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보절면 외항마을 황벌리의 태양광발전시설 허가취소 여론 배경에는 행정절차 무시와 조례 부칙경과규정의 자의적 해석 위법 허가 뿐만 아니라 주민환경 우선이다.
무엇보다도 지역주민들의 태양광발전시설 취소의 거센 반대 목소리에는 이 지역에 백제의 산성과 유적지가 있다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문화유적지 예비조사를 접수하는 등 역사 문화의 자산 보호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거물성의 역사와 가치
거물성은 역사적으로 역사적으로 남반사성이 핵심 거점으로 백제 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산성이었다. 참고로 백제의 남반 사성 가운데에 한 곳이었던 거창의 거열산성은 경상남도와 거창군의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올해 9월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을 예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거열성은 백제의 의자왕 시절에는 백제의 남반 사성 가운데에 한 곳이었다. 거물성과 거열성의 규모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거물성도 '국가 사적'의 지정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적지이다.
또 거물성은 거열성에서 볼 수 없는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백제의 산성은 물론, 삼국 시대 산성의 축성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사료이다.
거물성을 조성하면서 발전한 석공 기술의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산성석과 석불들이 만행산 줄기를 따라서 조각되었다는 점도 거물성이 소중한 역사의 현장임을 보여준다. 단적으로 바람 바위와 할미 바위를 그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할 수 있다다. 바람 바위와 할미 바위는 국가 보물의 지정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사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거물성이 문헌이든 유물이든 사료의 부족으로 연구의 사각지대에 놓인 백제 역사를 조명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적지이다.
▲백제 역사 조명 거물성 증명해주는 유물들
모두 태양광 시설이 설치 예정 중인 거령산의 거물성에서 수습한 몇 개의 백제 시대 유물들이다.
먼저, 백제 시대의 기와에는 흥미롭게도 도장이 찍혀 있다. 아쉽게도 많이 짓눌러 있어서 그 모양을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바깥에 두른 큰 원 안에 둥그렇게 새겨진 작은 연꽃 문양은 익산의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에서 발굴되는 수부명기와의 모양과 유사하다.
'수부(首部)'라는 말은 왕이 머무는 곳을 가리킨다는 점과 기와가 백제 시대에는 특별하고 중요한 곳에서만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왕궁리에 발견되는 수부 인장과 같은 인장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된다는 점은 거물성이 백제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인장이 새겨진 기와와 함께 발견된 토기들과 기와들은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거물성에서 출토된 기와들 가운데에는 기와의 표면에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것들이 높은 수준의 기술자들에 의해서 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는 거물성 안에 세워진 건축들이 미학적으로나 건축적으로 잘 지어진 건물들이었과 이것들이 따라서 상당하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간들이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거물성의 경제 규모가 매우 컸음도 짐작하게 해줍니다. 이와 관련해 토기는 거물성과 거사물현의 경제 규모를 어느 정도였는지를 방증해준다. 이 토기에는 산, 강, 구름과 같은 자연물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문양은 토기의 실용적인 목적을 넘어서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이념을 반영하는 상징인데, 이는 결론적으로 거물성과 거사물현의 문화가 고급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거물성에서 출토된 토기와 토기의 제작 방식과 토기에 새겨진 모양들로부터 관찰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거물성의 서쪽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토기들은 대개는 6세기에서 7세기에 제작된 것들인데, 이 가운데에 일부는 시기적으로 1세기에서 3세기에, 일부는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들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통일 신라 시대 이후에 제작된 토기도 간혹 출토되는데, 이는 백제 멸망 이후에 보절이 통일 신라 시대에도 지속해서 군사적인 요충지로 활용됐음을 보여준다.
거물성은 이런 이유에서 삼국 시대 중기의 교류와 교통을 연구함에 있어서 그리고 백제 시대의 마지막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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