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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6강은 우리나라의 중앙 내륙에 위치하며 금북정맥과 금강 사이에 남과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연기·전의·금남고을로 역사기행을 떠납니다. 이 세 지역은 세종특별자치시로 통합되었는데 동쪽은 충북 청주, 서쪽은 충남 공주, 남쪽은 대전, 북쪽은 충남 천안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히 옛 백제 땅인 세종시와 공주 지역에는 비석 모양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佛碑像)’ 7점이 전해지는데 비암사의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연화사의 칠존불비상,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서광암의 삼존천불비상과 공주 정안 평정리의 삼존불비상이 그것이며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76강은 2020년 6월 28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6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목천IC-전의면(전의향교/비암사)-연서면(연화사)-조치원읍(봉산동향나무/봉산영당)-연기면(연기향교)-장군면(덕천군사우/김종서장군묘역)-나성동독락정역사공원(독락정/임씨가묘)-세종리은행나무역사공원(숭모각/세종리은행나무)-연동면(합호서원)-금남면(문절사/모인당)-부강면(보만정및검담서원묘정비/남성골산성)-남청주IC-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6강 답사지인 세종시 <연기·전의·금남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금강을 젖줄로 삶의 터전 일구어
산줄기는 북쪽으로 금북정맥이 지나가며 그 지맥이 운주산(460m), 국사봉(403m) 등의 작은 봉우리를 일구는데 이를 제외하고는 오랜 삭박작용을 받은 낮은 구릉지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물줄기는 금남면에서 발원한 삼성천이 북쪽으로 흘러 금강에 합류하고 전의면에서 발원한 조천이 남동쪽으로 흘러 진천군과 음성군에서 발원한 미호천과 합쳐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금강에 유입됩니다. 금강은 세종시의 남부를 서쪽으로 흐르다가 공주시로 흘러갑니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곡창지대를 이루는데 특히, 미호천유역의 평야는 충북의 청원, 진천, 음성에 이르기까지 연결되어 매우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세종특별자치시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토에 속하여, 전의지역은 대목악군의 구지현, 연기지역은 일모산군내 두잉지현, 금남지역은 웅진의 강역이었습니다. 통일신라 때 전의지방이 대록군의 속현으로 금지라 하였고 연기현은 연산군에 속하여 이때부터 연기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는 전의현으로 개칭하여 1018년(현종 9) 연기현과 함께 청주에 예속되었고 1172년(명종 2) 감무를 따로 두었으나 뒤에 다시 목주감무로 겸임케 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395년(태조 4) 전의에, 1406년(태종 6) 연기에 따로 감무를 두었으며 1414년(태종 14)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으로 하였다가 1416(태종 16) 다시 환원하였습니다. 1680(숙종 6) 읍인만설의 모역벌주로 인하여 문의에 속하였다가 1685(숙종 11) 복구하여 연기현이라 하였습니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를 개정할 때 각각 군이라 칭하고 군수를 두었습니다.
1909년 군과 면의 통폐합에 따라 동, 서, 남, 북, 금남, 전의, 전동의 7개 면을 두었고 1911년 군청을 구읍지인 연기리로부터 조치원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읍 6면 106동리로 구성되었고 1988년 조치원읍의 19개 동을 리로 명칭 변경하여 191개 행정리로 조정하였으며 2010년 특별법이 공포되어 2012년 충남 연기군이 폐지되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였습니다.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 항전지로 비정
산성은 전동면 청송리의 운주산성, 송성리의 이성과 금이성, 남면 연기리의 당산성과 원수산성, 소정면 고등리의 고려산성, 부강 남성골산성 등이 남아 있습니다.
운주산성은 운주산(460m) 정상부에 3개의 산봉우리를 돌려서 석축으로 백제 때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성은 543m, 외성은 3,098m이며 성내부에는 문지는 동문지, 남문지, 북문지 각 1개소와 서문지 3개소 등 모두 6개소, 건물지는 4개소, 우물지는 2개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유물은 내성에서는 평기와편 만이 수습되었고 외곽성에서는 많은 양의 평기와가 수습되었는데 ‘군(郡)’자가 새겨진 명문와도 있습니다.
