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마감됐습니다^^
7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역사지리전문가) 제67강은 한성백제의 외곽 산성인 삼성리토성에서 한성백제의 관방시설에 대하여 알아보고 숭유억불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에 일시적으로나마 불교를 부흥시켰던 명종(明宗) 대 문정왕후의 불교중흥 중심지였던 봉은사(奉恩寺)와 도심 속의 조선 왕릉인 선정릉(宣靖陵)을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를 감안하여 서울학교 일정 중에 가장 짧은 코스이면서 따가운 햇살을 가려줄 빌딩과 나무들의 숲속을 거니는 새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강남은 빌딩숲으로 둘러쳐져 있지만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빌딩 사이로 숨어 있는 산줄기의 흐름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으며 그 산줄기에 기대어 꽃피웠을 찬란했던 문화유산도 우리들 가까이로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학교 제67강은 2018년 7월 8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30분(개강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서울지하철 7호선 청담역 2번 출구 지하에 모여주세요.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성리토성(경기고등학교)-봉은사(일주문-남호대사비-청호대사비-선불당-대웅전-영산전-판전-다래헌터-흥선대원군불망비)-승과평터-코액스(지하상가)-테헤란로-점심식사 겸 뒤풀이-선정릉(안내소-중종릉-정현왕후릉-성종릉)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강남 봉은사와 선정릉>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토성과 사찰, 왕릉이 어우러진 강남의 유적공간
경기도 안성 칠현산(七賢山)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 이르러 한 줄기는 서쪽으로 서해를 향해 내닫고, 다른 한 줄기는 북쪽으로 뻗어나가 백운산과 청계산을 지나 북서쪽으로 관악산에서 힘차게 솟구칩니다. 다시 한강을 향하여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우면산과 매봉산을 일구고 북쪽으로 국기원이 있는 역삼공원에서 작은 봉우리를 지나 동쪽으로 뻗어나가 봉은사 뒷산인 수도산에서 그리 높지 않게 봉긋 솟았다가 마침내 뚝섬 건너편 영동대교 동쪽에서 한강으로 몸을 감춥니다.
한강으로 숨어들기 전에 봉긋이 솟아 있는 수도산은 한성백제시대에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삼성리토성이 있었던 곳입니다. 한성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성을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눈 이성체제(二城體制)로 운영하였는데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이며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심이었습니다.
도성 밖에는 서쪽으로 수도산에 위치한 삼성리토성, 동쪽으로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이성산성(二聖山城), 남쪽으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그리고 한강 북쪽의 아차산성이 외성으로서 도성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삼성리토성은 북쪽으로 한강에 접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뚝섬 방향을 내려다보는 봉은사 동북쪽에 있는 흙으로 쌓은 산성입니다. 연장선 170칸, 높이 약 1칸의 토루(土壘)가 산허리를 에워싸고 한강에 닿아 있는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단식(有段式)의 축성 형태가 뚜렷한 성벽이 350m 가량 남아 있었으나 강북에 있던 경기고등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마구 파헤쳐져 대부분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북쪽에 개설된 축대 부분을 토성의 흔적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삼성리토성은 지정학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한강변을 방어하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탄천(炭川)을 조망하며, 북으로는 중랑천(中浪川)과 맞닿아 있는 뚝섬 쪽을 바라보고 있어 한강의 남쪽에 있는 한성백제의 도성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서깊은 고찰 봉은사
삼성리토성이 자리 잡은 수도산 정상에는 지금은 경기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유서깊은 고찰 봉은사는 그 남쪽 품에 안기어 있습니다.
봉은사(奉恩寺)는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사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만 <삼국사기> 권38 <잡지(雜誌)> 제7에 봉은사가 일곱 곳의 성전사원(成典寺院) 중의 하나라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정할 뿐입니다.
