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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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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회찬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음식天國 노회찬] <18> 효자동 주점 <쉼,>

1.

2014년 이맘때쯤 노회찬의 화두는 '진보의 세속화'였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진보 자신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진보'다. 부족한 진보를 훈장과 족보로 가릴 수는 없다. 세상을 진보시키기 위해 자신이 먼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노회찬은 이렇게 당시의 '진보'를 진단하면서 진보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소리를 들을 것을 촉구한다.

"'세상을 무시하고 세상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는 것이 사실 이제까지 우리의 진보나 운동권 출신들의 어떤 약점이 아니었는가'라는 거다. '나는 민주화를 위해서 고생했다. 헌신했다. 희생했다. 나는 진보진영에 속해 있으니까 나는 무조건 옳다. 아니면 우리 진영은 무결점·무오류다. 진영이 다르면 저쪽은 다 나쁘고 우리는 다 좋다', 이건 설득력이 없다는 거다. 오히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왜, 무엇이 옳은지를 국민들이 납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거기에서 드디어 옳다는 판정이 내려지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저는 세상 바깥에서는 세상의 인심을 얻을 수가 없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에서 어떤 얘기가 오가고 있고 어떤 판단들을 하고 있고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그걸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그 속에서 우리가 버릴 것은 버리고 또 인정받을 것은 인정받는 그런 세상 속으로 돌진한다는 점에서는 '세속화'야말로 가장 요구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우리가 가장 부족한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2014년 11월 18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중에서)

▲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2009년 11월 29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2010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2.

서울 서촌 효자동에 지번으로 검색되지 않는 작은 포장마차식 주점이 하나 있다. 자하문로16길 사거리 연탄삼겹살집과 김밥집 사이에 하얀 간판이 둥근달처럼 떠 있는 집이다. <쉼,>. 휴식을 뜻하는 우리말 쉼에 콤마가 찍혀있는 게 예사롭지 않다. 간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콤마 뒤에 사인펜으로 '포차'라고 썼다가 지운 듯한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처음 온 사람들은 그것으로 주점임을 짐작하기도 한다. <쉼,>은 노회찬이 타계하기 8일 전에 들린 집이다. 미국 다녀와서 다시 오마던,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간 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술을 많이 드셨습니다. 새벽까지 6~7시간 동안 계셨어요. 초췌해 보여서 안쓰럽게 바라봤는데 그것이 마지막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작고한 남편이 노회찬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는 주인 최영애 씨는 노회찬의 부음을 듣고 2주일 동안 가게 문을 열지 못했다. 요즘은 노회찬의 절친이었던 장석 시인이 친구들과 종종 들린다. 통영에서 굴농장을 하는 장 시인은 <쉼,>에 싱싱한 생굴을 공급해 주기도 한다. 예약 손님 위주로 장사를 한다는 <쉼,>의 단골손님에는 정의당과 기본소득당 등 진보계열 사람들이 많다. 5개의 둥근 테이블 중 2개를 예약하고 약속을 잡은 날 주요 메뉴는 생굴, 꼬막, 가자미구이 등이었고 술은 셀프. 손님이 각자 취향껏 알아서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노회찬이 좋아했던 막걸리를 택했다.

술을 마시며 정치인 노회찬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기자라는 직업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인과 기자는 불가근불가원의 관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한통속(?)으로 굴러가야 생산적일 때가 많다. 노회찬이란 정치인과 불가근불가원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썼던 기자들이 적지 않다. '음식천국 노회찬'팀이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분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몇 분을 한자리에 모셨다. 언론을 상대하는 홍보업계에 오랜 속설이 하나 있다. "돼지 떼 모는 것보다 기자들 몰고 다니는 게 더 어렵다." 우리는 늦가을 저녁, 작은 포차 주점에 그런 기자님들 몇 분을 모아놓는 데 성공했다. 소속사의 지향성도 비교적 뚜렷하게 멤버도 짰다. 기자들이 모여 술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취중방담' 같이 횡설수설, 주설취설이 난무했으나, 한마디 한마디에 기자다운 냉철함과 노회찬에 대한 진심 어린 이해가 담겨 있었다.

