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지난 10월 24일 청와대가 주최한 노동단체와의 간담회 및 행사에 민주노총의 불참에 대한 의견이며, 얼마 전 이에 대해 윤효원님께서 쓰신 글, "사회적 대화에 관한 민주노총의 세 가지 오류"에 대한 반론의 성격도 있습니다.
먼저, 사회적 대화에선 주체들에 대한 상호인정이 그 시작입니다. 대화는 서로의 필요에 의해 시작됩니다. 주체들이 대화에 참여하지 않으려 한다면 이유부터 물어보고 원인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윤효원님께선 민주노총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 중 한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민주노총을 이해하려고 하신 것 같진 않습니다.
지적하신 세 가지 오류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첫째, 노정교섭도 사회적 대화의 일부분인데, 민주노총이 노정교섭을 요구하면서 사회적 대화는 거부하는 모순을 보인다는 비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가리키는 달 말고 손끝만 바라보는 경우'입니다. 여기에서 사회적 대화란 '기존의 사회적 대화 방식', 즉 노사정위원회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 이해됩니다. 만약 민주노총에서 '노사정위가 아니라, 노정교섭을 요구한다'고 고쳐 주장한다 해도 변한 것은 문장속의 낱말일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둘째, 노조에게 정보와 협의의 축적이 필요하다. "정보의 확대와 협의의 강화를 통해 교섭의 토대를 닦으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역시 맞는 말입니다. 노조가 교섭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노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교섭의 토대는 노조만 닦는다고 길이 마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나 사용자 단체도 사회적 파트너인 노조가 정보와 협의를 축적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셋째, 노사정위원회가 신자유주의의 도구로 반노동정책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민주노총의 주장은 현실의 한 부분을 일반화한 관념론적 인식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더욱 자유주의적인 기재부나 산자부 폐지는 왜 주장하지 않냐고 문제제기 했습니다. 만약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언급한 '국가기구 내에도 오른손과 왼손이 있다'는 말을 옮긴다면, 기재부나 산자부는 오른팔, 노사정위나 인권위는 왼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전 오히려 정부기관 내 기재부나 산자부가 있으니 노조가 참여하는 노사정위원회라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방향에서 다시 구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교섭만이 선이고, 투쟁은 악인가요?
상대방이 가지고 있거나 해줄 수 있는 일을 얻고 싶을 땐, 자신이 가지고 있거나 해줄 수 있는 것을 제안하면서 교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러한 교환을 노사관계에선 교섭(bargaining)이라고 하죠. 하지만 이것은 내가 무언가를 주면 반드시 상대방의 것을 받을 수 있다는, 거래 대상이나 제도에 대한 신뢰가 존재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만약 과거에 거래가 이행되지 않은 경험이 있거나 제도가 이를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법을 찾거나 제도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해야죠. 이것을 투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나 시민들이 언급했거나 하고 있듯이 과거 1997년 노사정위의 경험에서 노조는 '현금을 주고 어음을 받는' 거래를 했었고, 그 어음의 지불 여부에 대해 채권자였던 민주노총은 만족해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기울어진 운동장' 논의에서도 보듯이 현재도 이 같은 문제는 지속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섭과 투쟁은 현실에선 칼로 무 베듯이 2분화되지 않고, 교섭을 통한 투쟁, 투쟁을 통한 교섭 등으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좀 더 분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ILO 협약 비준의 사례를 들어 볼까요? 노동계 입장에서 ILO 협약 비준은 교섭의 사안일까요? 투쟁의 사안일까요? ILO협약을 비준하기 위해 노조는 교섭을 통해 사용자단체가 요구하는 노동 유연화를 들어주면서 비준을 성사시켜야 합니까? 아니면 정부와 의회에 비준을 요구하며 투쟁해야 합니까? 물론 이 역시 어느 하나의 요소가 일변도가 아닌 혼합된 문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섭만이 선이고 투쟁은 악'이라는 관점은 지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역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나서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엔 민주노총의 투쟁이 여전히 필요하단 점 역시 부정하지 않습니다.
민주노총이 왜 노정교섭을 고집하냐고요? 그럼 왜 정부는 노정교섭 배제를 고집합니까?
정부는 민주노총에게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왜 노정교섭은 안되죠? 왜 노사정위원회를 고집하고 있는 거죠? 정부가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노정교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부가 노정 교섭을 하고, 또한 사용자단체와도 교섭하면 됩니다. 반드시 한 탁자에서 노사정이 함께 만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정부의 굵직한 노동정책은 의회의 결정을 통해 진행됩니다. 정부가 각각 다른 테이블에서 만나 그 내용을 조정하면 됩니다. 문제는 얼마나 그 내용이 사회 주체들의 합의를 모아내고 지지를 받느냐에 따라 의회 결정과정에서 압력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즉 합의 수준이 높을수록 의회는 그 내용을 존중하고 수용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은 지난 10년간 정권으로부터 가장 억압받았던 단체 중에 하나입니다. 현재도 한상균 위원장은 누구는 3평이 넘는 곳에 수용되어도 인권탄압이라는데 그보다 훨씬 작은 공간에 훨씬 더 일찍부터 갇혀 있습니다. 더욱이 일부 지도부도 여전히 수배 중이라는 현실을 생각하면 대통령 초청 자리에 참여해서 와인 잔을 치켜들며 건배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민주노총 성명서에서 '세련된 이벤트가 아니라 우직한 진실성'을 정부에게 기대한다고 이야기한 대목에서 이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의를 위해 참석하는 대범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정부에게도 아쉬움을 표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사회적 대화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한 측면으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입니다. 이번 시도를 거울삼아 더욱 잘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한숨이 헤어날 수 없는 박탈감 속에서 깊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1997년 경제위기라는 상황논리에 쫓겨 허겁지겁 해치웠던 사회협약을 반성하며, 좀 더 세심하고 진지한 성찰 속에서 '노동존중 사회로 향하는'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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