운주산에는 3개 봉우리마다 성터가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의에는 3개의 산이 있는데, 동쪽에 고산은 현의 8리쯤에 있고, 남쪽에 운주산이 현의 7리쯤에, 북쪽 5리쯤에 있는 증산이 있어 솥의 세 다리처럼 세 봉우리를 이루는 전의현의 진산이다”라고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충청도읍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전성부사가 한때 이곳에 읍치를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하고 일어났던 백제 부흥운동군의 최후의 항전지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주류성이라 비정하기도 하는데,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운주산성 외에도 서천군 한산면의 건지산성, 정읍시의 두승산성, 전북 부안군 상서면의 위금암산성 등지가 주류성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성은 이산(240m)의 8부 능선을 따라 삼국시대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 성곽으로 고려 태조 때 개국공신으로 태사삼중대광에 오른 이도(李棹)가 공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사성을 받아 전의이씨의 시조가 되어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성이라 부릅니다. 잔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성의 남쪽 성벽과 서남쪽 성벽은 석축이 허물어져 석재가 성벽 아래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문지는 서남쪽 성벽에 1개소가 있으나 무너진 석재로 인하여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이며 삼국시대 토기 편을 성안에서 쉽게 수습할 수 있습니다.
금이성은 금성산(424m)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금현성이라 함은 이 산성을 이르는 것입니다. 산성 아래에는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큰 길이 통과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축조 양식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에 일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으며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구축되어 세간에서는 ‘철옹성’이라 불렸습니다. 성의 길이는 714m, 동벽, 서벽, 북벽은 붕괴 상태가 심하고 남벽은 남아 있는 상태가 좋으며 서문, 북문, 동문에서 문지가 확인되었습니다. 성안에서 발견된 유물은 항아리, 사발, 대접 등의 경질, 연질 등의 토기편과 기와편은 흑회색의 어골문이 주종을 이룹니다.
당산성은 남면 연기리 백여 미터의 야산에 있으나 평지돌출로 의외로 사방의 경사가 심합니다. 성벽 높이 3m 내외, 둘레 540m로 추정됩니다. 성내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그릇과 기와 조각이 발견됐는데 통일신라의 토기와 고려시대의 어골문 기와 조각들이 대부분입니다. 성내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두, 세 곳과 두 곳의 우물터가 있는데 동벽 근처의 것은 현재도 민가의 식수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에게 동서진출로서의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비록 낮은 지대에 있지만 성의 규모나 위치, 방향 등으로 미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는 물론 남진하는 고구려와의 각축장으로서도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산성의 바로 아래에 옛 연기현지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당산성은 군사적인 면만 아니라 현의 치소성 구실을 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수산성은 삼국시대 때 산성으로 둘레가 약 1,200m로 산성의 규모로는 매우 큰 편입니다. 1287년(충렬왕 13) 원나라에서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다가 평정된 적이 있는데, 1290년 1월 내안의 군대에 속했던 합단이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5월 합단의 군대는 원나라의 나만대에게 쫓겨 고려로 침입하였습니다. 합단군은 개전 초반 승승장구하며 1291년 원주까지 내려왔지만 치악성 전투와 충주산성 전투에서 패하자, 남하하여 연기현으로 들어갔습니다.
1291년 5월 설도간이 이끄는 원의 군대와 고려의 삼군이 합세하여 연기현에 주둔하고 있는 합단군을 공격하였다. 1차 전투는 연기현 북쪽 정좌산 아래에서 벌어졌고, 크게 패하여 웅진 방면으로 도망간 합단군이 남은 군대를 정비하고 북상하자 연기 원수산 부근에서 2차 전투가 벌어지는데 그때 원나라와 고려군이 주둔하면서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원수산성입니다.
남성골산성은 내, 외곽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고구려의 성책유적입니다. 내곽은 산 정상부와 남서쪽과 북동쪽을 감싼 형태로 서쪽과 동쪽에 성문터가 있으며, 둘레는 360m 내외이며 내곽은 가장자리를 따라 시설된 이중의 목책과 치 1개소, 동문지의 석축벽체, 목책 안쪽의 수혈구덩이, 수혈 주거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외곽도 가장자리를 따라 이중의 목책이 설치되어 있으며, 목책 안쪽으로 구들집자리와 목곽고, 수혈유구, 원형의 수혈구덩이 등 주거와 생산, 저장시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의 성곽유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성책유적으로 장수왕 대 고구려가 금강유역까지 진출했다는 직접적인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남성골산성은 목책으로 구축된 성책으로 유적이나 기술적으로 성곽이 호(성 둘레 구덩이)와 목책단계에서 토성과 석성으로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축조기술이 확인되었습니다. 남성골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부강은 금강을 이용한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의 요충지입니다.
