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중고책방에서 우연히 김종철 선생의 두 번째 비평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을 구해 읽었다. 그중 ‘시의 마음과 생명 공동체’(48-73쪽)라는 제목의 강연(1991년)에 드러난 삶과 죽음에 관한 그의 통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갔다온 사실로 해서 인류에게 어떤 기여가 있었다면 아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외계에서 인간이 지구를 볼 수 있었다는 점에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때 탑승했던 우주선 조종사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달에서 돌아오면서 지구를 보니까 너무 아름답고, 작고, 가냘프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특별히 시적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도 아닌 한 우주선 조종사로 하여금 그러한 표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지구라는 별을 하나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위에 자기의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영위하고 있는 터전으로서의 지구가 허공 중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그는 전지구적인 관점에 자연스럽게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우주로부터 지구를 바라보는 이 우주선 조종사의 마음을 “마치 어머니가 어린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심정”에 비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아폴로계획의 유일한 성과이며, 또한 이러한 마음은 옛날부터 현명한 사람들이나 시인, 예술가들, 예언자들, 신비가들, 그리고 아메리카인디언들이 늘 지녀왔던 관점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산업문명의 질주로 “인간은 생활수준의 향상이라는 어리석은 욕망을 추구하다가 이제 가장 비참한 재난에 봉착”했다. 그는 인간들이 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만물이 하나이고 형제라는 생각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 생각보다는 감수성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하며 “인간 공동체나 사회 공동체라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자각이 필요하고, 감수성의 대전환이랄까, 하여튼 이제는 생명체 전체를 하나로 보는 생명 공동체의 개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그는 “사람이 성숙하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러나 현대의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가급적 죽음에 대한 의식을 배제하려고” 하며 “회피하기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을, 마치 그것이 불상사이기나 한 듯이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을 외면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우리가 죽음에 임박한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서둘러서 병원에 옮기고 단 몇 시간, 며칠이라도 목숨을 연장하려고 기도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편리하게 변명되고 있지만, 실은 죽음을 정당하게 대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들이 대개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그 이유를 우리가 물질주의적 가치만을 가치로 인정하는 생활방식, 즉 산업문화를 전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죽음을 삶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파악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길러질 수 없”고, “죽음이란 그냥 불안스런 재난으로 인식될 뿐”이며, “우리가 소유한 것들, 사회적 성공, 명예, 이런 것들에 집착하면 할수록, 죽음은 단순히 두렵고 자꾸만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비겁한 마음이 폭력을 불러들이는 것처럼,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쇠퇴는 죽음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을 증가시키고, 그 결과 안팎의 자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상호 간에도 폭력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삶의 관행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나 진정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가 훨씬 더 성숙한 것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상이 죽음에 대한 김종철의 소신이고 사상이며 철학이었다. 코로나19로 그가 집요하게 경고했던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지속 불가능성이 현실로 드러난 이제, 돌연 그는 떠났다. 어찌 보면 지난 30여 년간 온축된 그의 지혜와 통찰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해진 지금 김종철은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며 “죽음은 삶의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과정의 필수적인 고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죽음을 자연의 섭리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몫을,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며 인간과 인간이 화해하고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온몸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이상기후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이제 스산한 가을바람에 낙엽이 지고 있다. 이런 날 산책길이든 어디서든 떨어진 낙엽이나 아직까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사귀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빛깔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몸뚱이에 아무 상처가 없는 잎사귀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의 결실기에 이르는 동안 향기와 그늘과 소리와 빛깔로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던 나뭇잎들이었건만, 하나하나의 잎사귀들에게 있어서 계절의 변화와 성숙은 비바람에 찢기고, 햇볕에 타고, 벌레들에게 먹히며, 스스로의 피로로 쇠잔해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는 것은 결국 상처투성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처를 통해서만 나뭇잎이든 사람이든 조만간 닥쳐올 죽음에 대한 육체적·정신적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은 물론 회피해야 할 재앙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이 이윽고 썩어서 거름이 되고 또다시 흙이 됨으로써 거기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듯이 죽음은 모든 것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씨앗이다. 