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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불꽃'을 만난 노회찬, 한국 사회의 논쟁에 뛰어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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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불꽃'을 만난 노회찬, 한국 사회의 논쟁에 뛰어들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④]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러시아의 레닌과 마주하다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연재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두번째 인물은 레닌이다. 이 연재는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블라디미르 레닌. 노회찬은 레닌을 "권력을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은데다 늘 공부하는 실사구시형"이라고 했다.

"'실사구시'는 진보의 기본원리이자 생명과도 같은 것"

노회찬과 함께 주안, 하인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함께 한 박병우는 이렇게 회상했다.

"노회찬 선배는 외삼촌이 소장한 책을 고등학교 때 다 읽었다고 했어요. 레닌의 <What is to be done(무엇을 할 것인가)>도 그때 원전으로 봤다고 하더군요. 외삼촌이 '너희들은 왜 그렇게 잡혀서 감옥 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느냐. 안 잡히고 정상적으로 운동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했다고도 했어요." 박병우

작은외삼촌 원태진이 노회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노회찬 평전>을 쓰고 있는 이광호 작가에게 들을 수 있었다.

"청소년기 노회찬을 사회운동 입구에 있는 우물가로 데려간 사람은 작은외삼촌 원태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데려갔다기보다 그의 존재 자체가 우물이었다. 흥남에서 1년, 피난지 거제에서 1년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에 들어가 졸업 며칠 전에 구속돼 7년 징역형을 다 채우고 나온 외삼촌의 아우라가 어린 노회찬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다.

(중략)

서울 시절 소년 노회찬이 만끽한 해방감은 외삼촌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외삼촌이 소장한 책과의 만남은, 고교 시절 그가 접한 비판적 월간 잡지와 함께 그를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흥남에서 1년, 피난지 거제에서 1년 고등학교를 다니고, 서울대에 들어가 졸업 며칠 전에 구속돼 7년 징역형을 다 채우고 나온 외삼촌의 아우라가 어린 노회찬에게 준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레닌의 <What is to be done(무엇을 할 것인가)>도 그때 원전으로 읽었다." 이광호

▲노회찬. 2016년 4.13 총선 당선 확정 당시. 2004년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를 시작으로 3선에 성공했다. ⓒ연합뉴스

수십 년이 흐른 2004년 1월 20일, 당시 민주노동당 중앙선대본부장 노회찬은 <선대본 일기>를 통해 레닌을 다시 불러낸다.

"<서프라이즈>의 지승호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수십 개의 질문을 준비해 왔다. 질문의 범위도 넓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고, 그만큼 멀리 있었던 셈이다. 마지막 질문은 좋아하는 정치인을 말하라는 것이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쉽게 답변했다.

'레닌, 호지명, 주은래.'

보도되면 한나라당에서 문제삼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내일은 레닌이 서거한 지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밤 많은 눈이 내렸다." 노회찬

세 명 중 한 명으로 레닌을 꼽은 이유는 같은 해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 질문에 답하면서 '신영복 선생'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만둔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영복 선생이 '정치인'이 아니고, 또 '좋아한다'기보다는 존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레닌은 권력을 사적으로 행사하지 않은데다 늘 공부하는 실사구시형이었으며…." 노회찬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구소련에서 발행된 레닌 포스트카드

블라디미르 레닌(Lenin, Vladimir Il'ich Ul'yanov, 1870.4.22.~1924.1.21.)은 20세기 세계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로 꼽힌 러시아혁명을 이끈 지도자이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며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약칭 소련)을 건설한 인물이다. 또 마르크스·엥겔스주의 이론의 혁명적 실천자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킨 레닌주의 이념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레닌은 1917년 3월 15일부터 1923년 4월 30일까지 6년간 '레닌 시대의 소련'을 펼쳤다.

레닌은 혁명가로서 맑은 정신을 갖추기 위해선 지속적인 신체 단련과 소식(小食)이 필요하다고 보고 운동을 자주 했고 식탐을 멀리했다. '언행일치의 삶'을 필생의 신조로 여겼으며 특히 무지를 절대악이라고 보고 지속적인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독서광'이기도 한 레닌은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토론과 협상의 명수였다고 한다.

