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 사건에 대해 "박 전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25일 5시간여에 걸쳐 전원위원회를 열고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 보고'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자료, 박 전 시장의 행위에 대해 피해자에게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보았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에 근거할 때 박 전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피소 사실 유출 경위에 대해서는 "경찰청·검찰청·청와대 등 관계기관이 수사 중이거나 보안 등을 이유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박 전 시장의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결과도 입수하지 못했으며 유력한 참고인들도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하지 않는 등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성희롱'은 '업무·고용 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성희롱뿐만 아니라 성추행 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인권위는 특히 "박 전 시장이 사망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어 사실 관계를 좀 더 엄격하게 인정했다. 입증 자료가 없는 경우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면서도 "그럼에도 이 사건의 경우 인정된 사실만으로도 성희롱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반면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들이 성희롱을 묵인·방조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피해자가 비서실 근무 초기부터 비서실 업무가 힘들다며 전보 요청을 한 사실 및 상급자들이 잔류를 권유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면서도 "(비서실 직원들이)피해자의 전보 요청을 박 시장의 성희롱 때문이라고 인지했다는 정황은 파악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묵인·방조했다고 볼만한 객관적 증거는 확인하기 어려워도 서울시장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덧붙였다.
박 전 시장 사건이 성차별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권위는 서울시의 비서 운용 관행에 대해 "업무적으로 기관장과 긴밀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업무 범위가 불명확할시 공사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며 "이 사건 피해자는 시장의 일정 관리 및 하루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하는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명절 장보기 등 사적 영역의 노무까지 수행했다. 이로 인해 공적 관계가 아닌 사적 관계의 친밀함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서울시는 시장 비서실 데스크 비서에 20~30대 신입 여성을 배치해 왔다"며 "이는 젊은 여성이 적합하다는 고정 관념,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등 타인을 챙기고 보살피는 돌봄노동·감정노동은 여성에게 적합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또한 성희롱이 권력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짚었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은 9년 동안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직급 공무원으로 두 사람이 권력 관계 혹은 지위에 따른 위계관계"라며 "이러한 위계와 성 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조직 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이어 "이번 직권조사를 실시하면서 우리 사회가 성희롱 법제화 당시의 인식 수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음에 주목한다"며 "성희롱을 바라보는 관점을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에서 고용 환경에 미치는 영향으로, 거부의사 표시 여부가 아니라 권력 관계의 문제로, 친밀성의 정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인지 여부로, 피해자·가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문화나 위계 구조의 문제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 발표 직후 박원순 피해자는 입장문을 내고 "4년동안 많이 힘들었고, 지난 6개월은 더 힘들었다"며 "인권위의 발표에는 우리 사회가 변화해 나가야 할 부분이 언급돼 있다"고 이번 인권위 조사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지난 시간을 두고 "사실인정, 진실규명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건 국가기관이 책임 있게 논의한 시간들"이라며 "이 시간들이 우리 사회를 개선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인권위는 피해자 측의 직권조사 요구를 받아들여 지난해 8월 강문민서 차별시정국장 등 9명으로 구성된 직권조사단을 꾸리고 5개월간 서울시청 시장실 및 비서실 현장조사를 비롯해 피해자 면담조사 2회, 서울시 전·현직 직원 및 지인에 대한 참고인 조사(총 51명), 서울시·경찰·검찰·청와대·여성가족부가 제출한 자료 분석, 피해자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등을 통해 조사해왔다.
앞서 피해자 측은 지난해 7월 인권위에 직권조사를 요청하며 △박 전 시장 성추행 의혹과 서울시 관계자의 방조·묵인 의혹 △서울시 성폭력 신고처리 절차의 작동 여부 △고소 사실이 박 전 시장에게 누설된 경위 등 8가지 진상조사와 제도 개선 권고를 요청했다. 서울시도 자체 진상규명조사를 제안했으나 피해자 측은 "박 전 시장으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성추행을 당하며 4년 동안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 묵살당했다"며 거부했다.
이와 관련해 경찰은 지난달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을 피고인 사망으로 인한 공소권 없음으로 마무리했다. 다만 최근 서울중앙지법은 피해자의 또 다른 사건에서 박 전 시장이 보낸 문자 일부를 공개하며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사실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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