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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야해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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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야해야 된다고?"

[당신들을 위한 강의실은 없다] ② 단국대 문예창작학과 '미투' 사건

2018년 3월, 모교에서 교수가 된 남자 선배가 2008년 당시 신입생이던 여학생을 성폭행했다는 익명의 제보가 학과장에게 전달됐다. 2018년 4월 망설이던 너는 스승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10년 전 사건의 피해 당사자임을 알렸다. 사건은 학내 양성평등상담소로 넘어갔다. 2018년 5월 말, 학과와 학교는 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2018년 6월, 너는 개인 SNS 계정을 통해 이 일을 알렸다. 2018년 6월 25일, 우리는 학과와 학교가 세 달 여의 시간 동안 알아내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쩌다보니 친구가 되었다. 너와 친구가 된 것은 정말로 어쩌다보니, 그랬다고 말을 해야겠지만 어쩌면 너의 머뭇거림 때문이었다. 너는 대체로 반 박자 가량 느리게 반응하는 애였다. 어떤 제안을 하고서 너를 보고 있으면 아, 저 애가 지금 내 말을 들었구나, 지금은 고민을 하는 중이구나, 알 수 있었다. 너는 남들이 네 생각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작고 느렸지만 늘 분명했다.

또 어쩌다보니 내가 네게서 부끄러움을 배웠다는 사실을 네게만 털어놓지 못했다. 나름의 이유를 찾자면 그 일이 아주 오랫동안 부끄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은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간 조정이 비교적 자유롭고 임금도 나쁘지 않으며 업무 강도와 내용이 그리 험악하지 않다는 점에서 퍽 괜찮은 일자리였다. 그곳에 딱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면 현장 주임이 성희롱을 일삼는 남자라는 거였다. 우리가 일을 할 때, 그 남자는 우리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도대체 근본을 알 수 없는 말들만 골라서 해댔다.

나는 쉬폰 원피스가 여름에 시원해서 입는 게 아니라 남자에게 색기를 흘려서 어떻게 좀 해 보려는 의사를 표현하는 복식이라는 사실을 주임에게 배웠다. 굳이 치마를 입은 직원을 찾아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게끔 하는 주임을 보고 너는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청바지를 입어도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도리어 몸의 곡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남자를 유혹하기 좋다는 것을 새롭게 배웠다. 품이 넉넉하고 활동성이 좋은 옷은 예의가 없는 것이지만 바람이 불면 봐 줄만 하게 예쁘다는 것도. 우리는 무슨 옷을 입어도 결과적으로는 남자를 꼬여내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 주임으로부터 배웠다.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생리가 누구에게는 재수가 옴 붙은 것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 말을 면전에서 들은 누군가는 조금 울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네가 주임에게 근무일 변경을 부탁했다. 생리통 때문에요, 라고 말할 때 나는 근처에서 일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눈치도 없이, 따위의 생각을 했다. 내일은 쉴게요, 할 때 나는 네 어깨 너머로 주임의 얼굴을 봤다. 그는 네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안심했고 그에게 생리가 완전히 재수 없는 것만은 아닌가보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쉬고 돌아온 너는 내게,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주임이 그래도 된대? 뱉어 놓고서 그게 굉장히 멍청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내친 김에 너를 말려보기로 했다. 그때의 그는 지금의 우리보다 한참은 더 옛날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그 옛날 사람을 도저히 혼자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으므로. 스무 살은 돈이 없어서 없고 있어도 없게 마련이어서. 참는 수밖에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너는 내 말을 다 듣고, 그러니까 네가 가진 속도대로 다 듣고서 대답했다. 그만둘 거야. 주임에게 주려고 편지를 썼어. 내게 총이 있다면 걔를 쏴 죽였겠지만.