고려산성은 고려산 정상부에 고려 때 축조한 퇴뫼식 산성으로 성벽 둘레가 250m로 그리 크지 않은 석성이었으나 토사가 무너져 내려 토성처럼 보입니다. 고등리 마을에는 ‘아야목’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고려 홍건적의 난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주민들이 먹을 물이 없어 “아야 목아” 하며 울면서 내려 왔다는 전설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성안에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이 있었으며 연기팔경의 하나입니다.
연기와 전의의 향교
연기와 전의에 있었던 읍치구역에는 향교만이 남아 있습니다.
전의향교는 1416년(태종 16)에 창건되었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다가 1684년(숙종 10)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전사청, 내삼문, 외삼문, 제기고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동국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소장 전적은 판본 4종 8책, 사본 3종 3책 등 총 7종 11책이 있으며, 이 중 <선안>, <재임록>, <훈사> 등은 이 고장의 향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연기향교는 1416년(태종 16) 무렵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원래 연기군 서쪽 끝에 있었는데 1647년(인조 25)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전해집니다. 향교의 입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그 뒤에 외삼문이 있으며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재, 서재, 반화루, 동협문 등의 부속건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1819년(순조 19) 대성전을 다시 고쳐지었고 1865년(고종 2) 명륜당, 1887년에는 전사청을 중수했습니다. 향교 안에는 척화비와 애민선정비 등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중국의 5성, 4현과 동국 18현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안향, 임난수, 송준길의 서원
세종시에는 고려시대의 안향과 임난수, 조선시대의 송준길을 배향하는 서원이 있습니다.
합호서원은 1683년(숙종 9) 안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영당을 건립,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해 오다가 순조 때 유림 임동승 등이 협력하여 서원을 창건하고 신덕재와 박금서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후손들이 사우를 건립하고 현판을 ‘합호사(合湖祠)‘라 하였고 1949년에 합호서원으로 복원하여 서원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경내에는 사우, 내삼문, 성의재, 외삼문 등이 남아 있으며 사우에는 안향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유물로는 영정과 안향의 친필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안향은 순흥 출신으로, 호는 회헌, 시호는 문성공입니다. 1260년(원종 원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고, 1270년 삼별초의 항쟁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한 뒤 감찰어사가 되었습니다. 1286년(충렬왕 12) 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서 연경에서 처음으로 <주자전서>를 보고 필사하여 고려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이후 성리학 연구에 몰두, 고려 말기의 유학 진흥에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보만정 및 검담서원 묘정비는 동춘당 송준길의 유적입니다. 보만정은 원래 1669년(현종 10) 송준길이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이곳 검담에 세운 정자입니다. 1694년(숙종 20)에 송준길을 기리기 위해 검담서원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보만정은 검담서원의 강학공간으로 이용되었습니다. 1871년(고종 8) 서원이 훼철될 때 함께 없어졌다가 1920년대 초 다시 세워졌습니다. 보만정 앞뜰에 서 있는 검담서원 묘정비는 받침부분과 몸돌,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766년(영조 42)에 세워진 것으로 김원행이 글을 짓고, 후손인 송명흠이 썼습니다. 묘정비는 검담서원의 내력과 송준길의 일생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독락정은 1437년(세종 19)에 양양도호부사를 지낸 임목이 부친인 임난수 장군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입니다. 고려 말 충신 임난수 장군은 1373년(공민왕 23)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충신불사이군의 정신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전라도 부안으로 낙향도중 공주 삼기촌(구 연기군 남면 양화리) 전월산 아래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해 집성촌을 이루고 부안 임씨의 중시조가 되었습니다. 1419년 세종은 임장군의 사당에 신숙주의 아버지인 신장에게 명하여 임씨 가묘라 선액, 불천지위로 모시도록 명하고 사패지로 나성일구강산을 하사했고 사제문도 내려주었는데, 여기에 “시기를 도울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만한 공훈을 세웠다”고 적고 있습니다.
