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역사를 조명함에 있어서 전북 남원의 거물성은 매우 중요한 사적지임을 증명해주는 유물이다.
이를 알게 된 남원 보절면민들과 출향한 재경 보절향우회에서도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보절면 소재 자연 문화유산을 보절 12경으로 지정한 후 답사할 코스로 보절 하트길을 조성할 예정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태양광 시설이 설치 예정에 있다.
태양광 시설 설치와 문화유산 보존이 맞닥뜨리고 있는 거령산의 거물성에서 수습한 백제 시대의 기와를 들여다본다.
▲백제의 중요한 군사요충지 거물성
수습한 기와에는 도장이 찍혀 있다. 아쉽게도 많이 짓눌러 있어서 그 모양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바깥에 두른 큰 원 안에 둥그렇게 새겨진 작은 연꽃 문양은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되는 수부명기와의 모양과 유사하다. '수부(首部)'라는 말은 왕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는 점과 기와가 백제 시대에는 특별하고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된다는 점과 왕궁리에 발견되는 수부 인장과 같은 인장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다는 점은 거물성이 백제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또 인장이 새겨진 기와와 함께 발견된 토기들과 기와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여주는데, 이는 기와들의 안면에 나타나는 포목의 흔적에서 잘 살필 수 있다.
거물성에서 출토된 기와들 가운데에는 기와의 표면에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것들이 높은 수준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는 거물성 안에 세워진 건축들이 미학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잘 지어진 건물들이었음과 이것들이 상당하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간들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는 또한 거물성의 경제 규모가 매우 컸음도 짐작하게 해준다. 이와 관련해서, 토기는 거물성과 거사물현의 경제 규모를 어느 정도였는지를 방증해 준다.
▲대가야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토기
대가야의 영향이 확인되는 토기에는 산, 강, 구름과 같은 자연물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은 토기의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이념을 반영하는 상징인데, 이는 결론적으로 거물성과 거사물현의 문화가 고급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방증한다.
거물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토기의 제작 방식과 토기에 새겨진 모양들로부터 관찰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거물성의 서쪽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토기들은 대개는 6세기에서 7세기에 제작된 것들인데, 이 가운데에 일부는 시기적으로 1세기에서 3세기에, 일부는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들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적색 토기는 적갈색연질토기로 시기적으로 이른 서기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은 모양의 토기는 원삼국 시대에 많이 제작됐다. 이를 놓고 볼 때, 아주 이른 시기에, 즉 서기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거물성이 중요한 공간으로 여겨졌고,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요충지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흑청색 경질 토기는 백제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그 시기는 4세기에서 6세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아주 이르기 보면 4세기, 아무리 늦어도 6세기에는 백제가 보절 지역을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오른쪽의 토기들은 서기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들로, 이것들은 백제가 보절 지역을 완전하게 차지하였음을 보여준다.
거물성에서 발견되는 토기들과 기와들이 그 증거들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 제작된 토기도 간혹 출토되는데, 이는 백제 멸망 이후에 보절이 통일 신라 시대에도 지속해서 군사적인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건물성의 축성 시기를 추정하면 아주 이르게 볼때 마한 시대인 1세기에서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군사적인 관점에서 산성으로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된 시기는 6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중기 교류와 교통 연구에 중요한 토기
토기의 옆면을 보면 토기를 굽는 화력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나 있는데, 토기를 구운 온도는 대략 1000도 내외로 추정된다.
이를 놓고 제작 시기를 비정해 보면, 이 토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6세기 이전이다. 이 토기의 제작 방식이 백제의 그것이며, 그 제작 시기를 마찬가지로 늦어도 6세기 이전이다. 이는 서울대 고고학과 김종일 교수가 판정해주고 있다.
이와 같은 유적과 유물 증거에 기초해서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거물성이 성산, 즉 거령산에 축성된 시기는 서기 6세기 중엽 혹은 그 이전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1000도 내외에 토기를 구울 수 있다는 점은 이곳에서 청동기나 철기를 다뤄서 농기구나 무기를 제작할 수 있음을 방증해 준다.
또 거물성의 입지조건과 관련해서, 거물성이 있는 성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 보면, 멀리서는 지리산 노고단이 한 눈에 들어오고, 운봉에서 산동을 거쳐 보절로 들어오는 모든 움직임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있다.
거령산 정상에서 주변 사방을 둘러보면, 보절, 사매, 덕과, 오수, 지사, 산서 등의 6개 면도 한눈에 포착된다. 이와 같은 입지조건은 거령산에 거물성이 축성될 수밖에 없었음을 잘 설명해준다.
거물성은 이런 이유에서 삼국 시대 중기의 교류와 교통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리고 백제 시대의 마지막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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