레닌의 주요 저서로는 <국가와 혁명: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 <무엇을 할 것인가>, <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4월테제>, <사회주의와 전쟁>,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일보전진 이보후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등이 있다.

※ 유네스코가 발행한 <번역목록>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자주 번역·출판되고 있는 책은 모든 부문을 통틀어 레닌의 저서들이다. 문학부문에선 톨스토이의 작품이, 종교서적 가운데서는 <성경>이 단연 으뜸으로 꼽혔다.

조사대상 71개국의 1978년 한해동안의 번역·출판 상황을 집계한 <번역목록> 제31집에 따르면 레닌 저서는 모두 432종의 번역서가 나왔다. 이어 영국의 추리작가 애거사 크리스티는 26개국에서 282종의 번역서가 출판돼 2위, <경외서>를 포함한 성경과 칼 마르크스의 저서는 각각 185종의 번역서가 출판돼 동률 3위를 기록했다. (<중앙일보>, 1984.5.16.)

'80년 5월 광주' … 1981년 참당암에서의 한 달. 혁명가의 길로

▲스물다섯의 청년 레닌(1895). 레닌은 할머니가 몽고족이었기 때문에 동양인의 모습이 꽤 있었다.

1895년 스물다섯의 청년 변호사 레닌은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레닌은 파리 시·제네바·취리히·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악셀로트·라파르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깊이 있게 토론했다.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 경험을 쌓은 레닌은 1895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귀국한 뒤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다.

▲스물다섯의 청년 노회찬(1981) ⓒ노회찬재단

스물다섯의 청년 노회찬은 마르크스, 레닌 원전 등 사회과학 서적 수십 권을 잔뜩 넣은 배낭을 메고 전북 고창 선운사 참당암(懺堂庵)으로 향했다. 노회찬의 참당암 행의 직접적 계기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1년 전 '80년 5월 광주'의 학살과 그에 대한 분노였다.

"광주에서 두 가지를 본 거예요. 하나는 '이제 극악한 독재세력들한테 그냥 데모하듯이 덤벼들어 가지고는 전망이 없다', 또 하나는 '시민들이 패배는 했지만 무장,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총만 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각성한 많은 대중들의 위력, 이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일부가 총 몇 자루 든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제 80년 5월이 우리에게 주는 게 많죠. 그 이전에 다양한 학생운동의 경험에 대해서 그걸 부정한다기보다는, 그걸 다시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된 게 80년 5월이었죠."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봄날의 박씨, 2015)

※ 참조 조현연은 '5월 광주'가 던진 시대사적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한국의 정치변동과 민중운동의 동학, 1980-1987」, 한국외국어대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 1997).

"유신독재의 붕괴를 계기로 분출된 '80년 봄'의 뜨거운 민주화 열기는 5․17 군부쿠데타로 무산되고, 이에 저항한 광주 민중들의 항쟁은 신군부세력의 강철군화에 의해 좌절되어버림으로써 '80년 5월 광주'라는 역사적 비극의 씨앗을 잉태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은 단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실패나 패배라고 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민중역량이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하는 계기로 한국 민주화투쟁의 거봉이자 민중운동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87년 6월항쟁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이처럼 과거와는 완연히 다른 실천활동과 함께, 학생운동세력은 운동의 전투성과 그 강도의 고양과 더불어 이념적으로 보다 변혁지향적이 되면서 맑시즘에 기초한 자본주의 분석틀과 혁명이론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모순과 지배적 사회균열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실천적 고민의 산물이었다."

한 달 동안 참당암에서 여름을 보낸 노회찬은 결심을 굳혔다.

"서른 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나는 점차 삶의 나침반을 찾아갔다. '물의 흐름'처럼 역사에 나를 맡겨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예나 이익을 탐하기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했다. 어릴 때부터 배운 '대의(大義)에 서라'를 떠올렸다. 상식이 통하고 약속이 지켜지는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굳혔다. 참당암을 나선 나는 전기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민중의 바다로 나아갔다." 노회찬 (노회찬, 「<내 마음의 법구> 참당암의 여름에 내린 결심내 마음의 법구」, 불광미디어, 2010.1.29.)

