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박정희(1917~1979) 출생 100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재단'이 독재자 박정희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는 있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더욱이 우리 국민 3명 중 2명이 박정희 동상에 반대하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독재자의 동상 건립을 추진하는 것은 절대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 관련 기사 : 국민 3명 중 2명이 박정희 동상에 반대한다)
박정희 독재 정권의 후유증은 한국현대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박정희는 친일세력 등용문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중병을 앓고 있는 정치적으로 선동된 지역감정, 그리고 군사독재의 유산인 획일적 사회풍토를 만들었다. 더욱이 박정희 정권기의 '영원한 2인자' 김종필(1926~ )은 지난 1961년 6월 중앙정보부를 창설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민주주의에서 퇴보시키고,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무시된 통제국가, 경찰국가를 만드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박정희 정권은 처음부터 합법성이 철저히 결여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그래서 그는 쿠데타 정권의 정당성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 감시, 고문, 협박으로 다스렸다. 박정희는 1961년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자 곧 국회를 해산시켰고, 일제강점기 이래로는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정치, 집회의 활동도 금지했다. 1961년 말에 이르러서는 3000명이 넘는 박정희의 정적이 체포되었다.
박정희가 일으킨 5.16쿠데타는 우리정치에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우리 정치·사회에 개성과 개인의 독창성이 무시된, 전체주의화, 획일화를 가져온 것이다. 박정희는 계엄령이 없이는 우리나라를 제대로 통치할 수 없었다. 현재의 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이후의 정권이 박정희 정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것은, 계엄령이나 '국가원수 모독죄'가 없이도 국가를 통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무시하고 탄압한 박정희 정권은 많은 면에서 일제 식민지 정권과 유사성이 많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인 시민의 정치참여나 국민투표는 시간 낭비로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1963년 3월에 접어들어 박정희는 그가 한 약속을 서슴없이 깨뜨리고, 군정은 4년간 더 연장될 것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박정희의 발언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반향을 일으킨다. 결국 한 달 후인 4월 8일, 박정희는 불가피하게 군정 연장 계획을 취소한다고 밝히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연말에 대선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또 한 번 국민과의 약속을 주저 없이 깨뜨리고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결국 정권을 거머쥐게 된다.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은 한마디로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이다. 박정희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혹은 참여정부 같은 개념을 의심쩍어했고, 국민의 대변자를 모아놓은 국회의 기능을 신뢰하지 않았다. 1967년 대선을 치르고 박정희는 또 간신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과 학생들은 이 선거를 '부정선거'로 이름했다. 결국 박정희는 전국 31개의 대학과 136개의 고등학교에 한동안 휴교 조치를 내림으로서 정권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일제가 식민지 기간을 통해서 한반도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민주주의보다는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웠던 것처럼, 박정희는 '중단 없는 전진'이나 '경제성장'을 최고의 자부심으로 삼았다. 일제가 한때 주창했던, 민관군이 아닌 군관민, 부국강병, 서민의 탈정치화, 반공 등의 가치이념이 박정희 정권을 통해서 재계승되고 재등장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임기가 4년인 것도 잊은 듯 중앙집권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다. 1961년부터 1971년 사이 남한의 GNP는 연평균 8.7%가 증가했고, 수출은 연간 36%가 증가했다. 더욱이 1972년부터 1978년 사이 남한 GNP 연간 평균 성장률은 10%를 웃돌았다. 1961년부터 1978년 사이 남한국민 개인당 수입도 240%가 증가했다.
박정희 정권기, 성장과 함께 사회 양극화 더욱 심화
그러나 남한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동시에 급속한 인플레를 동반했다. 1962년부터 1971년 사이의 도매가격은 연평균 12%가 증가했고, 1972년부터 1979년 사이엔 연평균 18%가 증가했다. 성장과 함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소득분배를 살펴보면, 1965년 최하위 30% 근로자의 전체 소득률은 19.3%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5년엔 16.9%, 1980년엔 16.1%로 점점 떨어졌다. 결국 박정희 정권을 통하여 국가 경제는 부강해졌지만, 서민을 위한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상대적 빈곤층은 더욱 증가해갔다.
흔히 1960~70년대 남한의 급속한 경제성장 '기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박정희와 함께 정주영(1915~2001)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여기서 정주영과 함께 꼭 거론되어야 할 인물이 전태일(1948~1970)이다. 1960~70년대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산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농촌이 파괴되고 도시노동자의 수가 급증하면서 빈부격차와 노사대립이 심화되었다. 사회적 불균형이 확대되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의 편파적 노사 개입이 이루어졌다. 이에 노동운동은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 민주노조 결성,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저항을 벌였다.
1970년대에 발생한 전태일 분신자살사건, 동일방직사건, YH무역농성사건 등은 노동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사회적 인식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공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며 한없는 연민과 분노를 느낀다. 그가 구한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분명히 명시해 놓았지만 현실적으로는 폐지에 불과했다. 전태일은 작업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며 여러모로 최선을 다하지만, 기업주와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유착 관계로 그의 노력은 모두 수포가 된다. 절망한 그는 마침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리는 산 제사를 드림으로써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 숨을 거둔다.
1970년대 초반 나의 큰어머니는 동네 앨범 공장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했다. 그때 큰어머니는 격무로 인해 건강이 많이 악화됐는데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하루를 쉬면 공장주가 3일분 월급을 맘대로 공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당 노동행위에 대해 노동자가 전혀 저항할 길이 없는 것이 박정희가 내세운 이른바 '조국 근대화'였고, '선진 조국'이었다. 시민의 권리신장과 아무런 상관없는 경제 성장은 기득권세력과 가진 자들을 위한 축제일뿐 아무것도 아니다.
