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 그대로다. 한나라당은 딜레마에 빠져버렸다. 주민투표가 어떻게 정리되든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버렸다.
오세훈 시장이 주민투표에서 이기면 한나라당의 복지 기조가 흔들린다. 워낙 들쭉날쭉한 복지정책을 내놓기에 정리가 쉽지 않지만 대략 정리하면 한나라당의 복지 기조는 '70%'다. 보편적 복지를 주장하는 민주당에 맞서 '70% 복지'를 주장해 온 게 한나라당의 그간 복지 기조다. 이게 무너진다. 오세훈 시장이 내건 '2014년까지 50% 무상급식' 방안이 관철되면 한나라당의 복지 기조는 '후진'할 수밖에 없다.
▲ 오세훈 서울시장. ⓒ뉴시스 |
물론 무시하면 된다. '50% 복지'는 서울시만의 경우로 한정하고 당은 모른 체 하면 된다. 실제로 그런 조짐도 보인다. 유승민 최고위원이 "왜 당이 16개 광역단체장 중 한 명에 불과한 서울시장이 혼자 결정한 대로 끌려가야 하나"라며 선을 그었고, 박근혜 의원 또한 "무상급식은 지자체마다 사정과 형편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정과 형편에 맞춰서 해야 한다"고 울타리를 친 바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50% 복지'가 주민투표에서 추인되면 탄력을 받게 된다. 오세훈 시장의 '말빨'은 둘째 치고 청와대와 정부, 그리고 강경보수파의 '말빨'이 커진다. 한나라당의 복지 행보 역시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며 마뜩찮은 눈길을 보내던 세력에 확성기를 선사하게 된다. 당의 복지정책은 널뛰기를 하고, 당의 안팎은 백가쟁명으로 시끄러운 '콩가루'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오세훈 시장이 주민투표에서 지면 한나라당의 선거 전열이 흔들린다. 오세훈 시장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시장직을 던지는 상황이 연출되면, 다시 말해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면, 나아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하게 되면 당 지도부가 붕괴할 수도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론이 비등해지고, 당 지도부가 사퇴하지 않더라도 지도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이 여파는 곧이어 진행될 총선 공천에까지 미친다.
그래서일까? 홍준표 대표가 잘랐다. 주민투표와 서울시장직 연계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선례가 없다"며 "민주당이 '깽판'을 치고 판을 깨자는 것인데 그 판에 시장직을 거는 바보가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희망사항이다. 주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가장 먼저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높은 홍준표 대표의 일방적인 희망사항일 뿐이다. 오세훈 시장이 '바보'가 되기 싫어 시장직을 내던지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한다. '바보'는 되지 않을지 몰라도 '식물시장' 신세는 면하기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되면 여파는 고스란히 한나라당에 돌아온다. 무능 시장의 무능 시정에 대한 서울지역 유권자들의 불만이 총선, 나아가 대선에서 표심으로 표출되기 십상이다.
아, 이렇게 짚고 나니 새로운 게 하나 눈에 들어온다.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도 시장직 연계 입장은 뒤로 물린 오세훈 시장의 속내다. 주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시장직을 던지지 않아도 '식물시장' 신세를 면치 못할 텐데도 굳이 시장직 연계 입장을 꺼내지 않은 그의 속내 말이다.
어제 연출된 장면을 보니 다급한 쪽은 한나라당 지도부다. 이런 지도부 앞에서 오세훈 시장이 시장직을 만지작거리면 어떻게 될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다급한 쪽이 먼저 나서게 돼 있다. 어떻게든 투표율을 끌어올려 시장직 사퇴와 같은 불상사를 막으려 할 것이다.
오세훈 시장의 시장직 사퇴는 비장의 카드다. 서울시민이 아니라 한나라당 지도부를 향해 '도울래? 말래?'라고 다그치는 겁박 카드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꺼내지 않는 것이다. 찌르는 칼보다 무서운 게 겨누는 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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