참석해 주신 분들을 연장자순으로 소개한다. 우리나라 미디어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색깔을 띤 <레디앙>의 이광호 공동대표, <한겨레> 편집국장과 논설위원실장을 역임한 박찬수 논설위원, 2014년 노회찬 인터뷰집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를 펴낸 <오마이뉴스> 구영식 정치팀장, 2004년 국회의원이 된 노회찬으로부터 "우리 집을 찾아온 최초의 정치부 기자"라는 환대를 받은 <조선일보> 정치부 정우상 차장 등 네 분이 박규님 노회찬재단 운영실장, 이강준 정책실장과 자리를 함께 해주었다. 이광호 대표는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진보정치> 편집위원장을 지낸 노회찬의 오랜 진보정당 운동 동지이기도 하며, 박찬수 위원은 80~90년대 학생운동의 양대 계파 중 하나인 엔엘(NL)의 역사를 다룬 <엔엘현대사-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2017)를 펴냈고 최근에는 <한겨레> 지면에 '진보를 찾아서'를 연재하고 있는 정치전문기자. 구영식 기자는 90년대 초 학번으로 노회찬이 이끈 진정추의 학생조직과도 같은 진학련(진보학생연합)에서 활동한 '운동권' 출신이다.

ⓒ노회찬재단

- 먼저 노회찬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들어보고 싶다

박찬수 : 노회찬 의원 타계 소식을 듣고 추모 사설 집필을 자청했었다. 노회찬은 '레드 컴플렉스'가 심한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대중과 가까워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것은 그대로 한국 정치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기도 했다. 그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공로를 꼭 평가해주고 싶었다.

구영식 : 여야 정치권에 여러 유형의 정치인이 있지만, 학생운동-노동운동-진보정당 운동을 하나의 궤도로 연결 지어 이끈 드문 정치인이었다.

이광호 : 노회찬은 내면적으로는 도저한 사회주의자, 외면적으로는 대중적인 현실주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이론이나 관념에 고착되지 않고 대중 속에서 자신이 지향한 사회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려 했고, 그것의 수단으로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일찍이 간파한 사람이었다. 이 점이 다른 진보운동가들과 달랐다.

정우상 : 진보정치가 제대로 평가되기 어려운 정치 현실 속에서 그가 발휘한 사고의 유연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는 진보진영의 선두에 있으면서도 항상 세상인심, 특히 주류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고 본다. 추모 칼럼에서도 '그의 심장은 왼쪽에 있었지만 두 눈은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썼다. 그를 어느 한 진영에 가둬서 평가하는 것은 그의 반만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 노회찬의 타계는 정치자금법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돈이 없는 노회찬은 정치를 하면서 가까운 지인들의 조건 없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문제가 된 돈도 변호사를 하는 고교 동창이 건네준 돈이었다. 지금의 정치자금법은 돈 없는 정치 신인, 원외 정치인에게 너무 불리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거불어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노회찬 의원 타계 후 정치자금 모금을 합법화하는 정치자금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지난 7월 민주당 최고의원 경선에서도 이의 추진을 주장했다

"사실 정치인이 정치자금을 받는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다. 돈을 받아서 사적으로 쓰지만 않으면 문제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자금법 위반에 걸려도 그 사유만으로 공천에서 배제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노회찬 의원은 4000만 원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를 취재하고 비평해온 기자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정치자금 모금 범위를 넓혀주되, 사용처의 검증을 철저히 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유권자의 정치 부패에 대한 우려나 후진적인 정치풍토를 생각하면 시기상조라는 생각도 든다. 노회찬 의원의 비극이 있었다고 법을 고치자고 하는 게 얼마나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비슷한 생각이다. 노회찬 의원의 비극은 그 자신의 가치관이나 철학의 문제로 평가해주고, 정치자금법 문제는 향후 국민 의식의 변화나 정치 현장의 변화를 봐가면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 당시 노회찬의 선택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사안에 비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다

"'진보의 세속화'를 말한 분이 정작 자신의 세속화는 한 점의 얼룩도 용납하지 않았다는 것에 정말 아이러니를 느꼈다."

"진보의 자의식을 극명하게 보여준 행동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선택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사안 자체는 다소 구차스럽더라도 정치 현실 속에서 충분히 설명하고 풀어갈 수 있는 문제였는데 스스로가 그것을 중대한 과오로 심판했다. 자기 자신을 당과 일체화해서 사고했던 사람이었기에 그 책임감과 부채감이 막중했던 것이다."