죽음은 삶의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끝없이 순환하는 생명과정의 필수적인 고리이다. 또는 거꾸로 생각해서, 삶이 죽음의 일부라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20세기의 정신과학자로서 인간의 죽음과 죽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가장 골똘한 관찰과 사색의 기록을 보여준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의 아름다운 표현을 빌어 말하면, 우리가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애벌레의 상태에서 벗어나 훨훨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나비로 탈바꿈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큐블러―로스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낯선 경험을 앞두고 느끼는 두려움일 뿐이며, 실제로 그것은 근거없는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죽은 뒤에 사람이 반드시 나비로 변신하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 ― 미망(迷忘) ― 에 연유한다는 것은 인류의 스승들이 줄곧 말해온 핵심적인 가르침이었다. 권력과 재화와 명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의 궁극적인 근원은 따져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죽음을 용기있게 대면할 수 없는 결과로서 우리가 끊임없이 쌓아가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수록 더욱더 죽음은 밑도 끝도 없이 무조건 회피하고 싶은 공포의 재앙으로 다가올 뿐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의 의지로써 어떻게 달리 변경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인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한계 내에서도 사람이 어떠한 세계관과 문화 속에서 살고, 어떠한 삶의 방식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업주의 문화가 사람들의 생활 전체를 지배하기 이전의 동서양의 전통사회들이나 또는 좀더 나아가서 오늘날에도 산업문명의 주류 바깥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적지않은 토착민족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실제로, 아프리카의 피그미족이나 아마존의 인디언들의 문화에 대한 여러 인류학적 보고들 가운데는 이들 토착민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연한 태도에 놀라움과 존경을 표시하고 있는 증언이 적지않다. 인적이 없는 숲속에서 홀로 되었을 때에도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토착민들은 결코 겁먹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북미 인디언의 한 지도자는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유럽 백인들에 의해 자기 종족의 삶의 터전이 무자비하게 침탈당하고 그 결과로 종족 자체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바다의 파도처럼 왔다가 가는" 인간의 운명에 너그럽게 순종해야 할 필요에 대해 말한다. 이러한 점은 무엇보다도 자연과 세계를 자기자신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고 만물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세계관과 감수성에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생과 조화의 세계를 근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토착민들은 자신을 생명의 그물의 한가닥으로 인식할 뿐 배타적인 이익이나 권력을 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남루하고 뒤떨어져 보일지 모르지만, 토착민들의 문화는 이처럼 비상하게 비폭력적인 공생의 세계관에 뿌리를 박고 있기에 그들은 자연히 깊은 내면적 안정과 행복을 누리는 삶을 오랫동안 누려왔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마도 가장 결여된 것은 이와 같은 내면적 평화일 것이다. 산업사회를 뿌리로부터 지배하고 있는 성장의 논리 자체가 인간의 삶을 그 자신의 내면과 그의 이웃과 자연세계에 대하여 끝없는 폭력을 자행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의 궁극적인 한계를 쉽게 망각하고, 끊임없이 기술수단을 개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통제력을 갈수록 크게 하고, 우리 자신의 자아를 무한히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새로운 첨단기술을 통해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 할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욱더 공허하고 우리의 삶은 갈수록 황폐화하며, 생태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는 갈수록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업주의 문화와 그것을 떠받치는 과학기술이 근원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단적인 예는 이른바 유전자 기술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발전이다. 지금 각국 정부의 비호까지 받아가며 대대적으로 연구가 진행 중인 이러한 기술개발들의 주요 명분은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식량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인간게놈 프로젝트를 통하여 인간 유전자의 전체 지도를 읽어내는 일도 이제 거의 시간문제가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의 모든 질병치료는 물론이고 노화방지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 곧 다가온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전자 조작기술을 통해 종래의 육종, 교배방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종(種)간의 벽을 가로질러 동물도 아니고 식물도 아닌 새로운 생물이나 작물을 인공적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양이나 소와 같은 포유류 동물의 복제도 가능해졌고, 인간복제는 이제 기술문제가 아니라 단지 윤리적 저항에 부딪쳐 있을 뿐이다.
