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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세" 42년만에 무죄...김수영 유작 詩 떠올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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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세" 42년만에 무죄...김수영 유작 詩 떠올린 사건

민변 "국가폭력의 피해자…피해자 중심적으로 접근해 인권침해 규명한 판결"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시인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의 전문이다. 1960년에 쓰여졌으나 발표되지 못했고, 김수영 사후에 발굴되었다. 당시 독재 정권의 사회상을 반영한 시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9년에 불법 구금과 고문에 시달리다 유죄를 선고받았던 피해자가 지난달 27일, 42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 사망 후 2019년 유족들의 재심청구로 이뤄졌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15일 논평을 내고 "피해자 중심적 접근에 기반해 피해자에게 가해진 인권침해를 적극적으로 규명한 판결"이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민변에 따르면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원은 지난달 27일, 2005년 사망한 A 씨의 유족들이 제기한 재심청구 사건에서 "A 씨의 자백은 영장주의 원칙에 반해 이뤄진 불법 구금 상태에서 이루어진 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다"며 A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영장주의 원칙'은 피의자를 구속할 때 구속영장이 있어야 하는 원칙이다. 당시 형사소송법에는 예외적으로 피의자가 중범죄를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망갈 우려가 있는 긴급한 경우에는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긴급구속의 경우 48시간 내 구속영장을 발부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피의자는 즉시 석방해야 했다.

재심 재판부는 당시 A 씨의 가족들이 대구지방검찰청에 제출한 탄원서에 '20일이 넘도록 아빠 얼굴을 못 봤다', '남편이 구속된 지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간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점을 들어 "A 씨가 긴급구속된 후 48시간 안에 사후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았고 A 씨가 석방된 정황도 보이지 않는다"며 "1979년 8월 3일 A 씨가 검거된 후 48시간이 지난 8월 5일부터 8월 10일 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A 씨가 불법 구금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A 씨의 자백 진술이 기재된 피의자신문조서는 영장주의 원칙에 반해 A 씨가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수집됐으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A 씨가 사망하기 전까지 경찰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종종 이야기했다는 A 씨 유족들의 진술에도 "구체성 및 진술에 임하는 모습이나 태도, 진술의 뉘앙스, A 씨와의 관계 등에 비추어 허위로 보이지 않는다"며 "A 씨의 당시 진술은 가혹행위로 인한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 씨가 '김일성 만세'라고 외쳤다는 사실에는 "당시 참고인의 검찰 진술 조서, 증인신문조서 등을 보았을 때 A 씨가 '김일성 만세'라고 큰소리로 외친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A 씨가 그 무렵 가정불화를 비관하며 연일 많은 술을 마셔왔고 △사건 당일 역시 만취 상태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반복하는 등 횡설수설하다가 인근 주민과 시비가 붙었던 점 △A 씨의 발언이 일회성에 그친 점 △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근무하던 A 씨가 이전까지 사상적으로 의심되는 언행을 한 적이 없다는 주변 지인과 동료들의 증언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A 씨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민변은 논평을 통해 "A 씨가 사망해 직접 진술할 수 없었음에도 A 씨의 가족들의 진술을 근거로 A 씨에게 이루어진 고문 행위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며 "객관적 증거 확보가 용이하지 않은 과거사 재심사건의 특수성과 국제인권법상 요구되는 피해자 중심적 접근이 충분하게 고려된 판단"이라고 평가했다.

나아가 민변은 "이 판결은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A 씨가 '김일성 만세'를 3회 고창한 사실이 범죄행위가 아니란 점을 명확히 확인했다"며 "세상을 떠난 A 씨가 무고한 국가폭력의 희생자였다는 점이 이번 판결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중학교 교사였던 A 씨는 1979년 8월, 술을 마시고 "김일성 만세"를 3회 고창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에 처해졌다.

A 씨는 당시 동네 주민들과 술을 마셨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김일성 만세'라고 고창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참고인들 대부분도 수사과정에서 A 씨가 '김일성 만세'를 고창한 사실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일부 목격자들의 진술을 근거로 A 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A 씨는 유죄 선고로 10년 넘게 재직한 교사직을 박탈당했다. 또 수사과정에서 이뤄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왼쪽 귀의 청력을 상실하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다 2005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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