혁명가의 길: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과 '인천지역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토대가 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의 지도자들(1897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레닌.

레닌을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사건은 그의 형의 죽음이었다. 1887년 페테르부르크 대학에 다니던 그의 형이 황제(차르) 알렉산드로 3세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한 것이다. 평소 형을 따르던 17세 소년 레닌은 형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졌으며 그 뒤 혁명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1895년 혁명을 꿈꾸며 노동자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뻬쩨르부르그, 패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로 온 레닌은 지역에 있는 정치 서클들을 모아 지하 혁명 조직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만들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레닌은 파업 중인 공장노동자들이 읽을 전단을 작성하거나 체포된 노동자들을 적극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895년 12월 '반차르운동'에 연루되어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된 레닌은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고 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1990년 1월 석방됐다.

한때 레닌과 가깝게 지냈던,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문호 막심 고리키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 러시아에서 레닌만큼 강하게 그런 상황을 증오하는 사람을 나는 못 봤다. 그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혁명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확고한 인물이었다." 막심 고리키 (한상대, 「러시아 혁명과 레닌」, <한호일보>, 2013.4.19.)

※ 1924년 독일에서 펴낸 고리키의 단행본 <가난한 사람들> 말미에는 같은 해 사망한 38쪽 분량의 꽤 긴 레닌의 삶에 대한 추도사(「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었다」)가 들어 있다.

스스로 '회의에 찬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말한 고리키는 추도사를 통해 혁명가 레닌의 사상을 반추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일상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레닌은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자주 듣고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었다. 고리키는 레닌 집권 2년 후 망명길에 올라야 했지만 혁명 동지로서 우애와 존중심을 잃지 않는다. 고리키는 레닌이 "단순한 심장에서 나오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 또한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진실한" 웃음을 지었다고 회고한다.

잠든 러시아를 일깨운 레닌, 사람들이 부당한 불행과 슬픔과 고통에 대해 격렬한 증오와 경멸을 드러냈던 레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이었던 레닌, 참된 인간의 표본인 레닌을 고리키는 존경하고 좋아했다.

▲노회찬. 2016년 '구의역 참사' 현장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19세의 김 군은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연합뉴스

노회찬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 노회찬 (정치와평화연구소의 컴퓨터통신,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

잘못된 세상에 대한 분노는 휴머니스트 노회찬을 혁명가의 길로, 정치가의 길로 이끌었다.

1895년으로부터 91년이 지난 1986년 5월, 최봉근·정태윤·노회찬 등 혁명을 꿈꾸던 젊은이들은 한국의 페테르부르크라고 불리던 인천에서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노선을 따르는 '인천지역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만들었다. 이들도 민중의 고통은 운명이 아니라 투쟁과 혁명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속에, 비합법 전위정당 건설을 조직적 목표로 삼았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 나중에 이러 저러한 많은 과정을 거쳐서 당이 되듯이 우리도 그런 걸 설정을 한 것입니다." 이광일 (「노회찬 구술」, 조현연 외, <'한국 노동정치/진보정당 운동사 관련 체계적 자료 수집․ 정리(D/B화)와 연구' 관련 구술녹취자료집>, 2006)

한채영은 <인천지역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사회운동론적 고찰을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1985년 사실상 인노련이 해체된 후 인천, 주안, 부천의 서클 대표자들 중 '반교조주의', '반주사', '반CA'에 동의하는 최봉근, 정태윤, 노회찬은 반합법 노동자 정치조직 결성을 합의한다. 이후 1년 간 준비를 거쳐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노선을 따르는 PD계열의 조직인 '인천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한다. 이들은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살인 고문·강간정권 타도를 위한 인천노동자 투쟁위원회'(타투)를 결성하고, 6월항쟁 국면에서 인천지역 투쟁을 주도한다. 1987년 6월 26일 인천 부평역 앞 가두시위 도중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발족식을 거행한다." 한채영 (<인천지역 민주노초 운동에 대한 사회운동론적 고찰을 중심으로>)