"진보정당이 잇따라 분열(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2011년 진보신당 내분)을 맛보고 정의당으로 합친 뒤인 2014년 시점에서 노회찬이 '진보의 세속화' 노선을 들고나왔는데 당시 나도 맞는 방향이라고 했다. 때를 묻히더라도 권력을 쟁취해 그 힘을 가지고 사회를 바꿔나가는 진보가 되자, 그것이었는데 그 전략이 자신의 과오로 인해 불가능해질 수 있다면? 그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만 보려고 하면 노회찬 의원 선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 된다. 그러나 진보의 세속화라는 노회찬 노선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면 노회찬 의원은 결코 개인적일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그 순간 오직 당의 미래를 생각했다. 그것이 노회찬 죽음의 진상이라고 생각한다."

"노회찬 의원 타계 소식을 듣고 윤동주의 <서시>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정치인의 내면에 이런 세계가 가능할까? 노회찬이라는 한 인간의 순결성과 그것이 현실 속에서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 같은 것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너무 아팠다.

- 과거 서울시장 선거(2010)나 동작 보궐 선거(2014) 등에 나설 때도 노회찬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당시 선택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얼마 전 심상정 의원이 TV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회고한 게 있다. 진보정당이 그 상황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다는 게 노회찬 의원의 확고한 판단이었다고. 한명숙(민주당)이냐, 오세훈(새누리당)이냐의 문제는 진보정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이었다."

"당시 노회찬 의원이 3% 정도 밖에 득표하지 못했지만, 그때 정의당이 후보를 내지 않았다면 그 이후 정의당도, 오늘날의 류호정이나 장혜영도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보수정당의 2중대에 머문다면 더 이상의 확장이나 성장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제는 노회찬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6411 정신'(청소노동자의 새벽 출근 버스. '함께 맞는 비'로 집약되는 노회찬의 서민정치를 상징한다)도 서울시장 선거가 시작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선거 본부에 박카스 한 병 들어오지 않았지만 '진보의 세속화' 노선도 그때 현장을 얻기 시작됐다."

"그때 나온 공약집이 <노회찬의 약속>이다. 선거 캠페인 책자로는 2004년 런던시장 선거 캠페인 북(<런던플랜>) 이후 최고의 걸작이지요 (웃음). <노회찬의 약속>에는 노회찬의 정치적 꿈과 정책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권영신이 총괄 기획하고 유성재 등이 편집자로 참여해 이광호의 레디앙 출판사가 펴낸 <노회찬의 약속>은 선거가 끝난 뒤 사람들의 뇌리에서 멀어졌다가 2018년 노회찬의 타계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이광호는 당시 있던 작은 일화를 잊지 못하고 있다.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신 뒤 여러 매체에서 책이 소개된 뒤 주문이 많이 들어왔어요. 책을 다시 찍기로 하고 재편집한 자료를 인쇄소에 보내기 위해 퀵서비스를 불렀습니다. 사무실에 온 퀵 아저씨에게 원래 책 한 권과 재편집 자료를 건네줬는데, 이분이 그걸 받아들고 사무실 문을 나서면서 탄식하듯 한마디 하시는 거예요. '아, 참 좋은 분이셨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그날 새삼 느꼈습니다. '노회찬이란 사람이 이렇게 우리 안에 퍼져 있구나'."

▲ <노회찬의 약속>(노회찬·노회찬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 위원회 지음, 레디앙 펴냄) ⓒ레디앙

- 노무현 대통령처럼 노회찬 의원도 죽음을 통해 국민의 가슴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노회찬 사후 어느 시사프로에서 도올 선생(김용옥)이 '인간 예수'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노회찬이 예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가 걸어간 과정과 닮은 데가 있다는 의미였다."

"일방적인 우상화는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좋은 뜻이라고 해도 노회찬 정신을 오히려 해치는 일이 될 수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저는 노 대통령이나 노회찬 의원과 같은 삶의 정리 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정도의 위치라면 잘잘못을 떠나 스스로 문제를 넘어서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사람들을 설득하고, 이해와 동의를 구하려 과정을 가졌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선택을 함으로써 일부 지지자들에게마저도 돈 때문에 죽은 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된 게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노회찬 의원이 살아서 아무리 진정을 다 해도 비난자들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런 식의 정리는 반대다."

