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대북공작금을 유용해 야당 정치인 등을 불법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명박 전 대통령 개입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사건 등 각종 국기 문란 사태의 최종 지시자로 지목됐음에도 줄곧 법적 책임을 피해왔다. 그러나 부정한 일들에 연루된 정황은 차고 넘친다. (☞관련기사 : "작전명 '포청천', MB 국정원 野의원 불법 사찰")
23일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과거 국정원의 정치인 불법 사찰 계획, 이른바 '포청천 작전' 제보 내용을 공개하며, 국정원이 정치인 및 민간인 사찰을 하는 데 대북공작국의 특수활동비 가운데 해외대북공작비 일종인 '가장체 운영비'가 쓰였다고 밝혔다. 이 사안은 국정원 개혁위원회 적폐청산 태스크포트(TF)도 밝혀내지 못한 일이라고 민 의원은 주장했다. 민 의원은 "국정원 내에 아직도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민 의원은 이어 "제보자의 전언에 따르면 공작이 지속된 것으로 봐서, 국정원 업무의 관행상 모든 진행과 결과물이 이 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동원 야당 사찰 의혹에도 MB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민 의원은 당시 불법 사찰에 대한 총괄 책임을 맡은 이로 최종흡 전 국정원 3차장을 지목했다. 최 전 차장은 2009년 2월 MB가 국정원 내 친정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단행한 인사를 통해 복귀한 인물로 TK 계열 'MB맨'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40년 간 국정원에 몸담았다가 노무현 정권 시절이었던 2006년 퇴직했고, 다시 3년 만에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었다. 최 전 차장은 국정원 공제회 양우회 임원을 맡았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국정원장 특보, 국정원 상임 자문위원을 맡는 등 국정원과 끈을 계속 이어왔던 인물이다.
야당 사찰 주모자로 지목된 '반DJ성향' 최종흡, 그는 누구인가?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최 전 차장의 성향은 '반DJ'로 요약된다. 유성옥 전 심리전단장이 댓글 사건으로 구속되기 직전 직접 작성, <경향신문>에 제보한 글에 따르면, 최 전 차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최 전 차장은 부서장회의 도중 유 전 단장을 향해 화를 내면서 "심리전단장은 왜 햇볕정책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해"라는 질책을 할 정도였다.
DJ 정부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이종찬 씨의 회고록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YS 정권 시절 안기부에서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방해공작을 추진했는데, 그 핵심 인물에 최 전 차장이 포함돼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투서 한 장이 들어왔다. 과거 안기부에서 '김대중 노벨평화상 수상 방해공작'을 수행한 주모자들을 제거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감찰실장에게 은밀하게 조사를 지시했다. 얼마 후 조사보고서가 올라왔다.
'산림정책', '조선사업', '세종사업', '피요르드사업'의 이름으로 그때까지 진행된 방해공작이 모두 들어있었다. 공작에 가담했던 직원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바로 내가 태스크포스 팀장으로 발탁한 이종훈과 노르웨이에서 말레이시아 파견관으로 전보된 최종흡이 거기에 해당됐다...그 일이 있은 후 김한정(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편집자)이 나에게 "방해공작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노르웨이를 한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다녀오더니 이렇게 보고했다.
"지금 밖에서 해외 동포들이 각기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반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통제하지 않으면 잡음이 생겨서 오히려 노벨상 추진에 차질을 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전담해 나가야겠습니다." (<동아일보> 2015년 5월 23일자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 39' 노벨상 특별 수행원 中)
이종찬이 돌아간 직후 최종흡은 서둘러 평소 교분이 있던 야코브 스베르드루프 전 노벨위원회 간사 겸 노벨연구소장을 만난다. "김대중은 정계 복귀할 인물이며 노벨 평화상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얘기를 예이르 루네스타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에게 꼭 전해 달라."(<동아일보> 2015년 5월 16일자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 38' 노벨평화상 태스크포스 中)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수상 방해 공작'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 최종흡 전 차장,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2009년 MB 국정원의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상 취소 청원 계획'에도 등장한다. 국정원 적폐청산 TF가 지난 2017년 10월 공개한 보고서, 검찰 등에 따르면 국정원의 한 직원은 지난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노벨상 취소 청원서를 보내는 방안을 논의했다. (☞관련기사 : DJ노벨상 취소 청원 '용역' 받은 극우 단체의 실체)
당시 국정원 3차장이 최종흡 전 차장이었다. 경북 출신인 최 전 차장은 2009년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다. 당시에는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이 생존해 있던 때다. 이후 그는 2010년 9월까지 국정원 3차장 직을 수행했다.
최 전 차장은 앞서 주 노르웨이 참사관, 주 말레이시아 참사관, 주 영국 공사 등을 지낸 해외 정보 전문가다. 노벨상을 수상하는 노벨위원회가 있는 노르웨이에서 참사관을 지냈던 점이 주목된다. 노벨상 취소 청원 운동을 했던 시점은 최 전 차장이 재임한 시기와 겹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어 김 전 대통령이 서거(2009년 8월)한 후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같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기 위한 공작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노벨상 수상 전에는 '수상 방해 공작'을, 노벨상 수상 후에는 '수상 취소 공작'을 벌였던 것일까? 만약 사실이라면, 최 전 차장은 매우 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부관참시에 가까운 일이다.
또 최 전 차장이 당시 국정원이 지원했던 뉴라이트 성향의 급조 단체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 시절 국정원의 자금을 지원받아 정부 정책을 옹호하거나 야당 정치인을 비난하는 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민 의원이 주장한 것은 한발 더 나아가 '야당 정치인 사찰'이다. 국정원 3차장은 대북 정보를 총괄한다. 그런 그가 공권력을 DJ 노벨상 방해 공작을 하고, 국내 정치인들을 사찰하는 데 역량을 쏟아 부은 셈이다. 더욱이 국가 안보를 위해 써야 할 대북공작금을 유용했다면 이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민 의원이 사찰 대상으로 열거한 인물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 등 야당 내에서도 '친DJ파'로 분류되던 인물이다.
민 의원이 공개한 제보는 검찰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최 전 3차장과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원세훈 원장뿐 아니라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이 전 대통령까지 이같은 야당 정치인 사찰 공작에 연루됐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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