라이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며 그의 인품과 카리스마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중국 근대화의 초석 다진 저우언라이 리더십」, 연합뉴스, 2020.10.28.).

그러면서 "철학에 능통하고 역사를 통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뛰어나며, 남다른 지략과 재치 있는 언변을 가지고 있고, 풍류를 아는 걸출한 위인"이라고 극찬했따.

저우는 원활한 북‧중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북한과의 관계를 직접 챙긴 중국 지도자였다. 북한 함흥에는 저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북한에 있는 외국인 동상으로는 그가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 주은래는 항상 어떠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큰 일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주은래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아마도', '대충', '그럴 수도 있다'는 등의 표현이었다.

이런 주은래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은래는 외국 손님과의 만찬이 있는 날이면 항상 직전에 주방을 찾아간다. 그리고는 준비상황을 점검한 뒤 주방장에게 국수 한 그릇을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손님을 초대했는데 자신이 배가 고픈 상태로 식탁에 앉으면 식사하느라 급급해 손님을 챙기는데 소홀할까하는 마음에서다. 그는 항상 연회장소에서는 먹는 시늉만 하면서 손님을 대접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있어 오늘날 주은래는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안규호 (「중국의 초대 총리 주은래와 국수 이야기」, <시사신문>, 2009.11.2.)

<신중국사>(China A New History)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페어뱅크(J.K. Fairbank)는 뛰어난 분별력 등 위대한 능력을 지닌 매력적인 인물로 저우를 묘사하면서 "그가 48년간이나 공산당의 중앙정치국에 몸담았다는 것은 세계 신기록의 하나"라고 찬탄했다.

투철한 공인 정신과 청렴하고 온화한 성품의 저우는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바쳐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는 좌우명과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는 신조를 초지일관 지켰다. 실사구시의 자세로 중국의 내실을 다지는 데 앞장선 것이다.

노회찬,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을 통해 주은래와 연을 맺다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1974)는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본격화하던 1974년 봄에 출간됐다.

이 책은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처음 베스트셀러"가 됐고, "해방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작"이다. 시대를 고민하는 청춘에게 리영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고 "머릿속에서 지진을 일으키"고 "몽롱한 의식에 끼얹은 찬물 한 바가지"였다.

리영희는 깨어 있고자 한 청춘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였고, 알아야 할 교양의 첫 번째 목록이었다. (「출판사 서평」, 고병권 외, <리영희 프리즘>, 사계절, 2010)

▲<우상과 이성>을 소개하는 기사. <경향신문> 1977.10.21. ⓒ경향신문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은 당시 젊은이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이나 주입된 지식과 180도 다른 측면을 보게 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논리, 이념, 가치들이 잘못됐을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만들어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해준 것이다. 

(…)

당시 한국은 세계정세를 제대로 보도하는 외신이 없었고 국내 언론도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는커녕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어두운 상황에서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과 중국을 통해 미국의 패권적 시각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세계를 보는 시야를 넓혔다. 권우용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화된 정치에 돌을 던진 '가설'」, <대학신문>, 2016.3.13.)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현 서울시교육감)는 "유신교육으로 인한 냉전적 사고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지적 해방의 단비를 이 책에서 맛보았다. 유신 말기, 젊은이들이 비판의식을 세례받는 현장에는 언제나 이 책이 있었다"며 1970년대 중반 대학시절을 떠올렸다.

조희연과 동년배인 노회찬도 마찬가지의 신선한 충격 속에 해방의 단비를 맛보았다. "대학 들어갈 무렵에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이하 <전론>) 등을 보고 나서야 월남전의 새로운 면모를 이해"하게 된 것처럼, 이른바 '중공'의 실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훗날 좋아하게 될 정치인이자 마오보다 더 매력적인 저우도 만났을 것이다.

리영희는 <전론>에서 당시 한국 사회가 사용한 냉전 용어들이 의미를 왜곡해 선입관을 만든다고 꼬집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혈맹', '영원한 맹방'으로 표현하고,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서는 '북괴', '중공', '괴뢰'로 표현하는 세태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인식과 관념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대근 경향신문 전 논설주간은 "중공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중국은 뭔가 무서운 일을 꾸미는 세력으로 사람들한테 공포감을 주곤 했다"며 "<전론>이 중국 정권의 내부 실상을 전해 전혀 다른 관점에서 사회주의를 볼 여지를 줬다"고 평가했다.

