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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인간이 '하늘'을 더럽히고 있다는 두려움 때문

김종철 선생은, 김수영 시인의 말을 빌리면 '제 정신을 갖고 산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한 사람이었다.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분투하던 그에게는 근대 산업사회의 앞날이 명확하게 보였다. 2002년에 쓴 '땅의 옹호'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산업주의 문화는 이러한 겸손의 자세를 조롱하고 비웃으면서 성장해왔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산업인간’은 도덕적, 정신적으로 극히 왜소한 미숙아가 되어버렸다. 산업의 세계에서 만물의 척도는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자기 확대의 욕망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분별없이 확대되어 왔고, 그 결과로 지금 우리는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하는 데 열중하고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난폭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코로나19라는 현재의 전 세계적 위기는 근대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에 대한 그의 통찰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웅변한다. 즉 "자본과 기술의 힘으로 얼마든지 자연의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교만심이" "스스로의 생존의 발판을 제거"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향했던 것은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삶이었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고, 인간과 인간이 우애롭게 지내며, 각 개인이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그런 삶이었다. 그는 공생공락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로 농(農)의 세계와 촌락 자치를 주장했지만 이는 결코 복고 취미가 아니었다. 공생공락을 위한 세계 각지의 여러 움직임들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연구하면서 이끌어낸 통찰이었다.

신문‧잡지의 칼럼을 모아 2016년 발간한 <발언 1,2>의 머리말에서 그는 "칼럼을 쓰는 동안 매일매일 발간되는 국내외 신문, 뉴스 매체들을 훑어보는 일이 어느덧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발언'을 위해서는 우선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주목('경청')하는 게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열어 경청한다는 것은 '발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윤리"이며 "농민, 노동자, 생활인들의 '현장'이 논밭과 공장 혹은 시장인 것처럼, 지식인에게 가장 중요한 '현장'은 뉴스매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거르는 일은 있어도, 신문이나 뉴스매체를 거르고 지나가는 날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왔다. 그리하여 일정하게 구독하는 몇몇 국내 신문들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인터넷을 통해서 외국 언론매체들의 주요 기사, 논평들을 읽는 데 골몰하다 보면 오전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실제로 그는 하루 4시간 이상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한국에서 최초 또는 유일한 정기구독자인 외국 간행물이 여럿 된다고 자랑(?) 삼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탁월한 생태사상가인 동시에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처럼 폭넓은 탐색과 치열한 고민 끝에 지역화폐, 기본소득, 시민의회에 이르기까지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현실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나아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에 참여하는 등 그는 근래 보기 드문 전 방위적 지식인이자 실천적 사상가였다.

사실 김종철 선생이 걸은 길은 외로운 길이었다. 하지만 뜻을 같이하는 벗들이 있었다. 1999년 펴낸 <간디의 물레> 머리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8년간 <녹색평론>을 엮어내는 일은 무엇보다 내게는 개인적인 구원이었다. 아마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미치거나 깊이 병들었을지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녹색평론>의 편집에 열중하는 과정에서 나와 비슷한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 안팎에 걸쳐 의의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사람들과 깊은 유대 또는 우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유대감이나 우정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의 형성에 새로운 삶의 희망이 달려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2008년 펴낸 <땅의 옹호>에서는 2004년 대학 교수직을 떠난 이후 4년간 계속된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을 통해 "대학생활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우정'이야말로 지금 세계를 황폐화하는 자본과 국가의 논리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아무리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희망'을 제공하는 원천이 바로 '우정'"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자본주의 문명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김종철의 사상과 통찰이 절실한 이때, 그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이제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가 말한 우정의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원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김종철 선생의 저서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발언 1,2>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중에서 9편의 글을 추려 소개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시대를 바꾸고자 한 예언자이자 실천적 사상가, 김종철' (박승옥 글)

2.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1995년,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3. 거짓언어와 '성장'논리 속에서-나의 한국 현대사(2012년, <발언 1>)

4. 땅의 옹호(2002년,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의 위하여>)

5.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開眼이다(2006년, <땅의 옹호>)

6. 지역통화-삶과 공동체를 살리는 기술(1998년, <간디의 물레>)

7.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책머리에(2019년)