성전사원이란 신라 중기에 나타나는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사찰을 일컫는데 서라벌에는 남쪽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 북쪽으로 봉성사(奉聖寺), 서쪽으로 영묘사(靈廟寺), 동쪽으로 황룡사(皇福寺), 중앙에 영흥사(永興寺)를 의도적으로 배치하여 이곳에서 여러 종류의 국가의례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사원의 전통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진영(眞影)을 모신 사찰인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그 맥을 이어 갔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가 1498년(연산군 4) 성종의 능(宣陵)을 위해 능의 동편에 있던 견성사를 중창하여 원찰로 삼고 이름도 봉은사로 고쳤으며 1562년(명종 17)에는 선릉 곁에 있던 봉은사를 수도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확장 이전하고 봉은사가 있던 곳에는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중종의 능, 즉 정릉(靖陵)을 옮겨왔습니다.
선정릉의 원찰
이렇게 선릉과 정릉이 합해진 선정릉의 권역이 정해지고 봉은사는 선정릉의 원찰의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봉은사는 태조와 세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檜岩寺), 세조의 능인 광릉의 원찰 봉선사(奉先寺)와 더불어 조선 왕실에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찰로 격이 높아지게 됩니다.
성리학(性理學)을 기본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은 억불(抑佛)의 한 정책으로 사찰의 수를 대폭 줄이게 됩니다. 태종 대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사찰을 242개로 줄였고 세종 대에 와서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나누어 각각 18개 사찰씩 36개 사찰만 인정하다가 연산군 대에 와서는 이마저도 완전 폐지되며 선교양종의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승과제도의 부활
승과제도(僧科制度)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일종의 승려 등용의 국가고시제로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성종 대까지는 지속되었으나 연산군 대에 시행하지 않았다가 중종 대에 합법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이렇듯 존폐의 위기에 몰렸던 불교가 명종 대에 와서 일시적인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명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한 어머니 문정왕후는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여러 정책을 폈는데 그 곁에서 당시의 봉은사 주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스님이 잘 보좌하였기 때문에 유신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불교중흥정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봉은사는 역설적으로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 크게 부흥하여 조선불교의 중심에 우뚝 서는데 문정왕후는 먼저 선교양종의 체제를 부활시켜 봉은사를 선종을 총괄하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봉선사를 교종을 총괄하는 교종수사찰(敎宗首寺刹)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보우 스님을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判禪宗事 都大禪師 奉恩寺 住持)에 임명하여 봉은사를 중심무대로 삼아 불교중흥 정책을 펼쳤습니다.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
이러한 불교중흥정책의 하나로 그동안 완전 폐지되었던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가 다시 부활되는데, 승과는 잡과(雜科)와 함께 3년마다 과거가 시행되므로 1552년(명종 7)에 첫 시험이 실시된 이후 1555년(명종 10), 1558년(명종 13) 그리고 1562년(명종 17)에 마지막으로 시행되고 문정왕후가 죽은 그 다음해인 1566년(명종21)에 마침내 그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불교를 다시 부흥시킨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이때 시행된 승과에 급제한 인재들로서, 서산대사는 첫 번째 실시한 1552년에, 사명대사는 마지막인 네 번째 실시한 1562년에 합격하였습니다.
승과에 합격한다는 것은 승려로서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과거장에 모여 들었는데, 그 많은 인원들이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 봉은사 앞 벌판인 승과평(僧科坪)으로서 지금은 국제전시장인 코액스가 들어 서 있습니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갑자기 서거하자 잠시 동안 부흥기를 맞이했던 불교는 다시 탄압과 쇠락을 길을 걷게 되고 그 중심에 섰던 보우 스님도 졸지에 요승으로 지탄받으며 탄핵되어 제주도로 유배 간 후 그곳에서 조정의 명을 받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장살(杖殺)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봉은사의 유적들
봉은사에는 서울 도심의 사찰치고는 볼만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경전목판(經典木板)과 명필의 편액(偏額) 글씨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새겨져 있는 비석(碑石)들이 그것입니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판전(版殿)에는 모두 3749장의 경판이 보관되고 있는데 그중 3175장은 평생을 경전을 사경(寫經)하여 그것을 판에 새기는 일을 하였던 남호(南湖) 스님이 판각한 화엄경판(華嚴經板)이고 유마경(維摩經),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15종의 경전목판도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추사와 봉은사
‘판전(版殿)’이라는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과 더불어 대웅전의 편액도 추사의 글씨인데 이것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삼각산에 있는 진관사(津寬寺)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이고 ‘영산전(靈山殿)’ 편액은 국어학자이면서 의사로서 종두법(種痘法)을 최초로 실시했던 지석영(池錫永)의 형인 백련(白蓮) 지운영(池運永)이 쓴 글씨입니다.