1679년(숙종 5) 8대손 호군 임찬현이 묘소를 보수하던 중에 376자의 지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근거로 우암 송시열에게 신도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습니다. 송시열은 전서공의 행적에 대하여 “전서공이 몸을 지킴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같다”라고 평하였습니다. 1710년(숙종 36)에 부조묘를 확대 발전시켜 기호서사를 건립하였습니다. 원래는 ‘세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서하 임춘, 전서공 임난수, 부사공 임목을 병향한 사우로 출발하였다가 1805년(순조 5)에 위의공 임흥을 추배하였습니다.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기호서사를 지키기 위하여 숭모각에 있던 신주 일부를 나성동의 독락정 경내 기호서사의 옛터에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때 심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수령 652년으로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울었는데, 1910년 한일합병과 한국전쟁 때 울었다고 합니다.
봉산동 향나무는 지상 50cm 정도 되는 곳에서 갈라져 원줄기와 작은 줄기가 서로 꼬여 감기며 자라다가 2m 정도의 높이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서 둥근 모양의 수관을 이루고 있으며 여러 개의 지주를 세워서 옆으로 뻗은 가지를 받쳐 주고 있습니다. 이 나무의 수령은 460여 년이며 강화최씨의 최완이 중종 때 낙향하여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자, 그의 아들 중룡이 여묘(廬墓)하러 서울에서 내려와 이 향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향나무는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비롯해 울릉도와 일본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립니다.
여말선초 인물들의 사당과 묘역
세종시에는 여말선초 인물들의 사당과 묘역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봉산영당은 여말선초의 문신인 제정공 최용소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최용소는 1394년(태조 3) 회례사로 일본에 가서 구주절도사 이마가와(今川了俊)에게 왜구를 토벌하여 양국의 우의를 도모하자는 국서를 전하고 이듬해 잡혀가 있던 조선인 57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1413년(태종 13)에는 형조판서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 왔으며, 벼슬이 판한성부사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명나라 성조는 화공에게 화상을 그리게 하여 어필로 화면에 ‘齊貞公崔龍蘇之像’(제정공최용소지상)이라 써서 자손에게 전달하였다 합니다. 그는 성품이 청백하면서도 절개가 굳고 언행이 정중하였으며, 일찍이 명나라의 건축을 감독하고 명성을 얻었습니다.
덕천군사우는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을 모신 사당입니다. 덕천군은 가난한 백성을 정성껏 도왔고 왕자의 신분에도 들에 나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또한 여름에 홍수로 수백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구제하였으며,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원래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었으나 1739년(영조 15)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남한산성 서문밖에 있던 것을 1974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신도비는 10손인 이광사가 쓴 것으로 1808년(순조 8)에 세웠습니다.
문절사는 매죽헌 성삼문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입니다.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이며 홍성 출신으로 1438년(세종 20)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 와서 1446년 10월 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박팽년, 허조 등과 단종복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세조에게 모진 고문을 받다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모인당은 화순최씨의 종중 재실로, 최한정과 그의 아들 최중온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화순최씨는 고려 때 경주최씨에서 분관한 성씨이며, 위패를 모시고 있는 최한정은 1456년(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병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성종이 그를 신뢰하여 대사관에 임명했는데 그 뒤 이조참의, 예조참의를 지냈습니다. 건물은 1669년(현종 11)에 세웠고 1928년에 고쳐지었습니다. 건물 중앙에 대청마루를 깔고 접어지는 문을 달아 제사 지낼 때 들어 올려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좌우 대칭으로 온돌방을 1칸씩을 두었습니다.
남산영당은 남이웅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06년(광무 10)에 세웠습니다. 남이웅은 1613년(광해군 5)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병조좌랑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가 중국 심양으로 잡혀갈 때 모시고 따라 갔다 온 후에 춘성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1638년(인조 16) 대사헌이 된 후 법을 철저하게 집행하였으며, 미신을 없애려고 무당을 박해하기도 하였습니다. 1646년 우의정이 되었고 소현세자 빈 강씨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하였다가 복귀하였으며 1648년 좌의정이 되었습니다. 사당 뒤쪽에 묘소와 1658년(효종 9)에 건립한 묘비가 있습니다.
