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제에 대한 논란이 최근 뜨겁다. 기본소득제의 도입을 세계 차원에서 논의하기 위해 만들어진 BIEN(Basic Income Earth Network)은 기본소득을 '자산조사와 근로에 대한 요구 없이 모든 개인에게 무조건 교부되는 주기적 현금'으로 정의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청년과 농민 등 일부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현금을 지급하는 현금지원 프로그램이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제도화된 바 있다. 또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경제상황의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재난지원금이 전 국민에게 지급된 바도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완전한 기본소득제 도입을 위한 시작점이라는 평가도 있고, 차제에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본소득제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 글은 최근 한국에서 뜨거운 관심거리로 등장한 기본소득제를 비판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글은 완전한 기본소득제의 출발점이라고 주장되는 부분기본소득제는 물론이고, 그 과정을 통해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미래의 완전기본소득제 역시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본소득제의 문제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기본소득제는 새롭다 하지만 실은 새롭지 않다. 둘째, 기본소득제는 현실문제와 시대변화의 결과를 너무 단순하게 파악한다. 셋째, 기본소득제는 폐쇄적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국가 간 장벽 쌓기를 부추길 수 있다. (필자)
이름이 새로움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기본소득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얘기는 기본소득제의 전면화는 미래의 과제이기 때문에 부분기본소득제의 도입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부분기본소득제로 출발하면, 종착지는 완전기본소득제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소개되는 부분기본소득제의 하나는 충분성을 뺀 방식이다. 최근에는 긴급재난지원금이 부분기본소득제의 하나라면서 재난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이러한 프로그램도 기본소득제의 하나라면 그것은 결코 새롭지 않다. 일본, 홍콩, 싱가포르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국과 같은 형태의 현금 지급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에게 현금을 지급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일본은 2009년 자민당 아소 다로 정권 시절 정액급부금제도를 실시한 바 있다. 물론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에서 이러한 제도들을 (부분)기본소득제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정기성이라는 중요한 속성을 가지지 않지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기본소득제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니, 그런 것이라면 새로울 것이 뭐냐는 것이다.
부분기본소득제의 또 다른 형태는 무조건성에 제한을 두는 방식이다. 청년기본소득제, 농민기본소득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제도에는 이미 이것이 사회수당(Demogrant)이라는 이름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지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은 한국에는 2018년 9월에야 아동수당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프랑스는 1932년, 영국·체코는 1945년부터 시행 중이다.
소득 재분배만 강조하는 것은 낡은 생각이다
사회보장제도의 핵심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개의 견해가 있다. 우선 소득계층들 사이의 수직적 재분배를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적 기능은 고소득층으로부터 저소득층으로 소득을 이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한국의 사회보장제도가 경제사회적 약자보다 강자에게 더 후한 급여를 주고 있기 때문에 그 원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기본소득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를 위해서는 모든 특권적 자원의 향유로 얻어진 추가소득을 조세로 환수하여 모든 사회 성원에게 평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보장제도이든, 복지국가 프로그램이든, 기본소득제이든 고소득자의 소득을 환수하여 현금으로 재분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보장제도와 복지국가의 핵심기능을 소득계층들 사이의 수직적 재분배로 보는 생각이 낡은 것이라면 어떨까? 사실 사회보장제도의 핵심기능은 소득계층들 사이의 수직적 재분배가 아니라 사회위험의 분산이다. 더 나아가 소득계층들 사이의 수직적 재분배에서 사회위험 분산으로 그 기능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질적, 양적으로 더 발전할 수 있었고, 사회성원들에게 더 많은 편익을 줄 수 있었다. 사회위험 분산의 기능을 잘 수행하는 제도는 재분배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산출한다. 일반적으로 고소득층보다는 저소득층이 사회위험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큰 반면, 재원부담은 지불능력을 고려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회위험 분산 기능은 복지를 통해 이득을 얻는 수혜자의 범위를 확장하는 경로를 통해 소득재분배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또한, 사회위험 분산 기능은 복지를 통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범위를 확장함으로써, '복지동맹'의 형성을 가능케 하고,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의 정치적 지속가능성도 높인다.