<전론>은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제시했다. 한국전쟁 이후 반공규율사회로 주조된 한국사회에, 중국은 '빨갱이들이 완전히 통제하는 사회주의 국가' '모두가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이 행동하는 전체주의 괴물'이라는 선전에 뒤덮여있을 때였다. 한국사회는 중국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중국에 관한 논문을 모은 2부는 국공합작에서 시작해 한국전쟁 개입, 저우의 과도 집단지도체제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쳤다. 인해전술의 기억과 '죽의 장막'이라는 신화 너머에 있던 대륙이, 리영희의 날카로운 분석 앞에 생생한 속살을 드러내야 했다.

리영희는 <전론>의 속편인 <우상과 이성>(창비, 1977)의 「주은래 외교의 철학과 실천」에서 저우의 '세련됨'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그를 대한 사람이면 거의 예외 없이 혹해버리게 만드는 세련됨이다.

우리가 여기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될 사실은 흔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서양화가 곧 문명화인 것으로 착각하는 나라의 지도자나 외교관이 외교적 세련이라면 골프를 잘 치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서양식 사고방식과 서양식이 몸에 베여 있다는 따위의 세련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중국적인 지덕(智德), 즉 동양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세련이라는 것이다."

한국사회 '사상의 은사'로 불리던 리영희는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건강이 악화됐다. 40여 년 동안 연구와 집필에 정신의 진을 빼고, 9번의 연행, 5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등 총 1012일 동안의 징역살이를 하느라 육신이 많이 상한 탓이었다. 그래도 꽤 건강을 회복하던 그는 2010년 병환으로 다시 쓰러지며 그해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진보신당 상임고문이었던 노회찬은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의 별세 소식에 다음과 같이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리영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언론인과 지식인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 치열한 정신과 실천으로 보여주신 님은 진정 시대와 함께한 스승이셨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다음날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된 빈소를 찾은 노회찬은 "진보신당이 사회에서 금기시돼 온 문제를 건드릴 때마다 병환 중에도 뜨거운 격려를 보내주셨다. 진보정치가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안타깝다"며 추도의 마음을 전했다.

※ 참고

1991년 1월 26일 연세대 장기원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정치연구회(회장: 최장집 고려대 교수. 정치학) 월례토론회에서 리영희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을 주제('변혁시대 한국 지식인의 사상적 좌표')로 발표, 진보학계에 충격파를 던지기도 했다. 당시 한정연 연구기획부장으로 토론회를 기획했던 필자를 포함해 100여 명의 청중들 다수가 발표를 듣다가 충격을 받은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 토론회를 다룬 <한겨레>의 기사. <한겨레> "한국정치연구회의 올해 첫 월례토론회 '오늘의 변혁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이 땅의 진보적 흐름의 한 맥을 이끌어온 한 지성의 솔직한 자기고백이 '붕괴된 신념의 절망과 희망의 교직'으로 표현되는 자리였다."라고 평했다. 1991.1.29. ⓒ한겨레신문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성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사회환경의 개조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도를 낳은 바로 그 인간성이다. (…) 

거의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안일‧쾌락‧소유를 원하는 이기주의자일 수밖에 없음이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사회에서 입증된 셈이다. 

(…) 결국 인간성의 불가(不可) 개조성을 인정하여 이상적 인간과 현실적 인간의 절충적 형태를 수락해야 하지 않을까. 도덕주의적 인간형이 40도 이하로 허리를 굽히면 이기주의가 압도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후자의 허용각도를 30도 정도로 규제하여 전자의 사회가치적 규범력을 60도 정도 이상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안정 및 평형을 이루는 적정상태가 아닐까. 그 이상의 도덕주의를 요구하면 개인이 반대하고 사회가 무너질 위험성이 크다. 60도의 도덕사회로 만족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참이다."

토론에 나선 최장집은 리영희의 '전환'에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 "현존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상과 가치는 유효하며 '실패한 사회주의'를 교훈으로 더욱 더 올바른 인간적·민주적 사회주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최근의 정세 변화에 대응한 진보학계의 또 다른 흐름을 대변했다. (한겨레, 1991.1.29.)

수년 후, 한 <중앙일보> 기자는 리영희에게 당시 학술대회에서 "'사회주의 실패는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간과하는데 있다'는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며 "이는 새로운 변신의 노력인가, 지난 논리의 수정을 뜻하는가"라고 물었다. 리영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사회주의라는 구조만 갖추면 사회주의적 도덕인간을 만든다는 구조결정론에 대한 반성이었다. 교조적 결정론에 대한 회의, 김일성주의를 과신하는 학생세력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허황된 구조결정론과 사회주의 인간상에 대한 비판이었다. 나치가 꿈꾸었던 이상적 아리안족이나 모택동의 문화혁명, 김일성의 인간형이 모두 인간의 본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는 환상에 불과하다." (중앙일보, 199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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