"노회찬은 한국 사회를 위해 할 일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사안으로 멈춰 섰다는 게 너무 아쉽다."

4.

<쉼,>은 2016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4년밖에 안 되었지만 단골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제철 해산물이 주요 안줏거리다. 기자가 간 날에는 주메뉴를 적어놓는 판에 생굴, 꼬막, 딱새우, 조기구이 등이 올라있다. '라희'라는 예쁜 이름의 애견과 매일 가까운 인왕산을 다녀온 뒤 주점 문을 연다. 전주가 고향인 최 씨는 전북 진안이 고향인 어머니와 위로 세 명의 언니들이 한결같이 음식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본인은 막내라 주로 먹기만 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발달된 미각을 갖게 되었고 나아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시어머니가 지병으로 오래 앓았는데,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많이 지쳤나 봐요. 뭔가 내 일을 갖고 심신을 회복하고 싶어 가게를 열었습니다."

개업은 남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이뤄졌다. <쉼,>이라는 가게 이름도 남편의 솜씨. 안타깝게도 어머니 타계 1년 반 뒤 뒤를 따랐다고 한다.

"남편은 가구 수입업을 했는데, 거의 예술가나 다름없는 정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주점 벽에는 시어머니가 좋아한 화가 일랑 이종상(5만 원과 5000원 권 화폐 속 신사임당과 이이 초상을 그린 화가)의 그림도 두 점 걸려 있다. 남편이 가져와 인테리어 삼아 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남편이 <쉼,>이라는 옥호를 지어주었는데, 저는 사람들이 주점인 줄 모르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이 일어 쉼 자 뒤에 조그맣게 '포차'라고 써넣기도 했어요. 지나고 보니 괜한 걱정이었더라구요."

▲ <쉼,> ⓒ노회찬재단

주인 최 씨의 무전을 좋아하는 단골손님들이 많다. 흔히 먹어보기 힘든 별식이다.

"무전은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전주에서도 무전을 해 먹는 집을 잘 못 봤는데, 어머니는 잘하셨어요. 아마 진안 고향에서 해먹던 건가 봐요."

최 씨의 무전은 나름의 비법이 있다. 밀가루와 부침가루를 섞어서 반죽할 때 울금가루를 더한다. 무는 가을·겨울 생무를 쓰는데 무를 썰 때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이 포인트. 무를 반죽에 적시기 전에 밀가루나 부침가루로 먼저 옷을 한번 입히는 것도 알아둘 만 하다. 불은 약불에 가까운 중불. 아삭하게 씹히는 식감과 달고 고소한 맛이 별미. 찬 바람 솔솔 부는 요즘이 제철이다.

계란장조림, 무장아찌 등 밑반찬도 하나같이 짜지 않다.

"밥 반찬이 아닌 안주로 만들 때는 짜지 않게 해야 손님들이 잘 드실 수 있지요."

생굴은 초장이나 와사비보다 레몬즙에 찍어 먹는 게 취향이라고 하니까 금세 착즙기로 레몬을 통째로 갈아내 오신다. 맛과 서비스가 소문이 났는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도 늦은 밤에 일을 끝내고 종종 온다고.

"대통령님도 한번 오셨으면 좋겠네요. 단, 대통령님이라도 '술은 셀프' 룰을 따라 주셔야 하구요."

ⓒ노회찬재단

5.

- 마지막 주제입니다. 노회찬은 사회주의자였습니까?

"당명이 민주노동당이든 정의당이든, 그 자신이 뭐라고 말하든 노회찬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였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회주의자임을 자부했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건설 전 단계에서 거쳐 가야 할 노선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정의당 같은 당명도 수용할 수 있었다고 본다."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닌가? 현실사회주의는 소련 해체로 종식되었지만 사회주의 가치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걸 굳이 간판으로 내걸 필요가 있을까? 노회찬은 공정한 운동장을 만들려고 했지, '무슨 무슨 주의자'의 명찰을 달려고 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노회찬은 사회주의자였지만, 대중들이 비교적 덜 거부감을 갖는 사회민주주의를 의도적으로 사회주의의 대용어로 사용했다. 유럽의 사회당들도 대부분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기도 하니까.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현실적인 개혁 방법 사이에서 늘 고민했던 사람이다."