왜 그런가? 실업이라는 중대한 사회위험을 생각해보자. 숙련 전속성이 큰 기능직 고소득자의 실업위험이 숙련 전속성이 작은 노무직 저소득자의 실업위험보다 너 낮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질병, 노령, 돌봄과 같은 사회위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득지위와 위험지위가 일치하지 않기에 다양한 집단(빈자와 중산층, 큰 숙련 전속성을 가진 노동자와 기업)이 복지동맹으로 연대할 수 있고, 정치적 다수가 될 수 있다.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본소득제를 포함한 사회복지제도의 핵심기능을 주로 재분배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득계층들 사이의 재분배에서 위험집단들 사이의 사회위험 분산으로 발전해온 그간의 경과는 물론이고, 그러한 발전의 의미와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생활보장체계는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서 조직화된다
사회적 기능 향상을 위해, 사회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사회위험의 분산을 위해 사회복지의 급여는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소비자주권주의의 실현과 운용효율성이 큰 현금 급여가 있는가 하면, 규모의 경제를 누릴 수 있고 목표효율성도 큰 현물 급여도 있다. 관계맺음을 중요한 특성으로 하는 돌봄이나 상담은 비물질적인 서비스 급여이며, '최소극대화 원칙'을 적용하여 취약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기회라는 급여도 있다. 급여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재원 또한 다양하다. 원천을 생각한다면 모든 재원이 결국은 사회구성원들의 지갑에서 나온 것이지만, 재정지출과 조세지출, 사회보험기여금(payroll tax), 기부금, 이용자 요금 등으로 재원의 구분이 가능하다. 급여를 대상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파이프라인도 있어야한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체, 시민사회와 지역의 영리/비영리 조직들이 그런 파이프라인인데. 대부분은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인간의 생활을 보장하는 집합적 방식들인 생활보장체계는 다양한 제공주체와 전달체계, 급여와 재원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결합된 것이며, 저마다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문제는 도처에서 발견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문제들이 기본소득제 하나로 정리될 수는 없다. 기본소득제가 이 모든 것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하다.
물론 기본소득제의 도입이 모든 사회복지제도의 폐지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의료보장제도나 사회서비스가 기본소득제와 동반할 수 있는 제도로 흔히 언급된다. 최근에는 기존 제도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재원의 발굴을 통해 기본소득제를 추가하자는 병행론도 제기되고 있다. 예산제약은 사회 변화와 인식 전환에 의해 돌파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생각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급한 재난지원금의 용처를 둘러싸고도 가구 구성원들 사이에서 다양한 일이 일어났음을 상기해보자.
재정지출의 몫을 정하고, 나누는 일은 전문가의 책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국회의 핵심기능으로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새롭게 발굴한 재원인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기본소득제의 시행을 위해서는 다른 제도의 예산 조정이 따를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그 최우선순위는 기존의 복지제도 관련 예산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현재의 방식도 변화할 수 있다
한국의 사회보장제도는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기본소득제와의 대비를 위해 급여를 현금으로 지급하는 소득보장성 사회보험제도를 보자. 우선 급여수준이 낮아서 생활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019년 12월 기준으로 노령연금수급자가 받는 평균 연금급여액은 52만 7천원을 약간 넘을 뿐이며, 고용보험의 구직급여 지급액 평균액은 지난 3월 기준으로 1인당 월 148만 원이다. 넓은 사각지대도 문제다. 여러 대책이 시행되어왔으나, 여전히 사각지대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디지털기술의 확산에 기초한 기술혁명은 사각지대를 더욱 확대시킬 가능성이 크다. 표준적 형태의 고용관계를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보험의 원리를 생각한다면, 이들을 포괄하기도 쉽지는 않다.
