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면,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저마다 절실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책장을 뒤질 것이다. 혹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을 접하려고 책을 펴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원한 답, 기발한 발상 같은 것들이 책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잣대들로만 따질 수 없는 책이 있다. 대단한 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처음 듣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도 않지만 값어치 있는 책이 있다. 이런 저작이 이런 때에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세상에 온기를 더하는 책들이 있다.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이하 <어언 30년>)이라는 기다란 제목을 단 신간이 바로 그러하다. 저자는 한국GM의 '정규직’ 노동자 이범연. 그냥 노동자라 하면 될 걸 그 앞에 '정규직'을 덧붙이는 현실이 역설적으로 이 책의 존재 가치의 배경이 된다. 부제가 이 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노조 & 노동자".
이 글을 쓰는 지금,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단체협상에서 여전히 임금 인상 폭에만 관심을 보이는 조합원 정서 때문에 비난 받고 있다. <어언 30년>의 책 표지에 실린 문구처럼, "꿈을 잃고 추락하는 대기업노조, 보수의 길로 나아가나?"라는 물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런 대기업노조들이 속한 민주노총의 이영주 사무총장은 임기가 끝나자마자 박근혜 정권 때 시위 주도를 이유로 구속됐다.
한 쪽에서는 '귀족노조'라 비난받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노조들이 모인 총연맹 간부들이 영화 <1987>의 한 장면마냥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한국 밖 다른 어느 나라의 사회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이런 요상한 형국에 지금 노동운동이 끼어 있다. <어언 30년>은 30년 전 노동자대투쟁에 참여했고 지금은 지탄받는 '대공장 정규직'의 한 사람이 이 복잡한 현실을 진솔히 파고들며 성찰하는 책이다. 내용을 읽어보기 전에 발신자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그런 메시지다.
30년 전, 마찌꼬바 경력직보다 못했던 대기업 생산직 임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범연의 30년 공장 생활이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90년대 내내 해고자로 보냈고 한 차례 복직한 뒤에도 외환위기 직후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으로 다시 해고됐다. '어언 30년' 중 10년 이상은 타의로 공장 바깥을 맴돈 해고 노동자 신세였던 것이다.
투사의 삶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누구도 "편하게 살았다"고 치부할 수 없는 생이다. 대우자동차에 입사할 때에도 대기업 노동자가 중소기업 노동자와는 다른 부류라 여기며 선택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노동자가 되고 싶어서 대우자동차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때 상황은 이랬다.
"1987년 이전만 해도 한국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했다. 한국GM의 선배들에게 87년 이전에 받았던 임금 수준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들의 임금 수준은 내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기 전에 다니던 마찌꼬바(영세자영업 규모의 제조업체-인용자)의 경력 노동자들보다 낮았다." (<어언 30년> 36쪽)
하지만 1987년, 그 역사적인 해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저자는 단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지탄과 질시를 받는 처지가 됐다. 이범연은 당연히 이런 손가락질에 무턱대고 동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억울하다고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어언 30년>에서 2000년대 이후 대기업 노동 현장 풍경을 담담히 돌아보며 아픈 부분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전체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누리는 사회복지보다 단체협약을 통해 꾸준히 확대되어 온 기업복지가 더 소중하고 혜택도 크다. (…) 민주노총과 진보정당의 복지 확대에 대한 요구에 대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 (…)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중 많은 것을 기업복지로, 단체협약으로 해결한다. 한국GM의 경우도 단체협약을 통해 자녀들의 대학 학자금을 지원받는다. (…) 그러니 반값 등록금 투쟁은 남의 동네 일일 수밖에 없다." (57쪽)
"나는 몇 번의 선거를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보수적 흐름과 진보적인 흐름의 중간에 투기적 욕망에 뿌리를 둔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 흐름이 선거 결과를 좌우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 오래 전에 같은 [인천] 서구에 사는 조합원들과 술 한 잔 할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 말했다.
"나는 집값 때문에 박근혜 찍었어."
"솔직히 나도 박근혜 찍었어."