"나는 노회찬의 정체성, 또는 가치 지향을 논하려면 반드시 돌아가야 할 지점이 있다고 본다. 진보정당 당명이 '정의당'으로 결정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때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당시 '민주노동당'이란 당명이 결정될 때 후보 이름이 무려 77개였다. 그만큼 많은 정파와 지향성이 혼재해 있었다는 반증이다. 노회찬이 희망한 당명은 '민주진보당'이었다. '진보'라는 용어의 스펙트럼이 '노동'보다는 넓고 유연하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당원들은 민주노동당을 선택했다. 이념적 선택이라기보다는 당시 당원들의 주류가 노동운동 또는 노조활동가들이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노동이나 진보보다는 '통일' 같은 민족주의 성향을 추구하는 당원들이 적지 않았다.

민노당 창당 후 12년 뒤에 창당한 진보정당이 정의당이란 다소 생뚱맞은(많은 사람들에게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을 연상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당명을 가지게 된 것에 노회찬이 동의한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한 게 아니라 세 대결에서 밀린 결과입니다."

"2000년 노회찬은 대중성을 기준으로 민주진보당이란 당명을 생각했고, 2012년에는 '사민당', 즉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을 구상했다. 12년 전과는 달리 이념적인 지향성을 당의 전면에 내세우려고 했다. 왜일까? 2000년대 초와 달리 보수 여야정당이 경제민주화, 노동민주화 정책 등에서 진보정당과의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공장에 비유하면 민노당은 소공장이고 보수정당은 대공장이다. 소공장이 아무리 좋은 신제품을 내놔도 대공장이 베껴서 대량생산해 버리면 대공장 것이 된다. 그럼 소공장은 무엇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을까? 노회찬의 선택은 브랜드 전략이었다. 제품의 차별성을 지키기 어렵다면 공장 이름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수파들은 노회찬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명은 사민당 대신 정의당이 되었다."

"당원의 상대적 다수가 당명에 노동이나 사회 자가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결과였다. 정의당도 본래는 진보정의당이었는데 나중에 진보를 떼버렸다."

"'진보'라는 용어에 '혐오'가 존재했다. 노호찬 의원이 당시 참 설득을 많이 했는데 끝내 그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 한마디로 노회찬의 사민주의론은 노회찬 중심의 개량주의 노선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6.

노회찬이 타계한 지 2년여가 지났다. "노무현이 타계한 뒤 민주당은 DJ 중심의 지역당에서 노무현 중심의 수도권 대중정당으로 발돋움"했다. 문재인 정권도 그 결과물이다. 정의당은 어떤가? 지난 총선에서 6석을 얻고 새로운 얼굴들도 선보였지만, 노회찬의 유지가 계승되고 있다는 느낌은 찾기 어렵다. 문재인, 유시민 같은 노무현 계승자도 노회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노회찬 정신이랄 수 있는, 노회찬의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 정책, 비전 등을 이어받겠다고 나선 사람도 없었고, 당도 그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노회찬은 진보의 세속화라는 화두를 남기고 갔다. 진보정당이 대중 속에 튼튼히 뿌리를 내리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세속화'를 어떻게 정의해 낼 것인가는 남은 자들의 몫이다. 노회찬은 이런 말도 즐겨 썼다. '무감어수감어인(無鑒於水鑒於人)'. 물에 자신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 안에 자신을 비춰보라.

- '김종철 체제'의 정의당에게 기대를 걸어볼까요?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의 편집위원장이었던 이광호는 2004년 민노당이 김종필을 퇴장시키며 10석을 얻는 '기적'을 만들었을 때 신문 1면 헤드라인을 '거대한 소수'라고 달았다.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이 노회찬에게 "인생의 목표 절반을 이룬 날"이었다면, 이광호에게 2004년의 이 날은 "생애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노회찬평전>을 집필 중인 그는 김종철 대표가 정의당의 새 대표가 되어 다행이라고 했다.

"김종철, 소심한 사람 아녜요. 조심스럽게 폭탄을 던집니다."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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