8. 협동적 자치의 공동체를 향하여(2008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9. 촛불시위와 시민권력(2017년,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10. 태어남과 삶과 죽음의 순환(1998년, <간디의 물레>)

왜 <녹색평론>을 시작하였는가

<녹색평론>이라는 격월간 잡지를 내놓기 시작한 지 어느새 4년이 지났다. 세상물정도 모르고 평생 학교에서만 살아온 꽁생원이 시내에 사무실을 빌려 몇몇 젊은이들과 함께 난생 처음으로 잡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도 나는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내가 특별히 에콜로지 문제에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다른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잡지 창간 이후에, 문학전공자가 어떻게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적어도 환경 분야에 관한 한 무자격자임을 절감하면서, 굳이 <녹색평론>은 환경잡지가 아니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은 나로서는 또 다른 형태의 인문적인 노력이라고 답변했다. 물론 이것은 전혀 틀린 대답은 아니겠지만 오늘날 사회적으로 시급한 대책을 요구하는 ‘환경문제’에 대한 대응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녹색평론>의 처지를 궁색하게 인정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환경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한 능력과 식견이 없으면서도, 그리고 학교 연구실에서 계속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으면서도, 거의 강박적으로 내가 이 일에 붙들리게 된 것은 근원이 불확실한 충동 때문이었다.

지금 체코 대통령이자 극작가인 바츨라프 하벨은 어떤 글에서 시골에서 학교엘 다니던 소년시절에 겪은 중요한 경험을 회고한 바 있다. 늘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서 학교에 다녀야 했던 소년시절의 어느 날, 아마 전시에 급조된 것임에 분명한 큰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모습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형언키 어려운 깊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 두려움은 인간이 '하늘'을 더럽히는 불경(不敬)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인간성이 유지되고 있는 한 소년 하벨이 지니고 있었던 생태적 감수성은 사람 누구에게나 깊이 내재하는 보편적인 본능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산업문화의 압력 밑에서 이러한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자연의 엄연한 일부로서의 인간의 생존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결여한 채 다만 경제논리에 매달려버렸다는 사실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 겸 발행인. 프레시안

반드시 하벨의 소년시절의 경험과 같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가 <녹색평론>을 구상하게 된 데에는 그 비슷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91년 늦가을에 잡지의 창간호가 나왔는데, 그해에 유명한 낙동강 페놀방류사건이 있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문제에 사람들이 둔해져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이것은 굉장한 환경사고로 인식되었다. 그래서였는지 <녹색평론>에 호의를 보여준 몇몇 신문기자들도 이 잡지가 페놀사건에 충격을 받아 나온 국내 최초의 환경잡지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페놀사건이 물론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실은 그것보다 내게는 더욱 심각한 사건이 그해 초여름에 이 나라의 농촌 여러 곳에서 빈발하였다. 겨우내 자라서 수확을 앞둔 보리를 거두지 않고 농민들 자신이 밭째로 불태워버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을 끊임없이 망가뜨리면서 이룩해온 경제개발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가난’이라면 곧 보릿고개를 뜻하였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다 자란 보리밭을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행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건전한 인간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런 미친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절망을 느꼈을 것이다. 그 절망은 아마 우리의 삶이 철저한 불경(不敬)에 기초해 있음을 똑똑히 목도한 데서 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리를 태운 농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산업문화 전체의 본질적 문제이다. 인간성의 소멸을 대가로 하는 경제성장이니 ‘진보’니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해 초여름 이후 나는 내내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

민주회복이 무엇보다 핵심적인 과제였던 시대가 우여곡절 끝에 서서히 물러나면서 지금까지의 정치적 투쟁보다도 훨씬 더 근원적인 투쟁 ― 생명과 인간성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의 필요성이 절박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싸움인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의 삶터가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든 에너지와 열정을 야만적인 소득의 경쟁에 쏟아 붓도록 강요하는 산업체제의 논리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존심 있는 인간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나는 <녹색평론>이 산업경제의 논리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구태의연한 성장경제와 경쟁의 이데올로기에 거의 완전히 지배되어 있는 이 나라의 주류언론, 교육, 문화체제 속에서 갈수록 절망과 소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녹색평론>이 작은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잡지를 시작하였고, 아직 여기에 붙들려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5년)

출처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개정판), 녹색평론사, 2010년 309~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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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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