근로자의 근무조건 개선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 같은 이른바 '좌익사상'에 대해 박정희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반공은 마치 박정희 정권의 존재 이유처럼 보이기도 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어떠한 행동도 '자생적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몰렸다. 건전한 비판은 발붙일 곳이 없었고 '적과 동지'의 흑백논리, 이분법적 개념만이 우리사회를 휩쓸었다.
제2 집권기를 맞아 박정희는 놀랍게도 이승만(1875~1965)의 전철을 똑같이 밟아 온갖 시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자적으로 삼선개헌을 실시한다. 그래서 열린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가까스로 김대중(1924~2009)을 물리쳤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김대중은 도시지역에선 51.4 % 대 44.9 %로 박정희를 제압했다. 이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꼈었던 것 같다. "중단 없는 전진, 경제성장, 민족중흥의 영웅인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가…"는 아마도 박정희가 국민들에게 느낀 분노와 '배반'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는 1971년 4월 27일 대선이 끝나고 곧 국가비상사태에 이어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비록 박정희는 이 당시 중공이 대만을 대신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으로 앉은 것 때문에 국내외적인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당시 <뉴욕타임스> 사설은 박정희의 이러한 정책에 대해 이렇게 보도한다.
"외부의 관망세력, 미 국무부와 주한 미대사관은, 미스터 박이 선포한 위협사태의 흔적을 전혀 감지할 수 없다. 미스터 박이 외부 위협이라고 우려한 것은 분명히 군사적 도발이 아닌 그 반대의 데탕트(국제 간의 화해무드)일 것이다."(1971년 4월 28일 자 <뉴욕타임스>)
국회를 해산한 박정희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이런 지적에도 아랑곳없이, 박정희는 1971년 10월 마침내 국가 안보를 위한다는 이름 아래 유신을 선포한다. 유신체제는 박정희에게 거의 무한한 권력을 부여해 줬다. 그는 이제 비상계엄을 맘대로 선포할 수 있고, 국회를 해산하고 허수아비 입법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든다.
국회 해산에 뒤이어 김대중, 김영삼(1927~2015)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은 하루아침에 체포, 구금되었다. 박정희는 그것도 모자라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의 3분의 1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한다. 이어서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연속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언론자유, 학생데모, 지식인들의 비판에 족쇄를 채웠다. 급기야 8명의 대학생들에게 사형을 내려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박정희의 죄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감히 그를 기념하는 동상을 그것도 소중한 국민의 혈세로 공유지에 건립하겠다는 망상을 한순간이라도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유신은 박정희의 독재체제를 합법적으로 보장해 주었고, 그에게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때 박정희가 내놓은 것이 소위 '충효 논리'다. 국가(박정희 자신)에게 아무 말 말고 무조건 충성하라는 통치이념인 것이다.
곧이어 1973년엔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원들로부터 일본서 납치당한 후, 죽을 고비를 넘겨서 중정 지하실로 끌려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 1974년 1월에 들어서는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된다. 국가안보와 공공의 안녕질서가 위태롭다고 하는 논리였다. 이제 누구든 박정권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는 자는 15년 징역을 받게 된다. 이 당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 징역을 받은 이들이 장준하(1918~1975), 김동길(1928~ ) 등이다.
정치 토론을 불법화시킨 박정희
긴급조치를 이용해 박정희는 정치 토론을 불법화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논리를 알 길이 없는 듯 박정희는 어떠한 형태의 자신에 대한 도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함석헌(1901~1989)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기도회나 평화행진을 벌임으로서 박정희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마침내 1975년, 박정희는 긴급조치9호를 선포했고, 이제는 박정희나 긴급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것조차도 범법행위로 간주되었다. 한 인간이 비판받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다. 하늘 아래 완전한 인간이 없건만….
1978~1979년에 이르러 박정희는 "나 한번 더하게 해줘"라며 4선을 준비하고 있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저항은 높아만 갔다. 사람이 권력에 미치게 되면 이렇게 치사하게 되나 보다. 이제 경제 성장 논리에 분배를 외면당한 시민들의 분노는 박정희가 어떤 방법을 쓰던 통제가 어려워져 갔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박정희는 결국 1979년 김대중을 '빨갱이'로 조작,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압력으로 박정희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을 집행할 수 없게 된다. 더욱이 1979년 10월 박정희는 야당 지도자인 김영삼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하고 국회에서 추방한다. 그러자 부산과 마산에서 이에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나고 박정희는 다시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때 박정희의 오른팔이라던 차지철(1934~1979)은 "각하 탱크로 50만 명을 깔아 죽이더라도 정권을 유지하셔야 합니다"라는 '직언'을 했다니, 그리고 그런 차지철을 오른팔로 두고 나라의 비상사태를 논의하다니….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차지철은 화장실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다. 어찌 한 정권의 말로가 이렇게 추잡하고 너절하게 끝나는지…. 하여간 이렇게 박정희는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도 지금 독재자 박정희 추종자들은 역사적 '위인'에 한정하고 있는 동상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고(故)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이 남긴 말처럼 사람이라면 "좀 부끄러운 줄 알아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1979년 벌어진 비극의 역사는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박정희 추종자들은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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