유전자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초래할 수 있는 생태학적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심각한 경고가 있어왔다. 예를 들어, 지구상의 생물진화의 오랜 역사에서 한번도 나타나본 적이 없는 새로운 생물이 유전자조작에 의해 돌연히 자연계에 투입되었을 때 그것이 생태적 균형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어떤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는 예측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전예방 원칙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조금이라도 사려있고 책임감있는 사람이라면 유전자조작은 마땅히 거부해야 할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심스러운 생각은 첨단기술이라면 덮어놓고 환호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분위기에서는 무시되거나 조소를 당할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현재 유전자조작을 비롯한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이 분야의 새로운 시장을 통한 엄청난 이익을 노리는 다국적기업의 이해관계 때문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사태의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떤 식으로든 기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널리 퍼져있는 오늘의 산업주의 문화와 그 문화에 깊이 세뇌된 대중들의 의식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인 것이다.
생태적인 또는 건강상의 위험성 여부를 떠나서도, 과연 유전자 조작기술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실은 엄격히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이미 여러 비판자들이 지적해온 것처럼 유전자 조작기술은 오히려 전통적인 농민들의 손으로 오랜세월 동안 보존되어온 생물 및 작물의 다양성을 파괴하고 토양의 질을 떨어뜨림으로써 전세계적인 범위에 걸쳐 인공적인 기근을 불러올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유전자 조작기술은 부분적인 합리성에 매달리다가 전체 국면을 돌이킬 수 없이 손상시키는 전형적인 현대기술의 무모함과 무책임성을 대변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무책임한 기술의 근저에 있는 정신적·심리적인 토대이다. 이것은 유전자 기술들이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또하나의 주요 혜택, 즉 인간의 모든 질병을 퇴치하고 노화를 방지한다는 생각에서 좀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요컨대, 이제 인간은 아프지도, 늙지도, 그리고 가능하다면 죽지도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하기는 건강과 장생 또는 영생에 대한 꿈은 인류사의 시초부터 있어온 자연스러운 심리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러한 단순한 꿈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끝없는 자기확대를 겨냥하는 권력욕망의 극치, 다시 말해서 자신이 운명적으로 죽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려고 하는 엄청난 교만성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극단적인 교만성의 뿌리에는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빈곤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음을 자신의 기술적 재간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것은 결국 정신적인 미숙함의 결과이며, 어리석은 망상일 뿐이다. 우리가 실지로 병들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장생불사에 대한 꿈이 아무리 큰 것이라 해도 그것이 단지 소박한 꿈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정신적 건강은 근본적인 손상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러한 꿈이 소박한 수준을 넘어서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광적인 열정으로 추구되는 상황에서는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될 때, 그러한 과학기술은 자연의 전체적 질서와 균형을 무시하는 폭력의 기술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은 자기중심적인 비뚤어진 욕망충족에만 매달리는 심히 야만적이고 천박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초음파 기술로써 태아의 성과 건강상태를 미리 감별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일이 거의 관습화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한 상황에서 생명의 신성함과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을 수 있을까?
오늘의 첨단기술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인간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불임부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난치 또는 불치병 환자를 위해서, 기형아 출산을 예방하기 위해서, 노화방지를 위해서 인공수정, 장기이식, 유전자치료, 초음파검사, 기적의 약품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들이 실지로 실현된다고 할 때 인간의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이겠는가.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의 신비를 느끼고, 생명의 근원적인 거룩함을 느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결핍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성숙과 교육에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예를 들어, 난치병으로 고통을 겪는 환자나 그를 돌보는 가족이나 이웃의 경험은 단순히 소모적인 경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고통과 보살핌의 체험을 통해서 사람은 사람살이의 궁극적 테두리와 한계를 성찰하고,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게로 다가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는 사회적·생태적 위기의 현실에 직면하여,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심리는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건강한 인간생존은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 가운데서만 가능하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또하나의 눈부신 기술이 아니라 인간생존의 근원적인 바탕을 늘 잊지 않게 해주는 인문적 지혜와 종교적 감수성이다.(1998년)
출처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개정판), 녹색평론사, 2010년 246~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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