김종서 장군 묘역에는 입구 주변에 관리사, 신도비, 홍살문 등이 있고, 묘소로 가는 길에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명정 현판을 모신 정려각이 있습니다. 묘소에는 상석, 문인식, 동자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과 묘비 3기가 있습니다. 무덤 앞에 있는 오래된 묘비는 1748년(영조 24)에 세운 것입니다. 김종서는 단종 대의 충신으로 공주시 의당면 월곡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한 뒤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어 1434년(세종 1) 육진을 개척하였고 문종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제수되어 어린 단종을 보필하였습니다. 계유정난 때에 수양대군에게 두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1746년(영조 22)에 신원되어 복직되었습니다.
1747년(영조 23) 영의정 김재로가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 김승벽을 함께 복관시킬 것을 제안하여 김승규의 정려가 관철되었습니다. 1786년(정조 10) 백악산 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옥함에서 김종서의 위패가 발견되어 그의 위패를 불천위할 것을 명하였고, 1791년(정조 15) 장릉 배식단에 배향되었으며 1804년(순조 4) 김종서를 정려하였습니다. 그는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하여 학자적인 면모도 보여주었습니다.
비석 모양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 7점
옛 백제 땅인 세종시와 공주지역에는 비석 모양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 7점이 전해지는데 이들 대부분이 연기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연기비상파(燕岐碑像派)’ 양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비암사의 계유명삼존천불비상, 기축명아미타불비상,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연화사의 칠존불비상,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와 서광암의 삼존천불비상과 공주 정안 평정리의 삼존불비상이 그것입니다. 비암사 아미타삼존석상과 서광암 삼존천불비상은 국보로, 다른 5점의 불비상은 모두 보물로 지정됐습니다. 비암사 불비상 3점은 국립청주박물관에, 서광암 삼존천불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에 공주 정안의 삼존불비상은 동국대박물관으로 갔으며 연화사의 두 불비상은 그대로 연화사에 있습니다.
비암사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은 이중의 주형광배와 아미타불삼존상과 권속들을 조각하였습니다. 아미타불은 설법인을 취하고 협시보살은 인왕보살상이 9개의 연잎의 위에 서 있으며 그 아래로 걷고 있는 형태의 사자 두 마리가 있습니다. 양 측면에는 상하 2단에 각각 2구씩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좌상이 있고, 하단에는 용의 머리와 바탕에 명문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뒷면은 4단으로 구획되어 각 단마다 연화좌에 결가부좌한 불상이 5구씩 병렬로 조각되었는데, 각 불상 사이사이에 이 비상을 발원한 인명과 관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문에 의하면, 이 비상은 계유년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계유년은 통일신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 비상이 조성된 곳이 옛 백제지역이며, 발원자인 전씨의 관등 중에 달솔(達率)과 같은 백제의 관등명이 보이고 있어,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유민들에 의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암사 기축명아미타불비상(보물 제367호)의 본존불은 큰 원형의 머리광배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하고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습니다. 좌우의 보살상은 보관과 장엄구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뒤에는 상체만을 내밀고 있는 나한상을 표현하였습니다. 보살상 옆에는 본존을 향해 천궁을 받들고 있는 신상을, 그 옆에는 앞을 바라보는 인왕상을 배치하였습니다. 불보살상의 윗면에는 연꽃 위에 결가부좌한 5구의 화불을 새기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화불보다 큰 좌상 7구를 배치하였습니다. 보계 좌우에는 연꽃 위에 합장한 인물상을 대칭으로 배열하여 <아미타경>에 보이는 연화화생의 장면을 표현하였습니다. 뒷면 명문에 기록된 기축년은 689년(신문왕 9)으로 추정됩니다.