예상보다 많은 조합원들이 박근혜를 찍었다고 했다." (61~62쪽)
노동자가 평생 일해 집 한 채 갖게 됐다는 게 무슨 허물이겠는가. 도리어 그런 노동자가 많아질수록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학자금 지원도 그렇다. 임금 인상에 그토록 경기를 일으키는 사측이 선심 쓰듯 학자금 지원을 단체협약에 넣어주었을 리 만무하다. 이 또한 1987년 이후 지난한 투쟁의 성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성취가 더 많은 이들의 성취로 확산되는 길이 막혀 버렸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한국 노동운동은 언제부턴가 사회운동의 본령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회운동은 결코 특정 집단의 실리를 늘리는 일과 무관하지 않고 이를 백안시하지도 않지만, 또한 반드시 이 일을 모든 사회 구성원의 권리 확대와 연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성에 사회운동의 운동됨이 있다.
정규직 노동자가 자가 소유주가 된 게 문제가 아니다. 그와 함께 공공 임대주택이 늘어나고 전월세 인상을 억제해야 했다. 대기업 노동자가 학자금 지원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를 계기로 국가가 운영하는 장학금 제도 또한 늘어나야 했다. 그러나 이런 확산의 통로가 막혔다. 단체협상은 기업 울타리를 넘어 확대되지 못했고, 정치에 개입해 제도를 바꾸는 길 역시 제대로 뚫지 못했다. 그런 통로를 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기업/정규직/남성/조직 노동자들이 기업별 임금협상의 중력에 빨려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어언 30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이 중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관한 분석이다. 저자는 하나마나한 말로 동료 노동자들을 질타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 저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정신분석가가 된다. 그곳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거대한 공허, 허무다. 삶이라 할 바를 도통 찾을 수 없는, 비어 있는 삶이다.
"삶과 돈의 부등가 교환"에 포로가 된 노동자들
계급투쟁은 절반 정도는 누가 누구'에 맞서' 싸우느냐는 문제다. 사회 전체에서든 한 기업 안에서든, 쟁점이 임금 인상이든 제도 개혁이든, 노동이 자본에 도전하고 대립하며 긴장을 놓지 않는다면 분명 계급투쟁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동시대 어느 나라보다 치열하게 임금 인상 투쟁을 벌이던 20세기 말 한국의 노동자들은 한때 전 세계 계급투쟁의 선봉대 대접까지 받았다. 얼굴을 맞댄 자본과의 '적대'라는 점에서는 분명 그랬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다른 절반이 있다. 그것은 누가 누구'와 함께' 싸우느냐다. '적대'만으로 투쟁의 이야기가 완성될 수는 없다. 이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은 '연대'다. 이는 단지 적대자를 제압하기 위해 더 많은 동맹 대상이 필요하다는 문제만은 아니다. 애초에 적대자에 맞서 지키고 키우고 풍성히 하려던 게 무엇이었는지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연대'란 수많은 타자들을 내 곁에 더하는 일만이 아니라 이들 타자를 통해 나를 규정하는 일, 끊임없이 새로이 규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을 어느 방향으로 자라나게 하려 하기에 우리는 자본과의 적대를 마다하지 않는가? 모든 민중 집단의 각 세대는 이 물음에 저마다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 어찌 보면 1987년에 태동한 민주노동조합운동이 내놓은 답은 '임금 인상'이라 하겠다. 기업 단위 투쟁을 통한 화폐 소득 증대 말이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얼마 동안은 이게 정말 답이 될 수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비해 노동자들이 받는 몫이 형편없이 작았기 때문이다. 화폐 소득이 시장에서 행사하는 시민권의 기초인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턱없이 제약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임금 인상이 곧바로 인간다운 삶에 어울리는 권리의 쟁취라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일정 수준에 이르고 나면(가령 '생활임금' 수준을 훌쩍 넘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전체 노동자의 소득이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않고 특정 집단만 더 빨리 늘어난다면 더욱 그렇다. 이때에도 과연 더 많은 임금의 획득이 자본에 맞서 우리 삶을 더 충만하게 만드는 길이라 할 수 있을까? <어언 30년>의 제2장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이 던지는, 묵직하면서도 과녁을 제대로 겨냥한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노동하는 이에게 돈이란 다른 무엇을 하려는 수단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는 것이고, 언젠가 여가에 쓰려는 것이고, 은퇴 후 불안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나 벌어야 이 모든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면, 어쨌든 더 많이, 지금보다 더 많이 벌수록 좋다. 더 많이 벌려면 여가는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고, 은퇴도 될수록 뒤로, 뒤로 미뤄야 한다. 이범연은 여기에서 노동자가 스스로 노예가 되는 무서운 악순환을 본다.