레닌의 <이스크라>, 노회찬의 <사회주의자>

: "하나의 불꽃이 큰 불로 타오를 것이다!", "모든 금기를 무시하는 완전한 자유를 추구"

▲<이스크라> 창간호(1990) ⓒ노회찬재단

<이스크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기관지로, "하나의 불꽃이 큰 불로 타오를 것이다!"를 좌우명으로 했다. '이스크라'(И́скра, Iskra, 스파크)는 '불꽃'이라는 뜻인데, 데카브리스트(12월당)를 찬양한 푸쉬킨의 시에 러시아의 시인 오도예프스키가 쓴 답시 중 "타오르는 불길도 한 점의 불꽃에서부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노동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레닌은 <이스크라>의 실질적 조직가이자 편집자였다. 레닌 외에 최초의 편집위원으로는 후에 레닌과 대립한 정치가 마르토프, 혁명의 소장파 포트레소프와 노장파 트로츠키, 플레하노프, 자슬리프 등이 참여했다. 창간호는 1900년 12월 독일의 라이프니치에서 발행했고 2호부터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뮌헨·런던·제네바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 발행했다. 평균 발행부수는 8000부였다.

레닌은 창간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러시아에서의 마르크스주의 정당 창립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전국적인 신문의 사상적·조직적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스크라>는 이후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 이르러 볼셰비키적인 당의 강령과 규약 초안을 마련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마르크스주의의 우파인 멘셰비키 계로 편집권이 넘어가면서 발행된 52호부터 1905년 10월의 112호까지 발행되고 <이스크라>는 중단됐다(출처 야후 백과).

▲<사회주의자> 창간호(1989) ⓒ노회찬재단

과거 노회찬은 이스크라 편집진을 동경했다고 했었다. 그가 말한 '과거'는 고교 시절이다.

"과거에 <러시아 혁명사> 같은 거 읽으면서 굉장히 감동했던 건 뭐냐 하면, <이스크라>라고 혁명가들이 만든 신문 있잖아요? 편집진이 당시 핵심 혁명가들이었는데, 서술한 내용을 보면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었어요. 사실 봉건시대 이전의 교양인은 귀족이었죠. 그런데 봉건시대 이후의 교양인은 혁명가였어요. 문학, 과학, 예술, 철학, 이런 것에 대한 이해가 굉장히 풍부했고, 그런 것들이 혁명에 영향을 많이 미쳤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걸 굉장히 중시해야겠다, 혁명가가 되려고 음악을 좋아한 건 아니지만." 노회찬 (「김어준, 노회찬에게 묻다」,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스터디 그룹을 조직한 것이었습니다. 7~8명이 호응했고, 긴 토론 끝에 '철학'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 그러다가 발견한 책이 신상초의 <레닌 전기>( 정확한 책 제목은 1966년 출간된 <레닌과 러시아혁명>: 필자 주)였는데, <이스크라> 편집진의 열의와 헌신 부분은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레닌의 발견을 곧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갔지요. 고입 재수생 시절 정음사 문고판 <마르크스 경제학 비판>(☞ 정확한 책 제목은 <정치경제학 비판 서설>: 필자 주)을 사들고 실망했던 일은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노회찬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4)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제56호(2001.8.31.~9.6.)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56호(2001.8.31.~9.6) '민주노동당 사람들 ④: 노회찬(부대표. 서울시지부장)-첼리스트 소년이 혁명을 선택한 이유들'을 보면 노회찬은 고교시절 읽은 사회과학서적의 목록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신상초의 <레닌과 러시아혁명>, <근세혁명사상사> 등을 꼽았다.

인터뷰를 한 이광호(<진보정치> 편집국장, 민주노동당 편집위원장)는 이렇게 정리했다.

