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가히 백가쟁명이다. 논의의 핵심에는 복지 확대가 있다. 정치적 논쟁으로까지 떠오른 '기본소득 대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의 핵심도 결국 일자리가 온전하지 못할 상황에서 체제 안정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는 데 있다. 국가가 재정을 대규모로 지출해 국민 삶의 안정성을 떠받치지 않는 한, 변화하는 미래에 대응할 수 없다는 논리는 양 주장 모두 동의한다.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복지 확대로 인해 재정이 부실해지는 건 안 된다는 이들도 많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 같은 우려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장 교수는 복지 확대가 오히려 재정 건전성을 지켜준다며, 코로나19 이후 한국이 보편적 복지국가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주장은 29일 <시사인>이 주최한 웨비나 '팬데믹 그 후, 새로운 경제와 사회계약'에서 나왔다. 장 교수가 발제한 이날 웨비나에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토론자로 참석했다.
복지 지출 확대 여력 충분…재정 건전해
장 교수는 코로나19로 한국이 취해야 할 대응방안의 핵심이 보편적 복지국가로의 탈바꿈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전 국민이 공평하게 보호받는 게 중요"함을 모두가 깨달은 지금이 한국의 취약한 복지 시스템을 강화할 적기라고 장 교수는 말했다.
실제 한국의 복지 지출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2018년 현재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은 11.1%로 OECD 평균 20.1%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OECD에 의하면 한국과 칠레, 멕시코가 OECD에서 복지지출 비중 최하위권 국가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대표격인 미국의 복지지출 수준도 OECD 평균 수준이다.
장 교수는 '전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사회 전체가 안전하다'는 코로나19의 교훈을 돌아볼 때 "취약한 복지 제도로 인해 병가, 실업보험, 소득보전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큰 타격"을 입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우리가 돌아봐야 할 지점이라고 되새겼다. 어쩔 수 없이 일자리로 나와야 하는 이들이 부천 쿠팡물류센터 집단 감염 사태에서 보듯 감염에 더 취약함이 입증됐다. 생계형 자영업자와 실업자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게 현실이다.
장 교수는 복지 강화를 위해 재정 지출 규모를 적극 늘려야 하며, 이는 경제 파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힘줘 말했다. GDP 대비 국채비율이 40% 수준으로 세계 최상위권 수준(최근 코로나19 대응 지출 확대로 재정건전성 지수가 하락)이므로 지출 여력은 충분하다고 장 교수는 말했다.
나아가 장 교수는 복지 확대가 곧 재정 부실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오히려 선진국 중 국민소득 대비 국채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와 같은 복지 선진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 수준"이라며 "정작 (복지에 적대적인) 미국의 부채비율은 100%를 넘는다"고 지적했다. 북구 복지국가 대부분의 국채비율은 30~40% 수준을 유지한다.
장 교수는 "복지정책을 잘 펴는 나라가 재정도 좋다"며 "재정에서 복지를 확대할 때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복지를 늘리면 재정을 망가뜨리는 퍼주기'라는 시각은 정말 잘못됐다"고 부연했다.
장 교수는 복지 강화가 앞으로 더 불확실해질 세계 경제 변화 대응 능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고 역설했다. 국민의 기본생활부터 안정돼야 국가 정책이 힘을 발휘할 공간이 생긴다는 이유다.
"국민 기본 생활이 안정돼야 실업을 받아들이고, 구조조정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게 안 되면 국민이 저항한다. 복지국가가 개방 경제로 나아가면서 기업 구조조정과 산업 구조조정을 신속히 한 사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복지국가 틀을 만들던)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당시 구호 중 하나가 '안정적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도전적(Secure people dare)'이라는 것이었다. 복지와 경제성장이 확실히 연결되는 '생산적 복지국가' 개념이다. 우리의 복지 확대도 이 같은 사고로 이뤄져야 한다."
돌봄 경제 가치 재확인 필요…서구 사대 벗어나야
장 교수는 복지 강화와 아울러 기존 남성 가부장 중심의 노동 체제가 한계를 맞이한 지금, 돌봄 경제를 한국 경제의 새로운 기본조건으로 확립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장 교수는 이를 "복지 국가 확대보다 더 큰 차원의 변화'로 지칭했다.
"가사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재생산 경제, 돌봄 경제는 우리 경제 생존의 기본조건이지만, 그간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 주부 등 해당 경제 종사자 대부분이 무임이나 저임으로 일한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재생산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 모두 깨닫고 있다. 이 노동에 물질적,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어떻게 하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장 교수는 전반적으로 코로나19를 맞이해 한국이 지난 60여 년간 이어온 경제지상주의를 재고하고, 건강과 안전, 행복에 우선순위를 두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모든 제도 개혁 논의의 출발점은 이 같은 사고방식이어야 한다고 장 교수는 강조했다.
한편 장 교수는 이제 코로나19로 인해 드러난 각국의 민낯을 바라보며 한국이 오랜 기간 가진 서구 열강을 향한 사대주의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교수는 "이제 많은 나라가 한국을 다시 보고 배울 점을 찾기 시작했다"며 "이제 한국은 (과거처럼) 미국과 중국이 추구하는 패권주의가 아니라, 세계 경제 질서를 더 공평히 개혁하는 선도적 국가로 거듭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전 국민 고용보험 vs 기본소득 vs 지역 균형 발전
장 교수의 발제가 끝난 후 토론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 자치단체장은 각자의 정책 브랜드를 전하는 데 집중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전 국민 고용보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이재명 경기지사는 기본소득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수 경남지사는 국가 균형 개발을 펴는 한편, 부산-울산-마산을 새로운 메가시티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재난은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에게 집중된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상용직 100명 중 4명이 직장을 잃을 때 비상용직은 100명 중 25명이 실업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한쪽에 지붕 밑에서 우산을 든 사람이 있는 반면, 맨몸으로 빗줄기를 맞는 사람도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은 비 맞는 이들에게 씌워주는 우산이다. 이제 함께 사는 세상으로 대전환을 이뤄야 한다. 토목 공사가 아닌, 전 국민 고용보험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 재편이 진짜 뉴딜이다." (박원순)
"이제 일자리에 대한 우리 고정관념을 바꿔야 할 때다. 더 커진 생산 역량 결과를 소수 디지털 기업이 아닌, 모든 이가 같이 누려야 부족한 수요역량을 채울 수 있다. 기존에는 학계에서나 거론하던 기본소득이 유용한 경제정책 수단으로 거론된 배경이다. 이미 정부 재난지원금이 나온 이후 현장에서 그 효과를 체감했다. 지금껏 정부가 지출한 온갖 명목의 지출 중 이번 지역화폐처럼 큰 효과를 보인 정책은 없었다. 작게 시작해 증세해가면 기본소득 도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선별적 복지를 확충하자고 하면 증세 여론이 어렵지만, 모두가 혜택을 보면 증세 동의를 받기 쉽다." (이재명)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지역 간 불균형이다. 인구뿐 아니라 자본도 수도권에 집중된다. 이러니 부동산 문제도, 저출산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서울로 간 청년이 서울에서 잘 살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오히려 삶의 질이 더 떨어진다. 서울의 출산율이 (올해 전국 예상치인 0.94보다 한참 낮은) 0.69에 불과하다. 권역별 발전을 제안한다. 광역 교통망을 확충해 부울경이 동남권 메가시티로 거듭나야 한다. 교육과 인재 양성도 지역 내에서 가능해져야 한다. 팬데믹 사회를 경제 구조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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