"노동자의 현재 삶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의 삶을 어떻게 즐겁게 사느냐보다는 미래의 불행을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가 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더 노동에 매이게 하고 바로 지금 현재의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더구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술 마실 돈이 필요하고, 놀러 갈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더 해야 한다. 여가를 즐기는 것 역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돈의 문제가 된다. 악순환은 계속된다." (99~100쪽)
더 많은 돈을 벌려고 노동자들은 더 많은 시간을 자본을 위한 생산에 투입한다. 자발적으로 더 많은 노동시간을 받아들인다. 법정 노동시간을 줄여도 오히려 잔업, 특근을 늘려서 초과근로수당을 더 챙기려 한다. 이런 노동 경쟁에 나서다 보니 동료의 정리해고나 정규직-비정규직 차별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고 넘어간다. 노동조합 활동도 이런 장시간 노동에 맞춰 더 많은 현금 보상을 따낼 수 있는지 여부로만 평가한다.
돈과 시간의 맞바꿈. 사람의 삶이 결국은 시간의 지속이니 이는 달리 말해 돈과 삶의 맞바꿈이다. 이범연은 이를 "돈과 삶의 질의 부등가 교환"(91쪽)이라 부른다. 탁월한 지적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부등가"라는 점이다. 애초에 돈은 어떤 삶, 우리가 도달하려는 어떤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인데, 이 돈을 벌려고 삶을 통째로 갖다 바치고 있다. 돈은 어느 때가 돼야 충분한 만큼 쌓일지 모르는데, 삶은 확실히 소진되고 있다. 계속 하면 할수록 시간의 주인 쪽이 밑지는 거래다.
이런 악순환에 빠진 노동자에게 지금의 삶은 돈 버는 노동을 떠나서는 별 의미가 없다. 노동 경쟁을 빼면, 텅 비게 된다. "축적, 더 많은 축적"을 외치는 자본가의 욕망 이면이 허무인 것처럼, 더 많은 노동을 통해 더 많은 임금을 좇는 노동자의 삶도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어언 30년>이 충격적으로 증언하듯이 대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도박이 열병처럼 번지게 된다. 자고로 삶의 실체를 상실한 이들이 찾는 마지막 안식이 도박 아니던가.
30여 년 전에 찾은 임금 투쟁이라는 답을 벗어나지 못한 노동조합운동은 이 악순환을 깨기는커녕 부속품 노릇을 하고 있다. 노동조합운동은 아직도 자본과 '적대'하는지 모르지만, '연대'해서 만들려고 한 삶은 무엇이었는지 알아볼 수 없게 돼버렸다. 저 혼자, 저희들끼리만 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지금 노동 현장에 만연한 병의 진짜 원인이 아니다.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뭔지 종잡지 못했기에 모든 게 흐트러지고 만 것이다.
클리나멘이 되자, 튀어오르는 원자가 되자
<어언 30년>은 비판만 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는 여전히 노동운동에 애정을 보내며 변화 가능성과 방향을 진지하게 타진한다. 그의 첫 번째 주문은 "관성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너무 빤한 충고로 들리는가.
그래서인지 이범연은 고대 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처음 제시하고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가 재발견한 '클리나멘' 개념을 동원한다. 세상을 원자의 운동으로 바라본 루크레티우스는 항상 정해진 경로로 움직이던 원자들 사이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아주 작은 어긋남이 변화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중력이나 관성에서 벗어나는 작은 어긋남에 그가 붙인 이름이 '클리나멘'이다.
이범연은 노동운동의 현 상황에 답답해하는 이들이 현실만 탓할 게 아니라, 누군가 큰 그림을 던져주기만 기다릴 게 아니라 다들 '클리나멘'이 되자고 촉구한다. 하나하나로만 보면 미미한 각도 차이 정도로 보일 움직임들이 모여 변화의 큰 흐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변화는 원래 그렇게만 만들어지는 법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는 <어언 30년>의 저자처럼 노동 현장에 투신하던 이들이 그런 클리나멘이었다. 이제 또 다시 그렇게 주어진 경로에서 튀어 나오는 원자들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지만, <어언 30년>에는 우리 주위 어디에서 어긋남이 시작되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풍부히 담겨 있다. 지금 당장 다른 삶을 키워갈 무대로 '지역'을 강조하고, '대학'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30년을 돌아 다시 한 번 기꺼이 클리나멘이 되려는 이의 조언이니 믿음이 더 가고 생각이 더욱 깊어진다. 1년 전 우리가 들었던 촛불마냥 이 책은 확실히 세상의 온도를 조금은 더 뜨겁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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