"'운동이 객기나 감정이 아니라 과학적 원리에 입각해야 성공한다'는 교훈과 '노동운동에의 지향'이 그의 내부에서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청소년 시절의 방황이 끝나는 지점에서 혁명을 만났다." 이광호

1987~88년 동안 인민노련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만들어 놓은 지형에 맞춰 현장 결합을 넓고 깊게 가는 한편, 교육연구소·상담소 등을 통해 공개된 공간에서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다. 이것이 인민노련이 노동 현장에 뿌리내리기 위한 사업이었다면, 전국적 정치조직 건설을 위해 공을 들인 것은 기관지 사업이었다. 당시 좌파 정치조직들은 레닌이 강조했던 '전국적 정치신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노선을 선전하고, 전국을 조직하고, 잘못된 노선과 싸우는 데 기관지가 가장 좋은 무기였다. 사실 그것 말고는 자기 조직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였다. 정파들 간의 논쟁과 경쟁은 주로 기관지를 통해서 이뤄졌다.

▲인민노련 기관지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 ⓒ노회찬재단

1987년 인민노련의 대중용 기관지인 월간 <노동자의 길>과 비정기 간행 이론지인 <정세와 실천>이 창간됐다. <정세와 실천>은 1988년 하반기 폐간하고 <노동자의 길>을 소책자 형태로 발간했다. 발간을 책임졌던 황광우는 이렇게 밝혔다.

"처음엔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했는데, 별 내용이 없는 소식지 비슷한 것이어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신문을 내야 된다는 의무감에서 계속 이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신문을 배포해 주었던 교회와 같은 거점들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혼신을 다하여 만든 신문들이 수천 장씩이나 그대로 쌓여 있었던 것이다." 황광우 (<잎세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거름, 1992)

충격을 받은 황광우는 '별 볼일 없는' 신문은 더 이상 만들지 말겠다고 결심하고 기관지를 책자형으로 바꾸고 기사 중심에서 벗어나 폭로·이론·노선 등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1988년 8월 발행된 <노동자의 길> 29호부터 기관지가 개편됐고 유사한 내용으로 제작되던 <정세와 실천>은 발행이 중단됐다. 그 뒤 <노동자의 길>은 현장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당시 기관지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었다. 학습과 조직에 필수적인 무기였다. <노동자의 길>은 조직원들의 학습 교재가 됐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 서점에서도 인기가 있었고 기관지 배포망은 전국 조직망이 되었다.

▲<사회주의자> 1-4호 ⓒ노회찬재단

"우리가 인민노련을 탈퇴하고 나와 <사회주의자>라는 지하신문을 만든 이유의 하나는 레닌이 주장한 전국적 정치신문을 현실에 옮겨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 레닌이 이룩한 이스크라 그룹과 비슷한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황광우 (<잎세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거름, 1992)

1989년 8월 '전국적 정치신문'을 표방한 <사회주의자>가 창간됐다. 세상을 뒤집기 위해 모인 <사회주의자> 편집진의 일원이 된 노회찬이 고교 시절의 유혹과 매력을 기억해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회가 컸다. <사회주의자> 편집진은 노회찬·주대환·황광우와 새로 합류한 유인열 등 4명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자> 창간호를 만든 뒤 신림동 골목에서 대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술에 장사였던 노회찬도 황광우도 고주망태가 됐다. 황광우는 사비 3000만 원을 털어 기계를 사고 숙원이었던 '대망의 인쇄소'를 마련했다. 그 인쇄소에서 <사회주의자> 창간호와 <노동자의 길> 종간호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인쇄됐다.

훗날 노회찬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국 사업을 하기 위해서 정치적인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본 거죠. 이런 점에서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 이론을 보급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우리는 이론의 과잉이 더 문제였다고 봤고 현실에 접목시키지 못하고 현실에서 힘도 만들어 내지 못하면서, 이론만 공중에 떠 있는 것에 대한 경계심이 굉장히 컸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주의자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어떤 행동을 해야 되는가, 심지어 내가 <사회주의자>에 쓴 글을 보면 '전교조 교사가 누군가, 교사를 우린 어떻게 봐야 되는가, 계급적으로 어떻게 봐야 되는가'부터 시작해서 전교조 운동의 방향까지 제시하고, 이런 것들을 우리가 할 일이라고 봤던 거죠. … 나중에 내가 안산이나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면 그전부터 인민노련에서 <노동자의 길>과 <정세와 실천>을 뿌렸는데, 그것에 대한 신뢰가 상당히 있었고, 거기에 <사회주의자>까지 나오면서, 활동가들이 함께할 수 있겠다는 확인이 되었던 거죠."