기본소득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고 있는 커다란 변화에 대해 사회보험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보장제도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회보장제도에 대해 기술혁명이 가져올 변화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지식과 정보에 기반을 둔 기술혁명이 가져오는 변화는 사회보험의 발전에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사회보험이 필요한 이유의 하나가 정보 불균형으로 인한 시장실패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위험에 대한 빅데이터 정보의 축적과 활용은 사회보험을 사보험으로 대체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반대로, 빅데이터 정보의 축적과 활용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정교하고 신속하게 사회위험을 분산하는 사회보험을 출현시킬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소득활동에 대한 빅데이터 정보의 축적과 활용 또한 사회보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지금까지 사회보험이 표준적 형태의 고용관계를 중심으로 설계된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이 이루어지는‘공동의 작업 공간’인 사업장이 보험료를 징수하는데 유일하거나 편리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사회보험료를 봉급 지급명부(payroll)에 기초한 세금(tax)이라고 부르는 배경이다. 특고 노동자나 플랫폼 노동자의 사회보험 적용과 관련하여, 근로자성을 둘러싼 복잡한 논란이 있는 근본적 배경에도 사업장을 통한 보험료 징수라는 오래된 관행이 있다. 이 오래된 관행이 기술혁명의 거대한 변환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디지털기술의 확산은 사업장을 통한 보험료 징수의 관행을 개인의 개별적 소득자료에 기초한 납세(tax)방식으로 바꾸게 할 수도 있다. 점차로 모든 사람의 다양한 소득원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사회보험은 고용지위와는 상관없이 개인 소득에 기초한 사회보험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 시대의 변화를 말하지만, 동시에 그 변화가 사회보장제도에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 아닐까?
국적(영주권)이라는 급여자격 조건은 배제적이다.
칼 폴라니(K. Polanyi)는 <거대한 변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기원>에서 토지와 화폐, 노동을 상품화하고 사회를 시장화하려는 운동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 사이의 작용과 반작용이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이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경험한 바는 무엇인가?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진보나 보수 등 어느 한 쪽에 의해서만 주도되지 않았다는 점, 성공과 실패가 공존한다는 점, 진보와 반동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파시즘 역시 '시장의 작용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는'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나치독일의 복지정책은 노동자를 비롯한 여러 사회계층에게 신분상승의 기회, 근대적 여가의 향유, 대량소비사회에의 참여, 광범한 복지혜택 등을 주도록 설계되었다. 사회보험 가입대상의 확대, 행정체계의 합리화가 이루어졌고, 세금에 기초하여 전 국민을 포괄하는 사회보장제도의 도입방안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나치독일의 사회복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발전과 진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정책은‘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라는 파시즘의 이념을 토대로‘민족의 동지(Volksgenosse)’와‘공동체의 이방인(Gesellschaftsfremde)’을 철저하게 가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장의 작용으로부터 사회를 지키려는' 운동 중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증진하는데 기여한 성공적이었던 것들도 있다. 사회보험의 제도화와 사회보장제도의 탄생, 복지국가의 개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운동들은 단절과 분리보다는 통합과 연대의 아이디어에 기초했다. 가문과 지역, 종교와 신분, 언어와 종족의 관념에 기초한 공동체(ethnie)를 국민이라는 관념에 기초한 공동체(nation)로 바꿔서, 이주민을 분리하고 격리하기보단 원주민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경계를 확장하는 조치를 발명하고 활용했다. 사회보장제도와 복지국가는 또한 급여의 자격 여부(deserving vs. undeserving)를 개인이 가진 속성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결함과 관련된 것으로 확장해왔다. 이제는 빈곤을 완전히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회위험 또한 마찬가지다. 원인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위험인 것이다. 욕구도 마찬가지다. 