추사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데 예산의 추사고택 뒤에 화암사를 원찰로 둘 정도로 돈독했으며 부친 김노경은 당대 최고 선지식이었던 대흥사 해붕 스님과 교유했고 추사도 서른 살 무렵 만난 초의선사와 평생 교유했으며, 만년에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린 185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 김노경이 터전을 잡은 청계산 아래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내며 추사체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인근에 있는 봉은사를 드나들며 주지 호봉응규(虎峯應奎)와 교분도 쌓았는데 이때 봉은사는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하고 있어 추사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경전서사(經典書寫) 공덕을 높이 찬양한 것은 바로 호봉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면서 ‘판전(版殿)’이라는 현판을 써 주었는데 그가 죽기 3일 전의 일입니다. 그 글씨는 “참으로 무르익으면 오히려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진 대교약졸(大巧若卒)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추사 예술의 결정판으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봉은사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송덕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것은 판전에 보관된 경판을 판각한 남호대율사비(南湖大律師碑)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강을 범람케 한 을축년 대홍수(1925년) 때 많은 돈을 들여 708명의 인명을 구제한 ‘봉은사 주지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奉恩寺 住持 羅晴湖 大禪師 水害救濟功德碑)입니다.
봉은사 판전을 세운 사연
남호영기(南湖永奇)대사는 당대의 화엄강백으로서 봉은사 이외에도 삼각산 내원암에서 아미타경을, 흥국사에서는 연종보감을, 철원 석대암에서는 지장경을 간행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경하여 오대산 적멸보궁과 설악산 오세암에 봉안하는 등 경전간행과 보급에 진력하였습니다.
영기대사는 1820년(순조 20) 전남 고부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중기 학자인 정경세(鄭經世)의 후손으로 1833년(순조 33) 승가사에서 출가하여 대연(大演)의 제자가 되었고 1854년 망월사에서 화엄경을 설법하면서 화엄경 판각을 결심하여, 이듬해 봉은사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 80권, <행원품별행(行願品別行)> 1권, <천태삼은시집(天台三隱詩集)> 1권, <준제천수합벽(準提千手合壁)> 1권, <불족적도(佛足跡圖)>를 간행하였습니다.
봉은사에서의 경판 간행은 왕실의 내탕금(內帑金)과 각계의 시주를 얻어 이루어진 것으로 1856년(철종 7) 9월 판각이 완성되자 경판을 봉안하기 위해 판전을 세우고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받아 현판을 걸었고 1857년에는 판전에 신중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하였으며 논과 밭을 매입하여 사찰의 경제적 기반을 확장하는 데에도 기여하였습니다.
을축대홍수와 청호 스님
을축대홍수는 1925년 을축년 7월 8일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19일에 그쳤는데, 특히 16일과 17일에 집중호우가 내렸습니다. 따라서 한강의 수위가 12.72m를 돌파하여 용산제방이 모두 붕괴되었고 현재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 약 1,000호 4,000명의 주민이 모두 지붕 위에 올라 대피하였으나 급기야 집까지 물에 잠겼는데 이때 지금의 잠실 5단지 가장 높은 곳에 있던 큰 느티나무 두 그루에 700여 명이 올라가 구조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봉은사 주지 청호 스님이 뱃사람을 수소문하여 구조에 나서자고 독려하였지만,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사람을 구조해 오는 사람은 후한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하고 뱃사람을 움직여 같이 배를 타고 신천리(현 송파구 신천동)까지 가서 노약자와 어린이부터 차례로 배로 옮겨 봉은사로 돌아왔습니다. 일단 708명을 무사히 구조하여 배가 떠나자 얼마 후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뿌리 채 뽑혀 거친 물살에 떠내려갔으며 한 그루는 남아 있다가 1970년대 잠실 개발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청호 스님의 공덕을 기록한 <불괴비첩(不壞碑帖)>이 1926년에 편찬되고 1929년 7월에 광주 수해 이재민 대표 이준식, 허훈, 이주원, 김성득, 김순기 등이 발기하여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 공덕비’가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가 짓고,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가 글씨를 썼습니다.