비암사 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보물 제368호)은 대좌와 모든 부분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습니다. 미륵보살이 방형의 대좌에 반가좌를 결하고 오른손은 들어서 턱에 대어 사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앞면 밑부분은 중앙에는 둥근 향로를 놓고 좌우에 꿇어앉은 인물상을 1구씩 배치하였는데 지물과 머리 모양으로 미루어 오른쪽은 공양자상으로, 왼쪽은 승려로 보입니다. 두 보살상은 모두 앞면을 향한 측면관의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앞의 반가상을 주존으로 한 삼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뒷면은 매우 간단하게 보탑 하나를 가득히 새겨놓았습니다. 사유형의 반가보살좌상은 흔히 미륵보살로 해석되며, 보탑은 미륵보살의 상징입니다. 이 비상은 673년경을 전후하여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보물 649호)는 4면의 돌에 각각 불상을 조각하고, 다른 돌로 대좌를 만들었으며 앞면은 본존불인 아미타불, 좌우 양쪽으로 나한상과 보살상이 2구씩 놓여진 5존불 구도입니다. 본존의 머리 부분에는 둥글게 연꽃이 새겨진 머리광배가 있고, 좌우로 구슬장식과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뒷면은 본존불인 반가사유상 좌우에 보살상이 꿇어앉은 삼존불 구도입니다. 불상을 조각한 연도 등을 적은 글을 새겨 놓았는데 글에 나타나 있는 무인년은 백제가 이미 멸망한 이후인 678년(신라 문무왕)이므로 그때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입니다. 이 비상에 새겨진 도상이 아미타오존상과 미륵삼존상이라면 정면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정토도이고 뒷면은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상을 의미한다는 근거로서 매우 중요한 불교미술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연화사 칠존불비상(보물 605호)은 반타원형의 곱돌로 만들었으며 연꽃무늬가 새겨진 마름모꼴의 돌 표면에 본존여래상을 중심으로 7존불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본존여래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과대하게 표현된 두부와 시무외·여원인을 맺고 있는 과장된 손 그리고 불신 표현 등에서 삼국시대 조각 전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본존불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서 있으며, 본존과 협시보살 사이에는 상체만 내밀고 있는 나한상이, 밖으로는 인왕상이 사자 위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각각 원형의 머리광배가 배 모양의 광배[舟形擧身光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광배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습니다. 삼국시대 조각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부분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 이 석상은, 통일신라 조각양식 태동기인 7세기 후반에 나타난 전환기양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서광암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는 서광암에서 발견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부근의 옛 절터에서 서광암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본존은 통견의 법의를 입고 방형 대좌에 결가부좌하였습니다. 머리 부분은 파손되었고 가슴에는 ‘卍’자를 새겼습니다. 연화가 조각된 둥근 두광을 지닌 좌우 협시보살은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인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를 입고 있습니다. 앞면·뒷면·옆면 및 옥개석까지 여러 단으로 면을 구획하여, 작은 불상을 빽빽이 배치하고 있는데 모두 두광을 지니고 통견의 법의에 선정인을 하였습니다.
삼존상의 좌우에 각각 4행씩 세로로 선을 그어 해서로 명문이 적혀 있는데 계유년에 ‘대사 진모씨(大舍眞牟氏)’ 등 향도 250명이 국왕, 대신 및 칠세부모 등을 위하여 아미타불과 여러 불보살상을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연기지방이 신라통일 후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고, 삼국시대의 불상양식 양식을 따르는 점으로 보아, ‘계유년’은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과 마찬가지로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문무왕 13)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는 1657년(효종 7)에 제작된 야외 의식용 괘불도로, 인도 영취산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회를 도해한 것입니다. 화면 전체가 삼각형 구도를 이루는데, 항마촉지인을 취한 석가모니불을 본존 그 앞에 문수, 보현보살과 사천왕이 시립했으며 광배 주변으로는 십대제자와 나한, 벽지불과 타방불, 팔부중과 용왕과 용녀를 배치하였습니다.
화기(畵記)에는 신겸을 수화승으로 응상, 응열, 덕회 등 10명의 승려가 ‘영산회괘불탱’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겸은 ‘충청도총섭겸승장’으로 승려화가일 뿐만 아니라 도총섭 및 승장이었습니다. 신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1649년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에 장릉 조성소의 화승으로 공역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겸이 제작한 현존하는 불화는 모두 괘불도로, 1649년 청주 보살사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58호), 1652년 청원 안심사 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 비암사 괘불도는 그 5년 후에 조성되었습니다. 한 화승이 그린 다수의 괘불도는 매우 귀중한 사례로, 세 점 모두 영산회괘불도라는 같은 도상에 기초하면서 밑그림을 변용해 간 변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암사 영산회괘불도의 조성에 함께 참여한 다른 화승 역시 17세기 충청권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화승입니다. 응열은 1650년에는 수화승 경잠이 이끈 갑사삼신불괘불탱(국보 제298호)에 동참하였고, 1664년 공주 신원사노사나불괘불탱(국보 제299호), 1673년 예산 수덕사노사나불괘불탱(보물 제1263호)에서는 수화승으로 대형 불화의 제작을 지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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