너는 내게 편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걸 읽게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주임이 그 편지를 내 얼굴에 집어던진 덕분이었다. 복사용지에 써서 두 번 접은 편지에는 주임의 평소 행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걸 읽으면서 네가 나팔꽃 관찰 일지 같은 것을 잘 쓰는 초등학생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마지막 한 문단을 특별히 할애해서 그간 주임이 네게 보여줬던 행태에 대한 짧은 소견을 밝혔다. 당시에는 남자의 특정한 행동들을 꼬집는 멸칭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너의 문학적 재능을 활용하는 데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주임의 행각을 고발하고 조롱하는 편지글을 쓰고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도망쳤다고 지금 여기서 내가 쓸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 뒤로도 나는 거기에 남았고 꽤 오래 남아 있었다. 다니는 내내 창피했는데도 그랬다. 그만 둔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부끄러웠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는 너를 탓했다. 네가 그럴 수 있었고 나는 그럴 수 없었던 이유를 헤아려보기도 했다. 나는 그때 형편이 어려웠어, 돈을 벌어야 했잖아, 그런 식으로 어쩌다 보니 네게서 부끄러움을 배웠다는 사실을 너에게만 털어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너에게서,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생각지 못하는 생이, 사람이 살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일인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10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가해자에게 묵은 죄의 값을 묻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네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상대가 우리의 모교에서 교수가 된 남자 선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너는 말했다. 그런 사람이 우리 후배를 가르치는 거야. 나는 너를 만류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유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 의혹과 추문을 남기는지를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네게 의도를 물을 거였다. 사람이 말을 하고 섹스를 해서 남는 증거라는 건 애초부터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네게 그걸 요구할 거였다. 그럼에도 너는 하기로 했고 그래서 나도 말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그래도 된대? 따위의 멍청한 질문은 다행히도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네게 갚아야 할 빚이 내게도 있음을 잊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네 곁에서 이번 일을 겪으며 자연스레 많은 제보를 접했다.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었다. 개중에는 신분을 밝히고 인사를 건네 온 사람도 있고 익명으로밖엔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뜻밖의 사람과 알게 되기도 했다. 주변의 많은 이들로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학내에서 마주치면 괜히 주위를 얼쩡거리다가 말을 붙여 보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가끔씩 굉장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서 그런 날은 슬쩍 피해 다니기도 했다. 그저 일이 잘 풀리지 않았거니 했던 게 다른 이유가 있었다니, 아연했다. 그에 비한다면 가해자의 가해 사실은 별달리 새로울 게 없었다. 흥행에 실패한 신파의 온갖 구성물이 그의 정신세계를 이루는 주재료가 아닌가 짐작하고만 있다. 드물게도, 창의성을 찾아보기 힘든 분이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었다. 고학번인 가해자는 모교 대학원생의 신분이다. 학교에 오래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학내의 사람들은 그를 조교라고도 부르고 선배라고도 부른다. 형이라고도 하고 오빠라고도 한다. 그를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곧 모교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리게 될 일을 짐작한다. 가해자는 학내의 후배들을 살핀다. 개중에 문학에, 특히 시에 재능이 있고 열정을 보이는 자들을 고른다. 시에 대해 얘기한다. 공부를 핑계로 자취방에 후배들을 불러 모은다. 그런 자리에 술이 빠지는 법은 없다. 모두 적당히 취기가 오르면 그가 말하기 시작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야해야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색기가 있어야 하고 똘기가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경험이 많아야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섹스를 좋아해야 된다고 내숭 같은 건 부리지 말아야 된다고 몸을 파는 자들의 인생을 이해해야 된다고 말한다. 삶이 주는 고통 앞에서 몸을 사리는 법이 없어야 된다고 말한다. 그게 재능이라고 말한다. 필요한 경우에는 자신이 아는 여자 시인의 사생활을 근거로 든다. 그 시인이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야하고 경험이 많고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창녀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가해자는 때때로 여자 후배 하나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고평가하고 추어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점찍어둔 후배의 반응을 본다. 덜 취한 것 같으면 더 먹인다. 밤이 깊어 모두는 술기운을 못 이기고 잠이 든다. 가해자는 후배의 몸을 만지거나 옷을 벗기거나 키스를 한다. 바지를 벗는다. 그러다 잠에서 깬 후배가 저항을 하면 자는 척을 한다. 없는 일이 된다. 술에 취해서 그런 것으로 치기로 한다. 상대가 해명을 요구하면 그는 그녀를 뮤즈라고 말한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한다. 사랑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고 시인이라면 이런 것도 사랑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자가 시인이 되려면 파괴적인 관계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니, 자신이 기꺼이 그 사랑의 시혜자가 되겠다고 말한다.

차라리 이번 일로 새롭게 배우게 된 점을 말하고 싶다. 여태껏 일을 하는 피해자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스무 살의 너와 내가 그랬듯 우리보다 어른이거나 우리보다 어린, 어쨌거나 많은, 여자들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미래를 도모하는 중인데도 그랬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 영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해 사례들을 지켜보았는데도 그랬다. 성적인 희롱과 폭력이 특별히 때와 장소를 가려 일어나는 범죄가 아닌데도 그랬다. 많은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마주하며 밥벌이를 해왔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밥줄 때문에, 자신이 책임져야할 다른 무엇이나 누구 때문에 많은 순간 함구했을 그녀들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것도 뭐 어쩌다 보니 그랬겠지만 감히 짐작컨대 밥벌이의 무거움이란, 특히 성범죄와 관련하여 밥벌이의 무거움이란 그간 남자-가해자들에게만 허락된 변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피해자가 외부로부터 격리되었거나 박제된 무언가라도 되는 듯이, 그녀들에게서 피해 사실만을 검출해낼 수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을 알고 있다. 별로 과학자적 면모를 지닌 것도 아니고 그게 그다지 효과적인 것 같지도 않은데 자꾸만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말은 이미 공중에 흩어졌으나 여기에 몸들이 모여 있다. 그런데도 증거를 가져오라고 말한다. 시인으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그의 자질이 의심스럽다는데 심증만으로 그의 밥그릇을 빼앗기는 어렵겠다고 한다. 지켜보고 있자면 진저리가 나서, 차라리 인간의 실존엔 아무 가치도 없다고 우기고 싶다.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선각자 행세를 하고 있는 가해자를 보자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동시에 네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무게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놈의 밥벌이가 누구에게 더 무거웠겠는지. 무겁겠는지.

가해자는 오랫동안 침묵했고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침묵은 결단코 너의 침묵과 그녀들의 침묵이 그러했던 방식으로는 단단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가해자는 어쩌다보니 그 입을 열어서 진실을 부정할 수도 있겠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자기의 죄를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결단코 너의 발언처럼, 그리고 그녀들의 발언처럼 함께하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어주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피해자라는 이름 아래 모였지만 나는 그녀들의 침묵과 발언에, 그 둘 모두를 가능케 했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

▲ㅎ교수 연구실 앞. ⓒ당신들을 위한 강의실은 없다 기획팀

(필자 최예지 씨는 '단국대 문예창작과 성폭력 교수 진상규명 연대' 구성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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