(…)

"전국 조직 결성을 위해 만나던 분들 중에는 '너희들이 낸 기관지를 읽고 운동을 하게 됐다, 감동받았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물론 그런 분들은 굉장히 선진적인 노동자들이지 일반 노동자들이 그런 건 아니었죠. 노동자들에게 지도성을 발휘했던 정치조직은 없었을 때니까요." 노회찬 (유경순, 「노회찬의 구술생애사」, 유경순, <1980년대, 변혁의 시간 전환의 기록 2: 학출활동가의 삶 이야기>, 봄날의 박씨, 2015)

▲이인우 기자의 <음식천국 노회찬>(일빛, 2021)에 수록된 인민노련 활동을 다룬 <생산부장과 지하그룹 투사들>. 일러스트 김경래.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초기에는 조직 담당자로, 또 이후에는 격주간 발행하는 기관지 <사회주의자> 편집위원으로 인민노련 활동을 주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출간한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인천>(2005)의 「10.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이 과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민노련은 89년 봄부터 <정세와 실천>과 <노동자의 길>을 통합하여 <노동자의 길>을 발간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을 시작하기로 했다. 또 이 과정을 거처 통일문제는 주대환, 노동조합운동은 노회찬, 사회주의 선전의 문제는 황광우 식으로 분야별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 치안본부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감지하면서 '전국조직 건설'을 위한 조직 이원화가 결정되었다. 1989년 여름 주대환, 노회찬, 최봉근, 황광우 등 구 지도부가 인민노련을 나가고 오동렬, 윤철호, 정광필 등으로 신 지도부를 구성했다.

인민노련을 나간 구 지도부는 다른 그룹에서 합류한 유인렬 등과 함께 '전국적 정치신문'을 표방한 <사회주의자>를 1989년 8월 25일 창간했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라는 제호를 정할 때 '혁명의 불꽃', '선봉' 등의 제호는 진부하다며 친근감있게 '전태일' 같은 제호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간 "한국의 민족민주운동에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사회주의자로 추궁당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만 있었지, 스스로 자기를 사회주의자라고 주장한 적은 없었다"며 "모든 금기를 무시하는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고자 한다"며 <사회주의자>를 제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인민노련 사건이 터지고 이어 2차 인민노련 사건으로 노회찬 등이 검거되면서 <사회주의자>는 4호로 중단되었다."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사회주의자> 창간호 「창간사」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창간사의 기초자는 김철순(주대환)으로 돼 있지만, 노회찬 등 다른 이들의 생각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 이러한 일들은 곧 노동자계급의 유일하게 과학적이고 올바른 사상, 즉 과학적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이 과학적 사회주의에서만이 모든 의문의 일관되고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으며,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할 때만 이 온갖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비과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나아가 소외된 임금노예의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자신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다할 수 있다고 믿는다."

(…)

"그래서 우리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학습으로 모든 노동자를 이끌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학습 앞에 주저하는 노동자를 격려할 것이며, 과학적 사회주의의 학습에 어려움을 느끼는 노동자를 도울 것이다." (김철순 엮음, <사회주의자의 실천(1)>, 일빛, 1991, 94~99쪽에 재수록)

▲(표) <사회주의자> 각 호의 목차

▲ 1996년 영국 런던 방문 당시, 레닌이 <이스크라>를 편집한 '21세기 출판사' 건물 내 집무실을 찾아간 노회찬. ⓒ노회찬재단

1996년 첫 해외 나들이였던 영국 방문 당시 노회찬은 레닌이 <이스크라>를 편집한 '21세기 출판사' 건물을 찾아갔다. 앞서 <마르크스> 편에서 언급한 '마르크스 기념도서관 및 노동자학교'와 동일한 건물로, 영국에 망명한 레닌은 여기서 1902년 4월부터 1903년 5월까지 <이스크라>를 제작하여 러시아의 곳곳에 뿌렸다. 레닌의 집무실은 방문객을 위해 보전되었다. <이스크라>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이었을까, 노회찬은 <이스크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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