인간 기본욕구의 미충족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인식의 확산에 따라 사회적 기본욕구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와 복지국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확장에 기여한 이유는 이처럼 급여의 자격을 개인의 속성에 귀속되는 것으로부터 점차 탈피해왔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제는 어떠한가? 기본소득제의 철학적 기초는 모두를 위한 실질적 자유라 한다. 사회관계가 낳는 모든 특권적 자원에서 파생하는 추가소득의 재분배가 이를 실현할 수단이라고 한다. 사회보장제도와 복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자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속성은 적용대상의 보편성과 급여자격의 무조건성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적용대상과 급여자격의 최대치는 국적이나 영주권 같이 특정 정치공동체에서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 제한된다. 그러므로 모든 기본소득제의 정확한 이름은 '국민’기본소득제, '원주민' 기본소득제이다. 보편적이지도, 무조건적이지도 않다. 공유권리라고 치장하지만 사실은 국적과 영주권일 뿐인 이러한 조건은 급여의 자격조건을 다시 개인의 속성과 관련한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기본소득에 대한 자격조건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이어서, '동지'가 아니라 '이방인'이어서라면 발전이고, 진보인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이념의 퇴조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온 보호무역주의, 기술안보주의, 노동력 이동과 이민에 대한 규제, 자국기업에 대한 리쇼어링 등은 코로나 19의 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폐쇄적 민족주의를 강화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물론 기본소득제의 도입 주장이 이런 흐름과는 무관하다 하겠지만,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본소득제는 국가 간 장벽 쌓기를 부추길 수 있다. 이를 발전이고 진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만 공유부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제는 돈이 많이 든다. 2028년에 월 65만 원을 지급한다면 405조 원 정도의 돈이 필요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돈을 조달하는 방안으로 제시되는 것은 물론 세금이다. 주목할 것은 공유부(common wealth)에 대한 세목 신설과 관련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의 시행방안을 제시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시하는 세목이기 때문이다. 공유부란 토지와 환경, 데이터(정보)등 가치를 가지지만, 개인이 혼자만의 노력을 통해 획득한 부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을 지칭한다. 공유부는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소유물이므로, 이로부터 나오는 수익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지자본주의론자들에 따르면, 인지자본주의 가치 창출과 자본 축적의 핵심 자원은 사회구성원의 자유/무료 노동이다. 이 노동은 자발적이며 자유롭게 지식, 정보, 문화, 관심, 정동의 형식으로 가치를 창출하지만, 이러한 가치는 플랫폼을 제공한 자본에게 일종의 지대수익으로 전유될 뿐 아무런 화폐적 보상이 제공되지 않는다. 자유/무료 노동인 이유다. 아직 충분히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빅데이터를 활용해 수익을 올리는 플랫폼 기업을 겨냥한 데이터(정보)세에 대한 논의 또한 이러한 주장과 연관지울 수 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인지자본주의의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자유/무료노동에 대한 화폐적 보상방안이 제도화된다면 기본소득제에 필요한 재원조달의 어려움은 사실 상당부분 해소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기본소득제에 찬성할 수 없다. 기본소득제는 공유부를 창출한 사람들 중 일부만을 골라 수익을 배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토지는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므로, 거기서 나온 수익을 대한민국 국민만이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탄소나 데이터는 어떠한가? 대한민국 기업이 배출한 탄소 때문에 지구온난화가 심화된다면, 그 피해에 대한 보상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만 해야 하는가? 데이터는 더욱 그렇다. 플랫폼 기업이 전유하는 막대한 지대수익의 원천이 되는 자유/무료 노동을 대한민국 국민만이 제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이나 정보가 공유부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그 공유에 대한 권리를 특정 국민국가의 구성원으로만 제한하겠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 가난한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자유/무료노동을 잘사는 선진국 국민들의 기본소득제 재원으로 사용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공유부를 창출하는데 기여한 비국민의 몫을 국민이라는 일부의 사람들이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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