그리고 판전 아래에 비각을 갖추고 위엄 있게 서 있는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不忘碑)에는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에 섞여서 여러 해 동안 송사(訟事)에 시달려 어려움이 많았는데 대원군 덕택에 문제가 해결되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유교의 가치관을 근본으로 한 조선사회에서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과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이 몸에 함께 있다는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혼백이 몸에서 빠져나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육신은 사라져도 초자연적인 정신은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산 자의 육신이 머무는 거주공간인 집과 궁궐은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자의 혼(魂)을 모신 곳을 사당(祠堂), 시신(體)인 백(魄)을 모신 곳을 무덤이라 하여 이를 음택(陰宅)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은 그 신분의 차이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불렀습니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고 원은 세자(世子), 세자빈(世子嬪), 세손(世孫) 그리고 종실로서 왕위에 오른 왕의 부모인 사친(私親)의 무덤이며 묘는 그 밖의 왕족으로 왕의 정비(正妃)의 아들과 딸인 대군(大君)과 공주(公主), 왕의 서자(庶子)와 서녀(庶女)인 군(君)과 옹주(翁主), 왕의 후궁(後宮)인 빈(嬪), 귀인(貴人), 숙의(淑儀) 등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왕은 궁궐에서 살다가 죽으면 혼(魂)은 종묘(宗廟)에 모시고 체백(體魄)은 능에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릉은 도성으로부터 십리에 해당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로부터 백리에 해당하는 교(郊)에 이르는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특별히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성 백리 안쪽인 서울 근교(近郊)에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 42기와 폐위된 두 왕의 무덤인 묘 2기가 모두 보존되고 있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성종과 중종이 묻혀있는 선정릉
지하철 2호선 역 이름으로도 불리는 선릉(宣陵)은 엄밀히 말하면 선릉과 정릉(靖陵)의 두 왕릉이 합쳐져 있는 공간으로 선정릉(宣靖陵)이라고도 부릅니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며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인데, 선릉은 왕과 왕비가 다른 언덕에 묻혀 있는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의 두 봉분이고 정릉은 왕만이 묻혀 있는 단릉(單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정릉 안에 능이 세 개 있다고 해서 ‘삼릉(三陵)’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했습니다.
선릉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조선은 왕릉을 조성할 때 능에 모시게 될 왕의 생애와 가계(家系) 등을 상세히 기술한 지문(誌文)을 작성하여 현재의 왕에게 최종 검토를 받고 함께 묻게 되어 있는데 그 당시의 왕인 연산군이 최종 검토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중종의 능인 정릉은 원래는 서삼릉(西三陵)에 있었으나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중종의 능 옆에 함께 있고 싶어 최측근인 보우대사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 가까이에 있는 선릉 옆으로 천장(遷葬)하고 봉은사를 그 원찰로 삼았으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부자지간인 선, 정릉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는데 훼손의 정도에 있어서는 아마도 아들인 중종이 훨씬 심각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중종의 정릉이 능침에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릉에 대한 공간구성과 배치구조, 왕릉 주위의 많은 석물(石物)들과 건물의 이름과 의미, 역할에 대해서는 현장강의를 통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 바지), 스틱, 모자, 선글라스, 식수,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참가비, 웹주소,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서울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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